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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이 모인 곳, 신령들이 모인 곳, 도깨비들이 모인 곳을 지나고….
하늘꽃밭 사람들이 있는 구역에 도착했는데, 퍽 조용했다. 윗관리자들은 따로 모여 있기 때문에 단정한 의복을 갖춘 중간 관리자들만 오순도순 모여서 식사하고 있었다.
천지천해는 하늘꽃밭과는 정반대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거의 나라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커다란 가문을 일구고 대대손손 번성 중인 사신방은 소속 인구가 많아서 중요 인물만 왔음에도 두 구역을 차지했다.
주작과 청룡이 한 구역, 현무와 백호가 한 구역에 자리했는데, 주작과 청룡 가문은 극락 구역만큼 시끌벅적했다. 다만 춤추고 노래하느라 시끄러운 게 아니라 싸움이 일어난 탓에 시끄러웠다.
“야, 이 개새끼야! 떡을 대체 몇 개나 처먹는 거야? 평소에 굶고 다니냐?”
“뭐야? 그러는 지는 바나나나 처먹지 어디서 고상한 척 젓가락질이야?”
싸움 구경은 언제든 즐거운 일이라 영영과 지온은 구석에서 싸움이 일어난 곳을 힐끔거렸다.
“12신장 중 강아지와 원숭이 가문이 싸우고 있군.”
“두 신수가 사이 안 좋다는 소문이 정말이었네.”
사신방 아래의 12신장 또한 가문을 이루고 있다. 양, 원숭이, 닭 가문은 주작 가문을 따르고, 개, 용, 뱀은 청룡을, 토끼, 소, 범은 현무를, 돼지, 쥐, 말은 백호 가문을 따른다.
그중에서도 원숭이 가문과 개 가문은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데, 반대로 주작 가문과 청룡 가문은 사이가 좋기로 유명했다.
“어이. 송원. 그만 싸우게. 가주님이 아시면 얼마나 불호령을 내리시겠나.”
“지금 제가 바나나나 처먹으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본가 분들께서는 제 편을 들지 못할망정 어찌하여 말리십니까. 서운합니다!”
“이보게, 조견. 여기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 하객들이 지나가고 있질 않은가. 얼른 와서 자리에 앉게.”
“저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어야 하는데 왜 본가 분들께서는 저 보고 먼저 물러나라고 하십니까! 서운합니다.”
원숭이와 개는 주작 가문과 청룡 가문 직계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 도발을 당한 듯 발끈했다.
둘의 싸움이 격렬해지자 영영과 지온은 설마 정말 싸움이 일어날까 조마조마했다.
“이거 얼른 밖에 나가서 사람을 불러와야 하는 거 아닌가?”
“사신 가문 말도 안 드는 십이신장의 싸움을 누가 말린단 말이야.”
“이리 선인의 신령들이 일손을 돕고 있던데 그분들이라도….”
“으음, 그래. 일단 나가 보지.”
둘은 난리 통을 틈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굳이 그들이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다. 낮은 울타리 너머에서 이리의 신령인 이해자가 누군가를 막 데리고 오고 있었다.
“여기야, 전우치. 절대로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줘.”
“걱정 마십시오, 이해자 신령. 감히 우리 이리 선인님의 행사에 싸움은 안 될 말이지요.”
남청색 융복에 대나무 잎으로 장식한 갓을 쓰고 허리에는 환도를 찬 이 군사는 바로 포도대장 전우치였다. 듣던 대로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우치, 저 원숭이와 개 가문 녀석들은 우리가 싸움을 말리고 떠나도 5분 후면 또 싸우고 있을 거야. 내가 아예 계속 여기서 기도식 시작까지 머무를 테니 너는 네 스승님께 가봐.”
그 옆에서 같은 군복에 환도 대신 활과 화살통을 찬 이가 말했다. 영영과 지온은 그자가 누구인지까지는 몰랐으나, 전우치의 친우인 송기수란 자로 전우치와 마찬가지로 이리 선인을 존경해서 오늘 기도식의 경비원이 되기를 스스로 청해 이곳에 왔다.
“나도 함께 머무르도록 하지.”
“어서 가라니까. 뭉용 선인님과 같이 술도 한잔하고. 오랜만에 만났잖아.”
“음….”
끼웅.
이해자의 목깃에서 그림자 잡귀가 쏙 고개를 내밀더니 목깃을 잡아당겼다. 이해자는 알겠다는 듯 잡귀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넣었다.
“그럼 나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 하객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들어오고 있어. 초대장 돌린 수보다 훨씬 많아. 대체 양심은 어디다 판 녀석들인지 정말이지.”
‘헉, 이런.’
‘얼른 자리를 피하세.’
전우치가 원숭이와 개의 싸움을 어떻게 말릴지 궁금했지만, 초대장을 받지 않고 들어온 영영과 지온은 그 말에 지레 찔려서 얼른 자리를 떴다.
물론 궁을 나간 게 아니라 이해자의 시야만 피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현무와 백호 가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은 많은데 아주 조용하고 고요했다. 영영과 지온은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짓눌려서 걸음을 빨리했다.
뾱뾱뾱뾱.
어디선가 생뚱맞은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리자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 소년이 떡을 담은 접시를 들고 오다 말고 멈칫했다. 그 옆에는 은청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외모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그가 바로 5대 현무인 ‘현흔’이었다.
히익, 여영과 지온이 기겁했다.
천지신명을 비롯한 고위관리직은 따로 공간이 마련되었는데, 저이는 어찌 여기에….
우선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현흔이 아이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고개를 작게 젓는 게 보였다.
“…여, 역시 안 되겠어요.”
갈팡질팡하던 소년이 울망울망한 눈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현무가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다.”
“…하지만.”
“무서운 자들이 아니다. 어서 주고 오거라.”
현무가 소년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소년은 주춤주춤하더니 용기를 낸 듯 입술을 깨물고 다가왔다.
뾱뾱뾱뾱.
소년이 두 뺨을 발그레 물들고 접시를 내밀었다.
“저기… 이거. 이거…….”
영영은 소년이 말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이, 이거 떡… 드세요.”
“오, 고맙네. 마침 배가 출출하던 참이었어.”
“잘 먹겠네, 도령.”
지온까지 감사 인사를 하자 소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뾱뾱뾱뾱.
소년이 다시 빠르게 현무에게 돌아갔다. 현무는 영영, 지온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는 저를 향해 두 팔을 뻗는 소년을 안아 들었다. 소년은 현무에게 편하게 안긴 채 학교에서 시험 백 점을 맞은 아이처럼 조잘거렸다.
“떡을 받아 주셨어요.”
“그래. 무서운 자들이 아니라고 했지.”
“더 많은 사람이 왔으면 좋겠어요. 맛있는 떡을 나눠 드리고 싶어요.”
“분명 더 올 것이다.”
현무가 소년의 등을 토닥이며 주위에 있던 신하에게 눈짓했다. 속뜻을 눈치챈 신하가 호객 행위를 하기 위해 빠르게 사라졌다.
영영과 지온은 소년이 보는 자리에서 떡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적당한 곳에 앉았다. 소년의 시선이 따라왔다.
뾱. 뾱뾱.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다가 말았다.
“저, 그런데 현무 님… 왜 저만 이런 신발을…….”
“너는 집에서도 자주 길을 잃지 않느냐.”
“혼자 돌아다니지 않을게요.”
“못 믿는다. 신고 있거라.”
“…….”
“소리가 정 싫다면 안아 주마.”
현무가 소년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한두 번 안고 안긴 게 아닌지 현무도, 소년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취했다.
현무는 소년을 안은 채 영영, 지온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소년이 현무의 허벅지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잡신과 신령이 가만히 살피니 현무 가문의 가솔들이 죄다 이쪽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아, 이 떡 한 번 기똥차게 맛있다.”
“여기까지 와서 이 떡 맛을 안 봤으면 큰일 날 뻔했구만!”
영영과 지온이 과한 리액션을 하며 떡을 먹자 소년이 살풋 웃었다. 차가운 얼굴의 미남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고, 가솔들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다들 소년을 아끼고 있는 듯했다.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그때 유능한 신하가 지나가던 신령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니, 바쁜 사람을 붙잡고서 갑자기 무슨 떡을 처먹으라는 말이냐.”
“우리는 일손을 도와야… 잠깐, 현무 가주님이시군요. 왜 이곳에 계십니까?”
영영과 지온이 신령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들어온 이들은 바로 약사와 학문가였다. 하객이라기보다는 일손으로 참석한 신령들은 현무가 반가운지 잠시 자리에 착석했다. 현무와 신령들이 인사하는 동안 소년이 폴짝 내려갔다.
뾱뾱뾱뾱.
음식이 진열된 탁자 앞에서 부지런히 접시에 각종 떡을 담은 소년이 뾱뾱뾱뾱 달려왔다.
“넘어진다. 조심하거라.”
현무가 주의를 주는 그때, 소년이 그새 비틀거리더니 넘어지고 말았다.
“서윤아!”
현무가 바람처럼 달려가 소년을 일으켰다. 소년도 놀랐는지, 현무의 품에 폭삭 안긴 머리 위로 조그만 동물 귀 두 개가 봉긋 솟았다. 납작하고 작은 귀였다.
현무가 겁먹은 소년을 안고서는 자리로 돌아왔다. 식솔들이 침과 연고를 가지고 우르르 몰려왔다. 백호 쪽에서도 의원이 필요하느냐 물어왔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에는 약사 신령이 있었으니까.
“제가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가주님.”
“…….”
현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약사가 소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 상처 좀 볼게.”
소년이 서러움 가득한 커다란 눈으로 현무를 한번 올려다봤다가 현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그맣게 “네….” 했다.
바짓단의 매듭을 풀고 무릎 위까지 올리자 피가 비치고 있는 상처가 드러났다. 약사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소년이 움찔하면서 현무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다리를 자꾸 피하려고 하자 학문가가 말했다.
“서윤아. 약사 녀석도 뿌리가 짐승이란다. 어떤 짐승인지 궁금하지 않으냐?”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렁그렁한 눈에 초롱초롱이 섞이기 시작했다. 약사가 하는 수 없이 짐승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머리 위에 뿔 두 개가 솟아났다. 높다랗게 자란 그것은 노루 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