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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87화 (8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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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은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도진의 기도식 날짜가 7월 15일로 확정되고, 15일과 16일은 대여점 문을 닫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신령들 중 약사는 기도식 준비를 위해 일찌감치 진현계로 올라갔고, 이해자와 학문가는 대여점에 와서 일을 도왔다. 도진은 신령들에게 텃세를 부릴 생각이 가득했는데, 오히려 신령들이 도진보다 능숙하게 일을 도우며 텃세를 부렸다. 대여점이 바쁠 때 신령들이 일손이 되어 준 지가 수백 년째이므로 당연했다.

그 외 나비 선인, 전우치, 보부상 등 많은 이가 여러모로 도와준 덕분에 기도식 준비가 순조롭게 끝나고 드디어 당일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장 깨끗한 물로 목욕재계를 마친 도진은 경건한 마음으로 옷을 갖춰 입었다. 인터넷에서 ‘멋있는 개량한복’, ‘멋있는 퓨전한복’ 등을 검색한 뒤 엄선한 곳에 주문 제작한 옷이었다.

검은 티 위에 약간의 변형을 준 하얀 소창의와 백색 중치막을 걸쳤다. 소창의 하단에는 산수화, 중치막 어깨에는 산과 구름, 소매에는 불꽃과 바람, 흙, 물결이 수놓아져 있었다.

허리에는 금실 장식을 단 허리띠를 차고, 종이로 만든 꽃 다섯 송이를 복숭아나무 가지에 길게 엮어 장식한 흑립을 쓴 뒤 마지막으로 태사혜를 개량한 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리가 도진을 보고 감탄했다.

“도진아.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다들 네 모습을 보고 놀랄 거야.”

“네, 그러겠죠. 후후.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없어야 할 텐데. 제게는 오래전부터 한 명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스승님 지금 완전 신선 같으세요. 본래 신선이시지만요. 신선들이 신선으로 떠받들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멋져요.”

한껏 치장한 도진과는 달리 이리는 수묵화가 그려진 학창의에 백색 도포를 걸쳤다. 장식이라고는 옷고름에 맨 매화꽃 말고는 없었지만 그조차도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특히 도포 안, 잘록하게 졸라맨 허리로 자꾸 눈길이 갔다.

“스승님 허리가 정말 가냘퍼서…….”

끼웅?

먹색 세조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끼웅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진이 확 인상을 썼다.

“네가 왜 내 스승님 허리에 매달려 있냐? 죽고 싶냐?”

“내가 매달아 놨어.”

이리가 끼웅이를 쓰다듬었다.

“봉술 장식 겸해서….”

“봉술 장식 겸, 제자의 음심 가득한 시선 방어 겸이군요.”

“…….”

“하지만 소용없어요. 손가락으로 하늘이 가려지나요. 두고 보세요. 언젠가는 스승님의 그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고 말 테니까.”

이리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무시하고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진현계로 통하는 양문 대문이 떡하니 서 있었다. 상수리나무에 버금가는 커다란 크기의 대문에는 흉포하게 생긴 도깨비 장식의 문고리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실제 장식이 아니라 신도, 울루라는 문지기 도깨비로, 이따가 산신령들이 이 문을 통해 진현계로 넘어와야 하는데 이리가 직접 마중 나올 시간이 없으므로 일일 고용했다.

도진이 신도, 울루의 문고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두 번 내리쳤다. 신도와 울루가 부리부리한 눈동자를 굴려서 두 사람을 확인했다.

쿠우우웅-

거대한 양문 대문이 활짝 열렸다. 도진의 시선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진아.”

이리가 도진을 보고는 문 너머를 향해 고갯짓했다. 도진은 그 뜻을 읽었다.

도진이 먼저 발을 내디뎠다.

강력한 결계를 통과하는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무지막지한 덕이 빠져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도진은 모아 둔 덕의 90%를 입장료로 소진하고 드디어 진현계에 입성했다.

하늘 위의 세계.

수많은 위아 중에서도 발을 들인 자가 극히 드문 곳.

진현계.

도진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낙원 그 자체였다. 들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 위에 오색 천과 장식으로 꾸며진 궁궐이 보였다.

선인은 누구나 진현계에 궁궐을 지니고 있다. 이리 선인 또한 마찬가지로 ‘들꽃궁’이라는 이름의 궁을 가졌다. 지금은 기도식 때문에 오색찬란하게 꾸몄지만, 본래는 들꽃처럼 수수한 곳이라 들꽃궁으로 이름 붙여졌다.

또한 진현계는 각 공간의 소유자마다 모습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비 선인의 궁궐은 언제나 봄이고, 뭉용 선인의 궁궐은 언제나 밤이다.

그리고 이리 선인의 궁궐은….

“후우. 하-.”

도진은 들꽃이 만발한 들판에 서서 가슴이 벅찬 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흉통이 크게 부풀었다가 천천히 꺼졌다.

따뜻한 바람 한 줄기가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얼굴에 닿는 햇살은 따스했고,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하얗고 노랗고 붉고 푸른 꽃들 속에서는 새와 나비와 꿀벌이 함께 꿀을 빨고 있었다. 민들레 홀씨가 평화롭게 떠다녔다. 가슴을 청량하게 만드는 풀 냄새와 꽃향기에 마음이 절로 너그러워졌다.

“어때? 괜찮아?”

이리의 물음에 도진이 당장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완벽해요! 스승님다운 궁궐이에요. 평화롭고 아늑하고 따뜻하고 다정하고…. 극락도, 하늘꽃밭도 절대로 이곳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거예요.”

“너무 띄워 주네.”

“띄워 주는 게 아니라 진심이에요. 당연히 아시겠지만.”

“그래. 고마워.”

이리는 칭찬이 싫진 않은지 미소 지었다.

둘은 평화로운 전경 속 오색 찬란한 궁궐을 향해 걸었다. 대문 앞에서 부지런히 길을 닦고 있던 청의동자들이 둘을 발견하고는 도도도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선인님, 안녕하세요.”

“선인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이쪽은 김도진이야. 도진아, 이쪽은 나비 선인의 동자들.”

청의를 입은 아이들이 도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안녕하세요, 도진 님.”

“안녕하세요, 도진 님.”

“어어, 안녕… 하세요.”

도진은 그동안 이리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은 많이 봤어도 자신에게 이렇게 격식 차리는 이들은 없었던 지라 당황스러웠다.

청의동자는 정중하게 길을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저희가 완벽하게 꾸며 놨어요.”

“나비 선인님께서 기다리세요.”

“응. 고마워.”

“고맙습니다.”

이리와 도진이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는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홍실은 왼쪽 매듭! 청실은 아래 매듭이라고 했지? 다시 묶어! …야, 누가 여기다 해치상 갖다 놨니. 해치상은 사람 안 다니는 곳에 둬야지! …잠깐, 너. 복장이 왜 이래?”

“아, 지, 지금은 일단 편하게 입고 나중에 갈아입으려고….”

“내 권속이 이런 꼴로 다니는 건 두고 볼 수 없어. 당장 갈아입어!”

“넵….”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는 위아들 가운데에 떽떽거리며 괴롭히는 이가 바로 나비 선인이었다.

“나비.”

“이리!”

도진 뺨치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나비 선인이 이리를 보고 활짝 웃었다.

“실력 발휘해 봤는데 어때? 괜찮지? 네가 액수 제한도 안 둔 덕분에 여한 없이 꾸몄어. 이 정도면 진현계에 역사에 남을 거야.”

이리는 꾸미기에 자신이 없어서 나비에게 궁궐을 맡겼다. 돈은 상관하지 말고 네 꿈을 마음껏 펼치라고 해 뒀더니 ‘들꽃궁’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궁궐이 탄생했다. 오색 천 장식과 매듭 장식은 물론이고, 음식을 담은 그릇과 술을 담은 병마저도 번쩍번쩍 빛이 났다.

“고마워. 정말 마음에 들어. 수고했어.”

“저도 좋습니다. 이 정도면 뇌리에 박혀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네요.”

어지간해서는 만점을 주지 않으려고 작정했던 도진조차 만족스러웠다.

“장미토는 뭐 하고 있어요?”

“후원에서 연못 꾸미는 중일걸. 그런데 너… 흠.”

나비가 도진의 위아래를 훑었다.

“제법 차림새에 신경 썼네. 이리의 손길이 아닌데?”

“제가 직접 주문 제작했습니다.”

“잘했네. 네 스승에 대해 알긴 아는구나. 그런데 왜 스승한테는 이렇게 입혀 놨니?”

“왜요? 멋있고 아름다우신데요.”

“너무 흑백이잖아. 이리는 쿨톤이라 좀 더 화려해도…… 아악! 야, 해치 상을 왜 거기다 둬. 너 누구야? 도우네 권속이니? 아니면 하계에서 기도식 망치려고 보낸 첩자야? 왜 자꾸 해치상을 하객들 앉는 곳에 놔두려고 들어?”

나비가 권속 하나에게 벼락처럼 호통을 쳤다.

“정말이지 안심할 수가 없다니까. 뭐 할 말 없으면 나는 저 녀석한테 해치 상 위치 알려 주러 가볼게.”

“응. 가 봐.”

나비가 후다닥 뛰다 말고 돌아봤다.

“아, 맞다. 이리.”

“왜?”

“약속 꼭 지키기야! 네 약속 때문에 무보수로 리모델링해 준 거니까. 알지?”

“그래. 걱정하지 마.”

나비가 후후 웃으며 다시 뛰었다.

외전을 지나 내전으로 들어가며 도진이 물었다.

“약속이 뭐였는데요?”

“나비가 여는 잔치에 참석하기로 했어.”

“대체 몇 번이나 참석해 주시기로 했길래 보수도 안 받아요?”

“한 번….”

도진이 눈을 끔뻑끔뻑했다.

“겨우 한 번인데 무보수로…? 스승님, 설마… 지금까지 잔치에 참가한 적 없으세요?”

“아예 없지는 않은데 오래되긴 했지…. 마지막이 나비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니까.”

이리가 사람 대하는 게 서툴다거나, 내성적인 성격은 절대로 아니다. 그저 대여점 일로 워낙 바빴기에 진현계 행사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만약 나비가 여는 잔치에 참석한다면 2천 년만의 이리 선인 등판이니 나비의 명성도 높아지고 진현계는 난리가 날 것이었다.

“나비 선인님의 콧대가 하늘 높아지겠네요. 그때 저도 꼭 데려가세요. 바늘 가는데 실이 안 갈 수는 없죠.”

“네가 진현계에 또 올 수 있을 만큼 덕이 쌓이면 그렇게 하자.”

“나비 선인님이 기도식 끝나자마자 부르지만 않으면 분명히 저도 입장료 낼 만큼은 모을 수 있을 거예요.”

도진은 설마 나비가 아무리 그래도 기도식 끝나자마자 잔치를 열지는 않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나비는 설마를 뛰어넘는 선인이었고, 도진은 스승을 홀로 잔치에 보내게 된다.

기도식이 끝난 후의 일을 알지 못하는 도진은 이리와 함께 궁 안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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