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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말 미안……. 채, 책에서는 분명, 태, 태종우가 묘, 묘약이라고….”
뀨웅!
“미, 미, 미안해…….”
눈을 뾰족하게 뜨고 화내는 새앙토끼와 연신 사과하는 퇴마사를 보다가 이리가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잘못 알고 있어.”
히익, 새가 말을 걸자 퇴마사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참으로 어리숙한 남자였다.
“첫째, 태종우는 죽엽화인에게 1년간 정화되어야 묘약이 돼. 너는 새 빗물이 아니라 헌 빗물을 훔쳤어야 했어.”
“아, 아…….”
“둘째, 묘약 태종우는 초목에게만 통하고 짐승과 짐승 기반 요물에게는 통하지 않아.”
“아아…….”
퇴마사는 좀처럼 문장을 내뱉지 못했다. 긴 앞머리에 가려진 눈동자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이리는 퇴마사의 행색을 살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빼빼 마른 몸. 운동화도 낡은 데다가 밑창도 일부 떨어져 나갔다.
꼬르륵.
퇴마사의 배에서 연신 굶주림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그, 그럼….”
퇴마사가 자그마한 쇠박새를 보며 물었다.
“어, 어떻게 해야 이, 이 아이를 고, 고칠 수 있어?”
“…그냥 연고를 발라 주면 된단다.”
“여, 연고? 사, 사람이 쓰는?”
“그래.”
퇴마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는 메고 있던 배낭에서 허겁지겁 파우치를 꺼냈다. 낡은 파우치 안에는 비상 의약품이 한가득 있었다. 퇴마사가 연고를 필요 이상으로 주욱 짜서 새앙토끼의 화상에 처발랐다.
뀽, 뀨웅. 뀽!
새앙토끼는 퇴마사의 행동에는 관심 없다는 듯 쇠박새에게 폴짝폴짝 뛰어와 코를 벌름거렸다. 이 새가 이리 선인인가, 아닌가 싶어 그러는 것이었다.
이리는 둔갑술이 아주 뛰어났으나 어떤 의미로는 형편없었다. 모든 위아가 이리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둔갑하고도 이런 잔챙이조차 속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쇠, 쇠박새야. 아, 아, 알려 줘서 고마워.”
퇴마사가 이리에게 인사했다. 이리는 퇴마사와 시선을 마주쳤다. 퇴마사는 맑고 까만 눈에 사로잡혔다.
“네가 이 요물을 다치게 했어?”
“…나, 내가 아니라, 아, 아는 사람이.”
퇴마사는 자기가 대답해 놓고 놀라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면 이석진?”
“서, 석진이의 모, 몸 안에 있는 것…….”
“배리모스?”
“마, 마, 말할 수 없…….”
“배리모스가 벌인 일들을 수습하고 다니는 건가?”
“그, 그 그 이름은 언급해서는 안 돼…!”
으, 으아악! 퇴마사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금제의 일종에 걸린 탓이다. 퇴마사는 은신 중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어이, 이봐, 무슨 일이야, 하고 몰려들었다. 이리가 도술을 펼치려는 그때였다.
“스승님? 스승님!”
제자가 애타게 이리를 부르짖었다.
“스승님!”
스승을 찾는 목소리가 테마파크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스승님이라니?”
“와, 스피커에서 나오는 줄 알았네. 이게 사람 목소리야?”
도진 또한 은신술을 사용하지 않았으니…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스승님? 어디 계세요. 잠깐,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몰려 있어?”
도진의 음성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커다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진은 머리를 감싼 채 괴로워하는 퇴마사를 발견하고 눈에 불을 켰다.
“야, 내 스승님 봤지? 어떻게 했어?”
“나, 나, 나는 모, 모르는…!”
“씨발 새끼야. 당장 내 스승님 내놔!”
도진이 퇴마사의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었다. 퇴마사는 저항도 못 하고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거, 그, 그러다 사람 죽겠는데.”
“경찰 불러, 경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요?”
“크흠, 얼른 좀 말려 봐요들!”
도진이 하도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고 덩치도 큰데다가 기세도 흉흉해서 누구 하나 섣불리 말리지 못했다.
피유….
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의 귀가 쫑긋했다. 도진이 퇴마사의 멱살을 쥔 채 쇠박새를 쳐다봤다. 도진은 아까 전 새앙토끼처럼 긴가민가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이리가 떠먹여 주는 심정으로 포르르 날아가 도진의 주먹 위에 앉고 나서야 소란은 일단락되었다.
셋은 테마파크 내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도진은 팔짱 낀 채 흉흉한 얼굴로 맞은편의 퇴마사를 노려봤다. 퇴마사는 죄라도 지은 듯 움츠러든 상태였다. 다만 그들 앞에 라면과 뚝배기불고기, 돈가스가 놓여 있었기에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야, 퇴마사. 너 이름이 뭐냐.”
“하, 한수라고 하, 합니다.”
“나이는?”
“스, 스물여덟…. 그, 그쪽은 이, 이름이.”
“네가 알아서 뭐하게. 씁.”
“죄, 죄송합… 히끅.”
주위에서 이 수상한 테이블을 흘깃거렸다. 도진이 은신술을 펼치려 했으나 이리가 가로막고 한수에게 지시했다.
“은신술을 해 봐.”
“으, 으, 은신술…?”
“몰라?”
“네, 저, 저는… 그, 그런 건 모르… 죄, 죄송합니다…….”
“도진아.”
“네.”
이리의 허락을 받은 도진이 깔끔한 은신술을 펼쳤다. 사람들은 수상한 이들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이어 나갔다.
꼬르륵.
퇴마사의 배가 다시 굶주림을 호소해왔다.
“먹어.”
퇴마사가 눈동자를 굴렀다.
“저, 저, 저한테 왜…….”
“그러니까요. 이딴 놈한테 왜요?”
자기만 놓고 왔다고 삐진 도진이 한 층 더 삐진 말투로 물었다.
“내 눈앞의 굶주린 사람을 못 본 척하면 덕이 크게 날아가거든. 그리고 도진이, 너도 배고플 텐데 좀 먹어.”
“저는 됐어요. 대여점에 돌아가면 그때 먹을래요.”
끼웅….
끼웅이는 배가 고픈지 어기적 기어 나왔다. 퇴마사가 조그마한 암인을 신기한 눈으로 보았다. 본래 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고, 암인 또한 본래 제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
끼웅이는 낯선 사람 때문에 주저하며 이리와 도진을 쳐다봤다가 든든한 두 사람을 믿는지 돈가스 조각에 달라붙었다.
찹찹찹.
그림자만 먹어도 되는데 돈가스를 물리적으로 해치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끼웅이가 다 먹는다. 얼른 먹어.”
“…왜, 왜… 저한테….”
“말했잖아. 굶주린 이를 모른 척하면 안 된다고.”
“…….”
“너 배 차고 나면 그때 얘기하자.”
“…….”
퇴마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는 돈가스부터 한 입 먹었다. 바삭, 바삭, 바삭. 딱 세 번 씹고 삼킨 퇴마사는 잠시 몸의 이상을 확인하다가 아무 독도 안 들어있는 것을 알고 곧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도진이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혹시라도 저 포크를 이리에게 던지지는 않을까 하는 경계의 의미였다.
이리가 도진의 팔을 툭 쳤다. 도진이 험악한 표정을 단번에 풀고 귀여운 표정으로 이리를 바라봤다. 이리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의수.’
도진이 다시 퇴마사를 쳐다봤다.
그제야 그는 퇴마사의 왼팔이 의수라는 걸 알았다. 이리가 뽑은 팔은 분명 이석진의 왼팔인데, 지금 이 퇴마사의 왼팔이 의수라는 건….
이석진에게 팔을 준 것이다.
충성심이라고 해야 할지 우정이라고 해야 할지… 징그러울 정도였다.
퇴마사는 3인분을 혼자 다 먹어 치웠다. 주술 사용에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넉넉하게 3인분을 주문했는데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이건 퇴마사가 상당히 혹사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진아, 가서 음식 더 가지고 와.”
“네.”
“아, 아, 아니에요. 괘, 괜찮…! 괜찮스, 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는 다시 어리바리하고 어리숙한 더벅머리 남자가 되었다. 음식을 더 가지고 오면 숨이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사양하기에 추가 주문은 취소하기로 했다.
끼우웅….
끼웅이가 통통하게 부른 배를 내밀고 자박자박 걸어서 퇴마사의 주먹 쥔 손가락을 건드렸다. 퇴마사는 움찔, 놀라면서도 검지 하나를 쏙 내밀었다. 도진의 튼튼한 손가락에 익숙한 끼웅이는 빼빼 마른 손가락이 탐탁지 않은 듯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데리고 놀아줬다.
“낯가리는 녀석이 웬일이래.”
제 전주인이라는 사실이 본능에 새겨진 건지. 먼저 다가가는 끼웅이를 보고 도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퇴마사도 어설프게 따라 웃었는데 꼭 웃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이리는 테이블을 조용히 톡톡 두드렸다.
자리에 앉혀 놓긴 했으나 막상 할 말이 없었다. 배리모스와 관련된 건 전부 금제에 걸린 듯하니… 주제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나와 대화했던 거 너 맞지?”
퇴마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피하고 싶은 듯했다.
“마, 맞는… 맞아요….”
“이석진과는 무슨 관계야? 주종 관계?”
“아.”
퇴마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우, 우린… 치, 친구, 가족… 입니다.”
“친구라는 거야, 가족이라는 거야? 제대로 말 안 해? 또 멱살 잡아 버린다?”
“하지 마, 도진아.”
이리가 도진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침착하라는 뜻이었다.
“가족인 동시에 친구 사이라는 거겠지. 알아들었어.”
“…마, 마, 맞아요…. 저, 저기…!”
“말해.”
“그, 그, 그쪽은 사제지간…?”
“맞아.”
“다, 당신이… 이리 선인.”
“그래.”
“이리 선인…….”
퇴마사는 앞머리를 길게 길렀지만 그렇다고 눈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었다. 음울한 눈에 이리 선인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담겼다. 또한 어떤 열망과 비슷한 감정도 엿보였다.
도진이 미간을 구겼지만, 이리의 손이 제 손등에 머물러 있으므로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