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83화 (83/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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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두리를 모두 잇자 그림이 일렁이더니 정말로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 저편에 사람 슬리퍼가 보였다. 요하가 구멍으로 뛰어 들어가자 이리 만물 대여점의 정원이 나왔다. 이리 선인과 부리부리한 제자가 요하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요하, 안녕.”

“안녕하세요.”

“아, 겁나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오긴 왔네.”

슬리퍼의 주인인 도진이 요하가 오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요하가 날카롭게 노려봤으나 어린 여우의 모습으로 노려봐 봤자 귀엽기만 했다.

“요하야. 시간이 없으니 일단 여우 구슬부터.”

“아, 네. 선인님!”

이리 선인이 검붉은색 환약을 건넸다. 지름 10cm나 되는 커다란 크기에 요하가 눈을 깜빡였다.

“더, 더 작게는 안 되나요?”

“네 안의 여우 구슬이 이 정도 크기라서 더 작아서는 효과가 없어. 대신 내일부터는 차츰 작아질 거야.”

“아…… 네.”

“삼키고 바로 토해내면 돼. 도진아, 요하가 바로 토하지 못하면 이 부근.”

이리가 여우의 등 어딘가를 콕 찍었다.

“여기부터 목뒤까지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려.”

“네.”

“너무 아프게 하지 말고.”

“걱정 마시고 들어가세요, 스승님.”

요하가 불안한 눈초리가 되었다.

“서, 선인님. 어디 가세요?”

“진현계에 볼일이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도진이가 대신 있어 줄 거야. 그럼 나는 갈게. 안녕.”

이리가 다정하면서도 냉정하게 인사하고는 대여점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붙잡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야, 빨리 처먹고 토해라. 자정에서 10분 넘기면 효과 반감된댔다.”

“알았거든? 재촉하지 마라.”

요하는 분명히 제 작디작은 목구멍을 괴롭힐 커다란 환약을 보고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입안에 던져 넣었다.

“……!”

뜨거운 불덩어리를 삼키는 것 같았다. 이리 선인의 설명대로 목구멍부터 배 안쪽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케엑, 켁, 켁!

요하는 땅에 네 발을 짚고 서서 환약을 토해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숨을 고르는 와중에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곧 등부터 목덜미까지 쓸어올리는 강인한 손가락 힘이 느껴졌다.

케흑!

여우 주둥이에서 동그란 물체가 빠져나왔다. 부리부리하고 건방진 직원의 도움 덕분에 환약을 토해낸 것이다.

검붉었던 환약은 은색 빛으로 요사스럽게 빛이 났다. 도진이 은색 환약을 주워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됐네. 스승님이 말씀하신 대로야. 야, 괜찮냐?”

“씨발, 괜찮아 보이냐?”

“말하는 거 보니까 괜찮네. 이제 가라. 난 스승님의 빈 몸을 만지작… 지켜야 해서.”

“네가 말 안 해도 갈 거거든?”

요하는 아직도 속이 안 좋고 목구멍도 까슬했으나 약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벌떡 일어났다. 욕실과 이어진 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문으로 뛰어드는 요하에게 도진이 말했다.

“내일도 이 시간에 늦지 않게 와. 매일매일 와야 돼.”

“나도 알아!”

요하가 욕실로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문이 닫혔다.

여우는 다시 인간으로 둔갑한 후 비틀거렸다. 환약 하나 삼켰다가 뱉었다고 몸이 너무 고단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그 안에 몸을 눕혔다. 그래도 잔뜩 찌푸린 미간은 펴질 생각을 안 했다.

‘여우 구슬을 잃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구나.’

이리가 아플 거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여우 요괴는 누구나 몸속에 여우 구슬을 지니고 있다. 이 여우 구슬은 한마디로 여우 요괴의 모든 힘을 담은 구슬이다. 위아 중에서도 여러모로 특이한 존재인 여우 요괴는 덕 말고도 ‘요력’이란 힘 또한 지니고 있는데, 이 여우 구슬이 바로 요력의 근원이다.

퇴마사란 것들은 요력에 담긴 요사스러운 기운을 예민하게 감지한다. 그렇기에 신령조차도 파악하지 못하는 여우 요괴의 인간 둔갑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것이다.

이번 방송에 얼마나 유능한 무당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여우 요괴의 뼛속까지, 혼백 깊은 곳까지 박힌 퇴마사 부류에 대한 공포증을 극복하고 아이돌 요하로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알아챌 만한 근거를 아예 없애야 했다.

그래서 요하는 여우 구슬의 파괴를 선택했다. 어차피 여우 구슬은 파괴되더라도 매일 재생성되고, 겨우 20년밖에 묵지 않은 파릇파릇한 여우 구슬이라 앞으로 천년을 넘게 살 걸 생각하면 아깝지도 않았다.

6일간 매일 재생성되는 여우 구슬을 파괴하고,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력만 남겨서 촬영날에는 무당이 전혀 요사스러운 기운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이 정도 고통은 견뎌야 해!’

요하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 많은 인간 직업 중에서 아이돌을 선택했을 때부터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했다. 어려울수록 더 재미있는 법이다. 요하는 자신만만했다. 아직까지는.

* * *

16일.

“애들아, 나 화장실 간다. 큰 거니까 말 걸지 말고 근처에 오지 마.”

“아, 그걸 왜 말해. 우리 지금 짜파게티 끓이는데!”

“저 새끼 일부러 얘기했어. 나중에 너 짜파게티 먹을 때 보자. 씨발.”

케엑, 켁켁.

“야. 얼른 토해. 그러다 배에서 녹는다.”

켁켁.

“토하라고. 빨리. 등 더 때려줘?”

17일.

“애들아, 다들 주목.”

“왜?”

“나 지금 큰 거 싸러 안방 화장실 들어간다.”

“형, 미친 거 아니죠? 화장실 가는 걸 왜 얘기하냐고요, 대체.”

케엑, 켁!

“세 번째쯤 되면 익숙해지지 않냐. 왜 이렇게 못 토하는 거야.”

18일.

“애들아. 나-”

“잠깐. 내가 맞혀 볼게.”

“뭐?”

“화장실 갈 거지?”

“어.”

“새끼 존나 주기적으로 싸네. 근데 제발 말 좀 안 하고 들어가면 안 되냐? 왜 그걸 광고를 때려? 우리 역겨우라고? 어? 토하라고?”

켁켁!

“야, 얼른 뱉어내. 내가 끄집어내 줘?”

19일.

“애들아.”

“화장실 가! 가라고! 제발 말하지 말고 그냥 좀 가!”

케엑. 켁!

“더 힘을 주고, 그래 그렇지!”

20일….

며칠 사이에 해쓱해진 요하가 거실 화장실로 쏙 들어갔다. 오늘은 불행 중 다행으로 저녁 스케줄 때문에 녹초가 된 상태라 다들 씻자마자 바로 뻗었다. 그래도 누군가 깰지도 모르니 화장실 문을 잠그고 은색 연필을 꺼내 들었다.

문을 그린 후 무작정 통과하려다가 아직 인간 둔갑 상태임을 깨달았다. 공중제비를 도는 것도 힘들었지만, 간신히 힘을 쥐어짜서 여우로 변하고 대여점으로 이동했다.

“왔냐?”

캬웅.

요하는 이제 여우 몸으로 인간 말을 내뱉지 못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요력보다는 체력 문제였다. 매일 커다란 환약을 삼키고 그걸 다시 토해내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도진은 뚱하니 보다가 환약을 내밀었다. 여우가 한숨을 내쉬고 독약을 들이켜는 것처럼 환약을 삼켰다.

케엑, 켁. 켁!

힘들어하는 여우의 등을 도진이 적당한 힘으로 두들겼다. 짧은 사투 끝에 여우가 은빛 구슬을 토해냈다.

바로 숙소로 돌아갔던 첫날과는 달리 요하는 벌러덩 누워서 체력을 회복했다.

끼웅….

끼웅이가 다가와 간병하듯이 요하의 털을 쓰다듬었다.

“야.”

여우 구슬을 잘 수거한 도진이 요하의 곁에 쭈그려 앉았다.

“너는 왜 이렇게 힘들어하면서까지 아이돌 행세를 하냐?”

캬웅. 컁.

“사람이면 사람 말을 해.”

여우가 눈을 뾰족하게 떴다.

“피곤해서 뻗은 사람 괴롭히지 말고 좀 꺼져 줄래?”

“네가 꺼져야 나도 꺼지지.”

“그냥 좀 쉬다가 돌아갈 테니까 꺼지라고.”

“너 지금 죽기 직전인데. 스승님이 고객이 이 꼬라지인데 방치했다는 사실을 알면 혼내실 거라서 안 돼.”

이리 선인은 처음 상담한 날과 처음 구슬을 파괴한 날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늘 도진만 나와 있어서 스트레스를 두 배로 받고 있는 요하였다.

“왜 그렇게까지 아이돌을 하고 싶어 하냐? 양기 흡수하기 좋은 직업들은 많잖아.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아이돌보단 안전한 직업이 있을 텐데.”

“양기 흡수랑은 상관없어. 나는 양기 안 먹어!”

“그럼 뭘 먹고 살아?”

“당연히 인간이 먹는 음식을 먹지. 오늘도 점심에 돈가스 먹고 저녁에는 국밥 먹었거든?”

“하긴 여우 요괴는 잡식이긴 하지. 우리 끼웅이도 잡식인데 요즘엔 그림자보다 실제 음식을 더 많이 먹더라고. 사람이 하는 건 다 따라 하고 싶은가 봐.”

끼웅.

자기 이름이 불리자 끼웅이가 고개를 들었다. 자그마한 그림자 잡귀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다가 다시 요하의 털에 몸을 묻었다. 자기 딴에는 쓰다듬는 것이었다.

요하는 새카만 밤하늘에 고요하게 떠 있는 달을 올려다봤다. 내일 날이 맑으려는지 달무리 없이 밝고 선명한 하늘이었다.

“나는 사람을 따라 하고 싶어서 아이돌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럼 대체 아이돌을 시작한 이유가 뭔데?”

“시작한 이유는… 인간이긴 해.”

“…….”

요하의 축 처졌던 퐁실한 꼬리 끝이 살랑거렸다. 달을 올려다보는 노란 눈에는 반짝임이 담겼다.

“나는 대부분의 여우 요괴들과 다르게 부모님이 없어. 어느 시골 마을의 산속 깊은 바위틈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나를 허리가 꼬부장한 인간 노부부가 발견하고 손을 내민 게 내 첫 기억이야.”

노부부는 아름다운 은색 빛깔의 새끼 여우가 버려졌다고 생각했는지 집으로 데려갔다. 갓 태어났어도 영물은 영물이기에 요하는 이 인간들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덕이나 쌓자는 생각에서 그들이 말년을 즐거이 보낼 수 있도록 새끼 여우 흉내를 냈다.

그들은 요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자기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새끼 여우에게 줄 밥은 꼬박꼬박 차렸다. 요하는 배를 주무르고 털을 쓰다듬고 꼬리를 빗질해 주는 손길이 너무 좋았다. 할머니가 저를 부를 때 “여우야”하는 목소리가 좋았고, 할아버지가 저를 만져줄 때 꼭 털을 거꾸로 눕히는 손길이 좋았다.

요하는 아침마다 할머니의 신발에 들어가 따뜻하게 데우고, 저녁에는 할아버지의 베개에 몸을 말고 앉아 얼마나 푹신한지 확인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요 새끼 여우가 사람맹키로 신발을 신을랑가, 베개에 누을랑가’ 하며 정답게 웃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 자고 있던 여우가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떴다.

이 조용한 시골집에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강도라도 들었어?”

이야기를 듣던 도진이 물었다. 요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승사자들이었어. 어떤 의미로는 강도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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