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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88화 (8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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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식 본식이 열리는 시간은 오후 세 시였지만, 오전부터 궁궐 문을 활짝 열어 하객들을 맞이했다.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규모 연회인 데다가 쉽사리 볼 수 없는 이리 선인을 볼 기회이기 때문에 초대장을 받지 않은 자들도 기웃거렸다.

“아아, 우리도 들어가 보고 싶은데….”

“살면서 언제 또 기도식과 이리 선인을 볼지 모르는데 정말 들어가 보고 싶구만….”

진현계에 올라온 지 각각 100년, 120년 되는 잡신 영영과 신령 지온도 그들 중 하나였다. 진현계에 올라온 후 친구가 된 둘은 진현계 구석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다가 기도식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들꽃궁까지 찾아왔다.

“어찌 이런 화려한 곳에 수수한 이름이 붙여졌는지 의문이구만. 화려궁이라고 불러야겠는걸.”

“안쪽을 보게. 안쪽은 더 화려하고 맛있는 냄새도 나. 이 냄새는 영지버섯과 매화, 소나무 가지를 담가 만든 술 냄새가 아닌가?”

“아아, 이리 선인의 기도식답네. 정말 들어가고 싶군….”

영영과 지온이 대문 앞을 맴돌았다. 그들처럼 초대장 없는 이들이 바쁜 틈을 타 들어가려다가 문지기인 청의동자에게 가로막혔다. 그 모습을 본 초대받지 못한 이들이 시도를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영영과 지온은 영 아쉬워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청의동자들과 눈치 싸움만 하는 그때였다.

“음? 잠깐. 거기 너. 영영이 아닌가?”

궁궐 안쪽에서 한 노인이 다가왔다. 도토리를 한 아름 안고 있는 그 노인을 알아본 영영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음악가! 정말 오랜만이오.”

영영은 음악가가 다스리는 산에 살던 잡신이었다. 장구에서 뻗어 나온 잡신이었기 때문에 음악을 좋아하던 음악가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녀가 진현계로 올라가는 선택을 했을 때 음악가는 축하하는 한편으로, 굉장히 아쉬워했다.

“진현계에 올라온 김에 자네를 보러 갈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 마주치는군. 어서 안 들어오고 뭐 하는가?”

“사실 우리는 초대를 못 받아서 들어갈 수가 없네. 아, 이쪽은 지온이라고 하네. 진현계에서 만난 내 친우라네.”

“안녕하신가. 만나서 반갑소, 음악가.”

“만나서 반갑네. 영영의 친우라면 내 친우이기도 하지!”

음악가는 호쾌하게 웃고는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 떠났다. 영영과 지온은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기다렸다. 음악가가 다시 돌아와 ‘궁궐 주인에게 허락을 받았으니 들어오게나’라고 말해 주길 바라며.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 펼쳐졌다.

음악가는 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안녕. 영영과 지온이라고?”

“이, 이, 이리 선인….”

무려 이리 선인이 직접 납신 것이다!

전설로만 듣던 이리 선인이 청초하면서도 어여쁜 얼굴로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

“음악가의 친우라면 믿을 수 있지. 어서 들어와. 동자들에게 얘기해서 자리를 마련해 놓을 테니까 본식도 보고 가렴.”

“이, 이리 선인….”

“이리 선인…. 이리 선인.”

“응?”

“이리 선인….”

“이리… 이리 선인….”

영영과 지온은 바보처럼 이리 선인의 이름만 염불을 외웠다. 옆에서 음악가가 “샤먼 영접한 어린 팬들도 안 이러겠다” 하며 혀를 찼다.

“스승님! 여기, 잠시만 여기 좀 와 주세요.”

우렁찬 남자 목소리에 왁자지껄했던 내부가 잠깐 조용해졌다. 영영과 지온도 놀라서 그쪽을 바라보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이 진한 남자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으로 보아 오늘의 주인공인 김도진이 분명했다.

“응, 지금 갈게.”

대답한 이리가 영영과 지온에게 말했다.

“그럼 나는 가 볼게. 재미있게 놀다 가.”

“이, 이리 선인…….”

영영과 지온은 끝까지 어벙벙하게 굴다가 이리 선인을 보냈다.

“이리 선인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늘 존경한다고 꼭 말해야 했었는데!”

“앞으로 친우로 지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감사 인사는 꼭 해야 했는데!”

둘은 어이없게도 이리가 떠나자마자 입이 터져서 음악가를 붙들고 쏟아냈다.

“나중에 마주치면 그때 얘기하게나. 아, 저기서 사물놀이를 하는군.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재미있게 놀고 본식 때 보세.”

음악가가 도토리를 한 웅큼 집어 입에 털어 넣으며 후원으로 향했다. 영영과 지온은 서로를 위로하다가 본격적으로 구경을 시작했다.

이리 선인의 궁궐은 외부 담벼락은 높으나 내부 담벼락은 낮았다. 그마저도 허리 높이에 불과해서 담이라기보다는 울타리에 가까웠다. 본래 이렇게 생겼는지 오늘을 위해 재건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이 여러 채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넓은 궁의 앞마당에서는 염라대왕, 옥황상제, 마고할미, 사신방 같은 이들이 기도식 전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영영과 지온은 그곳엔 들어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뜰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한창 음식을 나르는 청의동자들이 보였다.

다양한 식성을 지닌 존재들을 위해 떡과 고기, 묵, 국밥 등 음식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술도 다섯 종류였는데 전부 취하지 않는 술이었으며, 물 역시 ‘깊은 산속 옹달샘’,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 ‘푸른 하늘 은하수’ 등 다섯 종류나 되었다.

각자 닭꼬치 하나씩을 들고 구경하다가 영영이 우뚝 멈췄다.

“저, 저기 좀 보게. 저승인들이 모여 있군!”

“잠깐. 그럼 바로 저들이 49차사와 저승 시왕?”

새카만 도포를 입은 이들이 외전에 가득했는데, 원형 탁상을 빙 둘러앉은 사람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한 명만 빼고는 전부 체격이 커다랬으며 눈썹이 부리부리했다.

영영이 숫자를 헤아렸다.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전륜대왕.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저승 시왕으로 합류한 화담 선인까지.

“아홉 명이야. 시왕이 아홉 명이나 참석하다니 역시 이리 선인의 기도식답군!”

“그런데 저분들은 왜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 겐가? 음식의 맛이 별로인가?”

“이렇게 맛이 좋건만 시왕의 성에 찰 정도는 아니었나 보구만.”

“허어, 이보게들. 그거 오해이외다.”

지온의 물음에 마침 옆에서 닭꼬치를 한 손에 다섯 개씩 쥐고 먹고 있던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끼어들었다.

“저승 소속된 이들이 이리 선인이 준비한 음식을 맛없어했다는 헛소문은 자제해 주시오. 저승에서 하도 인상을 쓰는 게 버릇이 되어 평소에도 저리 찌푸리신다오. 보시오, 최근 시왕이 된 화담 선인은 웃으며 먹고 있질 않소.”

“오오, 과연 그렇군. 알려 주어 고맙소.”

영영과 지온은 몰랐지만, 이 사내는 바로 월직차사 이덕춘이었다. 둘이 조금 더 머물렀다면 일직차사의 귀를 잡아끌고 오는 강림도령를 볼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둘은 바로 자리를 떠서 보지 못했다.

“이리 선인이랑 김도진이란 녀석 손맛이 대단하네. 야, 일호. 우리 저승에 좀 싸갈까?”

“쪽팔린 얘기 좀 하지 마. 그리고 이 음식들을 둘이 직접 만들었겠냐? 듣기로는 인테리어는 나비 선인한테 맡기고, 음식은 요리이기라는 도깨비한테 맡겼다던데.”

“요리이기? 이름도 벌써 요리 잘하게 생겼네. 가서 레시피 좀 물어보자.”

저승 구역을 나서려는데 혼령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기에 영영이 크흠,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요리이기는 중간계에 있네. 과거에 식인을 했던 놈이라 진현계에 못 올라온다네.”

“아, 그래요? 알려 줘서 감사합니다.”

여자 혼령이 고개를 꾸벅하고는 일행에게 말했다.

“저승도 이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야 해. 음식 맛이 그따구니까 저승사자들이 자꾸 이승 음식에 넘어가서 혼을 수거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거라고. 내가 왕이 되면 저승에 레스토랑을 세우겠어. 이름은 홍연 레스토랑. 어때? 괜찮지?”

그제야 영영과 지온은 이 혼령이 왕 후보 중 하나인 ‘홍연’이라는 걸 알았다.

‘역시 이리 선인의 기도식은 대단해….’라는 의미의 시선을 교환한 둘이 뜰을 따라 이동해서 다음 구역으로 넘어갔다.

저승 옆에서는 극락에서 온 하객들이 와하하 웃으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저기를 봐. 백의를 입고 탈춤 추는 이들이 바로 칠성신이네. 본래 하늘꽃밭 소속인데 지금은 극락에 파견되어 있다지. 탐랑성, 거문성, 녹존성, 문곡성, 염정성, 무곡성, 파군성. 일곱 명이 모두 왔군!”

“그 옆에서 투호 싸움을 하는 이들은 오방신장이 아닌가? 동방청제, 서방백제, 남방홍제, 북방흑제, 중앙황제까지. 오방신장이 다섯이나 모인 건 처음 보네.”

“오오, 이럴 수가.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그 외에도 팔만사천제대신장, 삼태육성제대신장, 작두신장, 야차신장, 이십팔숙 제후신장 등 평생 한 번 보기도 어려운 이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영영과 지온은 감탄하다가 무곡성에게서 떡을 한 입 얻어먹고 이동했다.

둘은 여러 군데를 다녔다. 후원에서 오색 빛깔의 잉어가 호수 위를 날아다니는 모습도 구경하고, 소나무들이 멋들어지게 가지를 뻗고 있다가 중간에 가지가 아픈지 슬쩍 자세를 바꾸는 모습도 구경했다.

높은 계단이 있는 구역에는 인간계를 상징하는 이리 선인답게 에스컬레이터를 깔아 놓기도 했다. 대부분은 구름을 타고 이동하거나 하늘을 훌쩍 날아갔지만, 영영과 지온은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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