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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그 일 이후로 만인사가 나에 대해 얘기해 줬어?”
저번 그 일은 당연히 이리가 이석진의 팔을 뜯어내고 경고를 준 걸 말하는 것이었다.
“마, 만인사는… 두, 두려움에 떨면서 당신에 대해 얘기를 해, 했어요. 하, 하지만 저는 미, 믿지 않았….”
“만인사와는 아직도 함께 다녀?”
“그, 그 뱀은 그, 그날 이후로 도, 도망쳐서….”
“그럼 현재 네 곁에 있는 악신은 배리모스밖에 없는 거야?”
“…….”
잘만 대답하던 퇴마사가 입을 다물었다. 금제 때문이었다.
“가족관계는? 이석진 말고. 부모님도 퇴마사니?”
스물여덟이 아니라 열여덟. 아니, 여덟 살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였다. 그리고 스물여덟 남자도 여덟 살 아이처럼 입술을 모으고 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 저는… 서, 석진이, 아진이랑 같은, 보,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부, 부모님에 대해서는 아, 아무것도 몰라요…….”
이석진, 이아진과 피가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퇴마사의 자질을 타고난 이는 바로 이 자, 한수 한 명뿐이라는 뜻이니까.
“서, 서, 석진이는 하, 항상 저를 잘 챙겨주고… 빠, 빵도 양보하고, 조, 좋은 애예요. 아, 아진이도 어린데도 또,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그, 그리고 착하고….”
“이아진이 받은 악신이 도망쳤잖아. 이제 더는 무당 노릇을 못 하겠네.”
“아, 아진이는 오히려 조, 좋아해요…. 마, 만인사는 저, 정말 나쁜 뱀이어서…… 저, 저희는 오히려… 다, 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구나. 그래도 큰 신이 나갔으니 빈 몸체를 다른 원혼과 악신들이 노릴 수도 있어. 잘 방비하렴.”
“아, 아, 아진이가 위험한가요?”
“네가 부적 한 장만 붙여주면 위험할 일이 없겠지. 퇴마사란 아주 강한 존재니까.”
“어, 어, 어떻게. 바, 방법을 아, 알려주면. 제, 제가….”
퇴마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리는 앞머리에 반쯤 가려진 눈을 직시했다.
“왜 방법을 모를까. 너는 지금까지 그보다 더 수준 높은 주술을 몇 번이나 사용했는데. 저주도 뿌리고 사역마까지 만들어냈었잖아.”
“…….”
“악신이 자기 필요한 것만 네게 알려 줬구나.”
퇴마사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아. 부적 그려서 줘.”
“아, 네.”
도진이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 빠르게 휘갈기고는 종이를 찢어서 퇴마사 쪽으로 밀었다.
“흥, 쓰든가.”
“가, 가, 감사합니다….”
퇴마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가져갔다.
부적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그림과 문자가 빼곡하게 들어찬 둥근 원 모양이었다. 아래 여백에는 몇 줄이 덧붙여 있었다.
*그림 밑에 꼬리가 뾰족해야 함. 신경 써서 그릴 것.
*누운 8 (oo)처럼 보이는 부분에는 이아진 이름 적으면 됨.
*중요! 원 테두리에 빈틈 절대x 두께 최소 5cm! 안 지키면 빈틈으로 원혼 들어갈 수 있음 난 충분히 경고했다.
까칠한 태도와는 다르게 섬세한 설명이었다.
퇴마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부적의 그림과 글자를 망막에 새기려는 것처럼 집중했다.
이리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고작 28살의 나이에 퇴마사 가문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사역마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사역마를 잃고 힘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겠지만, 이 정도 자질을 지닌 퇴마사는 그 옛날에도 드물었다.
이 어린 퇴마사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리는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말했다.
“참고로 그 부적은 이미 있는 악신은 못 쫓아내니까 이석진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악신을 분노하게 만들 수 있거든.”
“허읍…!”
이리가 너무 간단히 정곡을 찔러오자 퇴마사가 날카로운 창에 몸이 꿰뚫린 생선처럼 펄쩍 뛰었다.
“이석진이 네 팔을 달라고 했어?”
“서, 석진이는…!”
반응이 격정적이었다. 퇴마사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서는 이리 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소리쳤다.
“서, 서, 석진이는 죄, 죄가 없어요…! 다, 다 제 시, 시 실수 때문에…! 제, 제가 잘못해서. 제 잘못이에요…! 서, 석진이는 저 때문에 고, 고통받고 있…!”
아까부터 맺혀 있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꽁꽁 싸맨 목 부분이 마치 종기가 난 것처럼 빠르게 부풀더니, 이윽고 터져 버렸다. 핏방울이 사방에 튀었다.
끼우웅!
끼웅이가 소스라치며 도진의 품에 뛰어들었다. 도진은 끼웅이를 소매에 숨겼다.
“미, 미안. 죄, 죄, 죄송합니다….”
퇴마사는 제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목의 핏자국을 닦았다. 이제 보니 목과 턱, 얼굴 하관 부분에 흉터가 가득했다. 이렇게 종기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금제의 반작용이네요. 이자가 저질렀다는 ‘실수’가 배리모스와 연관이 되어 있나 봐요.”
도진의 정확한 설명에 퇴마사는 거북이처럼 목을 쏙 집어넣었다.
울음을 참느라 히끅거리는 남자는 소심하고 유약하나,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도진이 이리를 보니 이리는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왜 금제를 풀어 주지 않으시는 걸까?
도진은 악신이 건 금제를 푸는 방법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이물을 사용해도 되고, 도술을 이용해도 된다. 저야 힘들지만, 이리에게는 까다롭지도 않다. 그런데 왜 풀어주지는 않는 걸까?
도진은 늘 그렇듯 질문을 참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배리모스와 관련된 주제는 몽땅 금제에 걸렸나 본데, 스승님이 풀어 줄 수 있잖아요. 왜 안 풀어 주세요?”
“내가 마음대로 개입할 수가 없어.”
“아, 이것도 규율이에요?”
이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가 금제를 풀 경우 선인이 악신의 행사에 멋대로 개입하는 모양새가 되는데, 임금님의 규율에 따라 개입을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첫째, 악신이 인간을 해하거나 홀리려는 명백한 의도를 보일 경우. 그런데 상대가 약한 인간이 아니라 퇴마사이므로 이 경우는 맞지 않는다.
둘째, 만약 배리모스가 이리가 경고한 이후에도 죄 없는 위아들을 죽이거나 괴롭혔다면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배리모스는 경고 이후에는 죽은 듯이 지내고 있다. 악신이 조용하기 때문에 퇴마사가 악신의 뒷수습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리라. 추가로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개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방법….
이리가 퇴마사를 바라봤다. 퇴마사는 이리가 금제를 풀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무척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전부 믿지는 않는지 불안과 초조, 의심이 가득했다.
“금제를 풀어 주길 원해?”
마지막 방법, 이 자가 스스로 원하는 경우.
금제에 걸린 이가 이리에게 금제를 풀어 달라는 의뢰를 하는 경우. 이리는 이유를 들어보고 합당하다 판단되면 금제를 풀어 줄 수 있다.
“풀어 줄게. 네가 원한다면.”
“어, 어, 어떻게…….”
“풀 수 있어.”
“…….”
“풀어 줄까?”
퇴마사의 눈동자가 태풍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맹렬한 고민이 느껴졌다. 불안, 의심, 초조, 두려움….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리는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줬다.
한참 후 겁 많은 끼웅이조차 소매로 고개를 슬그머니 내밀 무렵, 퇴마사가 입을 열었다.
“아, 아, 아니에요. 저는… 저는. 이, 이대로… 가 좋아요….”
“뭐? 미친 거야, 뭐야?”
“도진아.”
“아니, 웃기잖아요. 풀어주겠다는데 대체 왜-.”
발끈하던 도진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입을 닫았다. 이리가 이번엔 허벅지를 짚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함구령보다도 가혹한 방식으로 제자를 얼어붙게 만든 이리가 퇴마사를 향해 상냥하게 물었다.
“너희,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
퇴마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명 이리의 질문에 대한 강한 긍정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과 흔들리는 눈, 피까지 맺힌 입술은 제발 나를 좀 도와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저, 저, 저희는… 저희가…. 다, 다 제 잘못이라서…. 다, 다, 저, 전부, 제, 제 잘못으로 일어난 일, 이라서…….”
퇴마사는 끝내 이리의 도움을 거부했다.
만약 퇴마사와 인간이 얽힌 일이 아니라 위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면 이런 거부 따위는 무시하고 개입했을 테지만….
현재로선 이리가 끼어들 수 있는 선은 딱 여기까지였다.
“알았어. 혹시 생각이 바뀌면 연락해. 도진아, 우리 명함 줘.”
“네.”
도진이 삐걱삐걱 팔을 움직여 명함을 꺼냈다.
대여점의 명함은 아주 간단했다.
이리 만물 대여점
000-0000-0000
“이리 만물 대여점….”
퇴마사는 이런 상호는 처음 보는 듯이 중얼거렸다.
“번호 보이지?”
“네, 네…. 잘 보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가, 감사해… 요.”
그는 명함과 부적을 가방에 넣지 않고 손에 꼭 쥐고는 꾸벅, 감사 인사를 했다.
이리는 퇴마사에게 이제 가 봐도 좋다는 듯 문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퇴마사는 이리와 도진, 끼웅이에게마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식당을 나갔다.
끼웅.
끼웅이가 철푸덕 앉아 전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끼웅이가 겁이 많은 이유는 자기를 만든 사람을 닮아서일까요?”
“그냥 자기 성격이야.”
“그런가. 뭔가 답답하네요. 분명 많은 정보를 얻었는데 그래서 더 미궁에 빠진 느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