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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에게 음기가 모여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도진이 이리에게 다가왔다.
“이러다 악신 되는 건 아니겠죠?”
“아직 제대로 된 원혼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서정원은 분노한 게 아니라 슬퍼하고 있는 거야. 아주 극명한 차이가 있지.”
분노와 원한이 악신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서정원은 그저 슬프고 억울할 뿐이었다.
-나는 억울하다……. 이리 선인. 나는 너무 슬퍼…. 너무 슬퍼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는데.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서정원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울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복배바리가 다가와서 어설프게 토닥토닥했다. 그러자 서정원은 더 크게 울었다.
“서정원. 원혼이 되면서 소진하긴 했지만 그래도 쌓인 덕이 꽤 많은 편이니 저승에서 수련할 기회를 줄 거야. 그러면 다음 생에서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하며 살 수 있단다.”
-다음 생은 원하지 않아요……. 제 부모님은 어떡하죠?
“원한다면 네가 부모님의 수호령이 되는 것도 좋겠지.”
-아…….
울기만 하던 서정원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 한 줄기 희망이 깃들었다.
-수호령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나요?
“우선 저승에 올라간 후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해야 해. 필기와 실기가 있는데, 너는 3년이나 고시 공부를 했고 12년이나 저승사자의 눈을 피했을 정도로 영특하니 분명 통과할 수 있을 거야.”
-아아…….
서정원이 탄식했다.
-나의 공부는 헛된 게 아니었어요…….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잠시 눈을 감은 채 몇 차례 심호흡하며 마음의 준비를 마친 서정원이 눈을 떴다.
앞에 도진이 서 있었다. 서정원의 혼의 회수는 이리가 아니라 도진이 맡기로 했다.
너희가 찾지 못한 원혼을 내 제자가 찾아내서 성불시켰다, 라는 작은 도발이었다.
“시작한다.”
-네…….
도진이 이물 ‘배꽃 은장도’를 칼집에서 꺼냈다. 손바닥 한 뼘 길이의 칼날에 배꽃이 그려진 은장도로, 이것에 찔리면 혼령과 잡귀는 성불하고, 원혼은 소멸한다.
도술로도 성불이 가능하나 도진은 아직 도술이 부족하므로 이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도진이 은장도를 공중에 던진 뒤 양손을 벌리자 은장도는 그 중간에 멈춰서 더 이상 낙하하지 않았다. 도진은 은장도를 서정원에게 날렸다.
은장도에 찔린 가슴을 중심으로 음과 양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서정원의 형체도 바람 줄기가 되어 회오리바람에 함께 휩싸이고, 고시원 건물을 모두 합칠 만큼 커졌다가 금세 줄어들어 이제는 주먹만 한 구슬 모양이 되었다.
도진은 도력으로 은장도를 제어해 구슬 표면에 글자를 새겼다.
‘김도진’
이 혼은 이승에서 교화를 마쳤고, 그 확인은 김도진이 했다는 표시였다.
그리고 은장도를 거두자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이, 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점점 위로 솟구쳐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미간을 좁히고 올려다보던 도진이 말했다.
“이래서 혼이 저승에 올라가는 것을 승천이라고 하는군요.”
“그렇지.”
“저 훌륭했어요?”
“응. 첫 회수였는데도 아주 잘 해냈어.”
지금까지 도진은 제령 말고는 경험이 없었지만 이제는 혼의 회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혼령을 향한 진심 어린 안타까운 마음이 없다면 혼에 무게가 담겨서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추락한다. 도진은 겉으로는 귀찮다고 제령하자고 툴툴거렸어도 진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수호령은 수호 대상자의 곁을 일정 거리 이상 떠날 수 없으므로 길 가다가 서정원의 부모님과 우연히 마주치지 않는 이상은 다시 만날 일 없다.
스승과 제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명복을 비는 그때였다.
“이럴 때가 아니다.”
복배바리가 스윽 앞으로 나섰다.
“이제는 내 집을 찾아 줄 시간이노라!”
* * *
복배바리의 집을 찾는 일은 다행히 간단했다. 그들에게는 이물이라는 치트키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해 목걸이’
불고양이가 반납한 이 이물이 다행히 ‘입의 문’ 안에 있다는 걸 도진이 상기해 냈다.
“우리의 눈앞에 당면한 문제는 바로 복배바리의 집을 찾는 일이야. 방향 잘 좀 알려 줘라. 알았지?”
도진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 대하듯 이물에게 말을 걸고는 목에 걸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거대한 화살표 하나가 나타났다.
“오오…….”
“뭐가 보여?”
“네, 스승님. 화살표가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요. 따라가면 되나 봐요.”
“가자.”
그 화살표는 목걸이를 착용한 도진에게만 보이므로 도진이 앞서 걸었다.
직진 화살표, 오른쪽 화살표, 왼쪽 화살표를 지나 세 블록쯤 더 걷자 아주 허름한 빌라 하나가 나왔다. 건물 앞에 가구들이 버려져 있었고, 현관 유리도 깨져 있었다. 딱 봐도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 같았다.
“아앗! 이 집이 맞다. 내가 사는 곳이다! 이리 선인과 그의 제자는 정말 용하구나. 내가 근처에 사는 복배바리들에게 좋은 소문을 퍼뜨려 주겠노라.”
복배바리 아등이 즐거워하며 팔짝팔짝 뛰었다.
건물 외벽에는 ‘재건축 공사 확정’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공사 시작 일자나 기간은 적혀 있지 않았다. 도진이 이마를 짚었다.
“야, 복배바리는 사람들 곁에서 살잖아.”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람이 안 살지 않냐?”
“어떻게 알았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 같이 이사 갔다. 하지만 이사를 간다는 건 누군가 이사를 온다는 뜻 아니겠느냐? 그래서 얼른 사람들이 이사 와서 북적북적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배는 뭐로 채우고?”
“배가 너무 고프거나 심심할 때는 오늘처럼 인간이 많은 곳을 떠돌다가 집에 돌아오곤 한다. 오늘은 너무 멀리 가는 바람에 길을 잃었는데 이리 선인과 김도진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도진은 자연히 가슴이 답답하고 착잡해졌다.
복배바리란 것들은 왜 이렇게 멍청하단 말인가? 노량이 생각났다. 인간의 수명을 늘려 주기 위해 감히 이물을 훔치려 들었던…. 그러나 결국에는 끝까지 순박하고 순진무구하게 굴다가 저승에 올라간 녀석.
“스승님, 어떡해요? 이대로 두면 굶어 죽겠는데.”
도진이 머리를 헝클이며 물었다. 한 올도 남김없이 깔끔하게 올렸던 머리칼이 흐트러졌지만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 녀석한테 새로운 집을 찾아 줄까요?”
“새로운 집이라니? 필요 없다. 여기가 내 집이다. 여기 있으면 인간들이 이사 올 거다. 내가 인간들을 맞이해 줄 거다.”
“야, 이 바보 멍충아. 아무리 짧아도 몇 년은 넘어야 하는데 그동안 계속 근처를 헤매며 동냥하게?”
고작 30년밖에 살지 않은 어린 복배바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며, 몇 년이나 걸리느냐?”
“그래. 저 현수막 안 보여? 더 길어질지도 몰라. 그냥 확 굶어 죽을래?”
“시, 싫다. 나는 인간이랑 함께 오래 살고 싶다.”
“그러니까 이사 가야지. 다른 건물로 가든가, 아예 다른 동네로 가든가.”
도진이 이리를 바라봤다. 당연히 이리가 찜해 둔 곳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리는 오히려 왜 자기를 보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시험이구나!’
멋대로 추측한 도진이 머리를 굴렸다.
30년밖에 안 된 어린 복배바리가 살만한 곳. 어린 복배바리를 잘 돌봐 줄 어른 복배바리들이 많은 곳. 이 건물은 낡고 허름해 보이니 좀 더 개선된 환영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함께 사는 인간도 좋은 사람이라면…….
“…….”
도진의 머릿속에 어딘가가 번뜩하고 스쳐 지나갔다. 이리와 눈이 마주치자 이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이 붙은 도진이 복배바리의 짧은 팔목을 붙잡았다.
“적당한 데가 있어. 가자.”
“어떤 곳이냐?”
“깔끔한 아파트 단지야. 따라와.”
그는 이 어린 복배바리에게 어떤 늙은 복배바리가 살던 집을 소개해 줄 예정이었다.
* * *
도진는 복배바리가 아파트의 기존 복배바리들과 인사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구경했다. 아등이 가장 어릴 줄 알았는데 아등보다 한참 어린 복배바리들도 있었다. 이 아파트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들이었다.
끼웅.
끼웅이가 어깨에 위풍당당하게 서서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도진의 손안으로 돌아왔다. 도진이 아무리 험하게 다루고 놀려대도 이렇게 곧잘 도진에게 달라붙고는 했다. 물론 끼웅이가 가장 좋아하는 침대는 이리의 품이었지만.
그리고 이리의 품을 좋아하는 건 도진도 마찬가지다. 도진은 복배바리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 이리에게 슬금슬금 어깨를 치댔다.
“벌써 네 시네요. 뭔가 엄청 일이 많았던 느낌이에요.”
“그러게.”
느낌이 아니라 진짜로 일이 많기는 했다.
원혼에게 빙의된 사람을 구해 주고, 방황하는 원혼 하나를 성불시키고, 집 잃은 위아 하나에게 새집을 찾아 주고.
이리 선인과의 야외 데이트는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걸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영화 보고 원데이 클래스 가요, 스승님!”
“응.”
그래도 아직 하루가 남아 있으므로 도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리도 이제 제자의 남은 계획만이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리 선인!”
“이리 선인이다!”
“잘 만났소, 이리 선인. 마침 우리가 대추 열매를 잃어버렸는데 찾아 주시오!”
“이러다 굶어 죽게 생겼소. 우리 대추 열매 주머니를 찾아 주시오!”
주차된 차로 돌아가는 길에 한 무리의 자그마한 요물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도진의 얼굴은 와락 구겨지고 이리는 난처하게 웃었다.
세상 모든 위아가 그 존재를 인식하는 이리 선인과의 야외 데이트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