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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77화 (7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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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야. 내일 가봐야겠어.”

“아주 좋습니다!”

“뭐?”

도진이 횡재라도 한 듯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자 이리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내일도 야외 데이트, 주말도 야외 데이트잖아요. 맛집이랑 명소는 제가 찾아 놓을게요. 맡겨 두세요. 후후!”

“…….”

대체 도진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어느 정도 사건은 되어야 할까?

이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튿날 오전, 바리공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죄송해요. 꽃이 폈더라고요. 하루만 더 기다릴 걸 그랬어요.

“…꽃이 피었다고?”

-네. 오늘 일어나자마자 확인하니까 예쁘게 피어 있네요. 이상기후 때문에 늦게 핀 건지 요즘 중간계의 혼꽃들 개회 시기가 천차만별이긴 하거든요. 괜히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음…. 아니야. 앞으로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말해.”

-네, 선인님. 기도식 선물은 우편으로 보내 드릴게요.

“안 줘도 된다니까.”

-꼭 드리고 싶은걸요.

이리가 사양해도 바리공주가 극구 주고 싶어 해서 결국 우편으로 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동 화로에 불을 붙이고 돌아온 도진이 생각에 잠긴 이리를 발견했다.

“왜요? 꽃이 폈다면 다행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뭔가 미심쩍으면 가서 확인해요, 스승님. 겸사겸사 맛집도 가고…. 근처에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한 테마파크가 하나 있던데 아주 유익해 보이더라고요. 역사에 대해 잘 알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찾아 놓은 데이트 코스를 날리기 싫었던 도진이 수작질을 걸어왔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이리는 태고화의 개화가 정말 미심쩍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부산 들렀다가 올라오면서 한번 가보자. 어차피 위치도 가까우니까.”

“네!”

도진이 신나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는 이리가 손질한 약재를 한 아름 들고 나가 오동 화로 안에 넣었다. 한 시간 내리 쉬지 않고 저어 줘야 하는데도 신이 난 얼굴이었다.

반면 이리는 작업도 잊고 고민에 잠겼다.

새로 받은 태종우의 분실.

유달리 늦게 핀 태고화.

두 사건이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 * *

토요일 오후, 이리와 도진은 우선 죽통화인이 무리를 지어 사는 부산 기장군의 아홉산숲으로 향했다. 워낙 유명한 관광명소인 데다가 날 좋은 주말이라 관광객이 많았다. 주차장에 용마를 세워 놓고 내리자마자 은신술을 펼쳐야 했다.

“이리 선인!”

“이리 선인이다!”

“부리부리 김도진이다!”

인간 아이가 흘리는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고 있던 잔챙이들이 이리와 도진을 발견하고 우다다다 달려왔다.

“이 녀석들 제 이름도 아네요?”

“너는 이제 유명인이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리부리한 신입 직원이다!’였는데, 이제는 잔챙이들마저 이름 석 자를 외우고 있었다. 평소에는 위협해서 내쫓는 도진이지만 오늘은 코를 치켜들고 “그래, 내가 김도진이다.” 했다.

잔챙이들을 실컷 귀여워해 주고 나서 구갑죽 군락으로 향했다. 일반 대나무보다 크기도 작고, 모양도 특이한 구갑죽 밭은 약 2평 정도로 넓지 않게 형성되어 있었다.

“도진아.”

“네.”

도진은 ‘입의 문’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병에는 흰 쌀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개를 꺼내 한 개를 이리에게 주고 한 개는 자신이 삼켰다. 그러자 몸이 쑥쑥 줄어들어서 손 한 뼘만한 크기가 되었다.

낑! …끼웅?

도진의 주머니 속에 숨어 있던 끼웅이가 나폴나폴 땅에 떨어졌다가, 제 키와 비슷해진 도진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끼웅이가 나보다 키가 크네.”

끼웅!

이리 또한 비슷한 크기로 줄어들자 끼웅이는 기뻐하면서 이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네가 뭔데 스승님 안아. 꺼져, 씨발.”

작아져도 힘은 장사인 도진이 끼웅이의 뒷덜미를 붙잡아 내팽개쳤다. 끼웅이는 엎어졌다가 바로 벌떡 일어나더니 깡총깡총 뛰었다. 두 사람이 자기처럼 작아진 게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야, 뛰지 마. 땅 울려.”

끼우웅.

“스승님, 제가 안아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둘은 구갑죽 군락 안으로 들어갔다. 근처의 산신령이 걸어놓은 결계를 통과하자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죽통화인 셋이 포르르 날아왔다.

인간의 모습을 한 죽통화인은 분홍 꽃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었다. 등에 달린 각양각색의 날개는 마치 나비 날개 같았다.

세 마리, 아니, 세 명 모두 모두 여성형이었는데, 누군가 우연히 본다면 요정이라고 말할법한 어여쁜 모습이었다.

“선인님, 오셨사와요?”

“응. 안녕. 너희 셋이 한 죽통에서 살고 있는 거지?”

“그렇사와요. 얼른 이쪽으로 오시와요!”

죽통화인들이 둘, 아니, 끼웅이까지 셋을 분실 장소로 안내했다.

원래 크기로 보면 돌멩이에 불과할 평탄한 바위 위에 텅 빈 대나무 통 하나가 있었다.

“저기 돌 위에 태종우를 받은 죽통을 뒀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빗물이 없어졌사와요!”

“산신령의 결계를 뚫었으니 위아인 게 분명한데, 근처에 사는 애들은 다 모르는 일이라고 했사와요.”

“누군가 빗물을 훔쳐 가 놓고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하와요.”

설명을 마친 죽통화인 셋은 바위 아래에 있는 죽통에 포르르 날아가 몸을 담갔다. 몸이 마르면 안 되기에 늘 빗물로 반신욕 중인 이들이었다. 도진이 이리에게 속삭였다.

“지금 몸을 담근 저 죽통이 기존 죽통이겠죠? 작년 음력 5월 10일의 빗물일 텐데 왜 이렇게 투명하지. 혹시 빗물 욕심이 나서 분실했다고 뻥 치고 새로 받으려는 거 아니에요?”

“죽통화인은 수질 오염을 정화해 주는 능력을 가진 요괴야. 이들이 들어가면 하수도도 며칠 만에 깨끗해지지.”

이리 또한 속삭이며 대답했다. 죽통화인은 다행히 둘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앞으로 1년을 또 이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니 너무 고달픈 일이와요.”

“보시면 알겠지만 새로 만든 죽통은 지금 이 죽통보다 더 크고 안락하단 말이와요.”

“만약 누가 태종우가 필요하다고 얘기했으면 조금은 나눠 줬을 텐데 훔쳐 가다니 정말 고약하와요.”

슬프고, 서운하고, 화도 나고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범인은 당장 찾을 수는 없지만, 이사는 바로 가게 해 줄 테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리는 셋을 위로하고 서류 가방에서 이물을 꺼냈다. 황금색 호롱박처럼 생긴 이것은 ‘금박’이라는 이물이었다.

이리가 호롱박의 뚜껑을 열자 도진은 바위 위의 빈 대나무 통에 들어갔다. 그리고 손가락에 기운을 집중한 뒤 대나무 통의 바닥과 벽에 흡수되어 있던 수분을 끌어모았다. 간신히 물방울 하나가 생겼다.

도진이 공중에서 그 물방울을 이동시켰다. 이슬보다 자그마한 물방울이 허공에서 아슬아슬 흔들렸다.

“…….”

얼마나 긴장했는지 어지간해서는 땀 흘리지 않는 도진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혔다. 물방울은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며 공중을 날아 이리가 들고 있는 호롱박의 좁은 주둥이 안으로 쏙 들어갔다.

죽통화인들이 와아, 감탄했다. 끼웅이도 폴짝폴짝 뛰어서 땅이 조금 흔들렸다. 도진이 죽통에서 훌쩍 뛰어나왔다.

“와, 씨. 보셨어요? 저 성공했어요! 이제 저는 뭐 장사로서도 도사로서도 그냥 완성됐다고 봐야겠네요. 하, 고작 스무 살에. 미쳤다, 진짜. 이게 다 뛰어난 스승님을 둔 덕분이겠죠?”

식은땀을 흘릴 때는 언제고 기세등등해진 도진이 이리에게 몸을 치댔다.

“그래…. 잘했어.”

이리는 성의 없게 칭찬한 후 호롱박 뚜껑을 닫고 시계방향으로 한 번, 반시계 방향으로 한 번 돌렸다. 뚜껑을 열고 빈 죽통에 호롱박을 따르자, 맑고 투명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음력 5월 10일의 태종우였다.

“우와아아. 역시 도술이란 건 신기하와요.”

“어때? 이 정도면 적당할까?”

“네. 저희는 허리까지만 잠기면 되어요.”

죽통화인들은 신나서 당장 포르르 날아와 새 죽통으로 옮겨 갔다. 새 빗물에 몸을 담근 죽통화인들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마치 고된 노동을 끝내고 사우나에 온 사람 같았다.

“범인을 못 찾을 수도 있어. 찾으면 연락 줄게.”

“알겠사와요. 포도청을 믿어 보겠사와요. 아, 혹시 저희의 옛 죽통이 필요하시면 가져가시와요.”

“그래도 돼? 이미 거래하는 곳이 있지 않아?”

“철마산 산신령에게 우리가 사는 구갑죽 군락을 지키는 대가로 매년 한 통씩 주는데, 올해에는 지키지 못했으니까 주지 않겠다고 했사와요.”

“그렇구나. 그럼 고맙게 받아 갈게.”

죽통화인이 1년이나 몸을 담가 정화한 태종우는 귀한 것이므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리의 눈짓에 도진이 서류 가방에서 ‘금유리병’을 꺼내 죽통의 물을 따랐다.

금유리병은 빛과 어둠을 보관하는 은유리병과 세트로, 눈과 비를 보관할 때 사용한다. 다른 보존처리를 하지 않고 가방 안에서 굴러다니게 둬도 내용물에 아무런 변질이 없는 신묘한 이물이었다.

죽통화인들과 인사하고 구갑죽 군락을 나온 둘은 다시 한번 알약을 삼키고 몸을 키웠다.

끼웅…….

끼웅이가 아쉬워하며 이리의 소매에 들어왔다.

“이제 물부리산으로 가자.”

“바로요? 그러지 말고 우리 좀 걷다가 가요. 산책길이 기가 막힌대요. 300년 된 금강송도 있고 600년 된 한옥도 있대요. 구경해요. 네? 네?”

“……알았어.”

이리는 제자의 애교에 넘어가 인간들이 잘 꾸며놓은 아홉산숲 관광지를 구경했다. 얼마나 배가 부른지 모이를 줘도 오지 않는 토실토실한 닭들과 하늘 높이 곧게 뻗은 대나무들,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편백나무숲까지.

도진이 만족할 만큼 충분히 구경한 후에야 물부리산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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