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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이리의 옆에 바짝 붙었다.
“왕은 오천 년이나 진현계를 다스렸다면서요. 그럼 번아웃이 오는 게 당연하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 불로불사의 존재는 누구나 다 겪어야 할 과정이잖아요. 왕도 현명하게 극복하시겠죠.”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도진이 짐짓 어른스럽게 말했다. 이리는 도진이 붙은 만큼 슬쩍 떨어지며 그래, 하곤 대답했다. 제자는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적당히 성숙한 말을 지껄인 것이겠지만 이리의 생각과 동떨어진 내용도 아니었다.
사제란 이렇게 닮아가는 건가…….
이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작업을 마친 후 안으로 들어온 둘은 잘 준비를 했다. 도진은 여느 때처럼 씻고 나서 상의를 탈의한 채 이리의 방 앞을 기웃거렸다. 이리는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스승님, 안 주무세요?”
“…진현계에 좀 들렀다고 자려고. 제발 옷 좀 입고 다녀.”
“진현계는 왜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이번에 갔다가 막상 기도식 할 때 덕 부족할 수 있으니까 아끼자.”
도진은 입술 끝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왜 가시는데요? 이 야밤에, 누구를 만나려고. 번아웃에 걸린 왕?”
“나도 제자를 들이는 게 처음이라 경험자한테 기도식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도진은 ‘제자를 들이는 게 처음’이라는 말에 금방 또 헤벌쭉 웃었다. 스승은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데 제자는 매분매초 널을 뛰었다. 역시 닮아 가려면 먼 듯했다.
“경험자라면 나비 선인이요?”
“아니, 뭉용이라고 있어. 가장 최근에 열렸던 기도식이 300년 전 뭉용 선인과 전우치의 기도식이었거든. 이제 얼른 들어가서 자. 그리고 제발 씻고 나서 옷 좀 제대로 입어.”
“가슴 눌러 보실래요?”
“…….”
“알겠어요. 내일 스승님과 즐거운 하루를 보내야 하니 피부 관리를 위해 일찍 잠들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먹히지도 않을 시도를 해 본 도진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이리는 한숨을 내쉬며 실팔찌를 매만지다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고즈넉한 산속의 아담한 별장 앞이었다.
풍경은 밤이었고, 하늘에서는 초승달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란색과 녹색 빛을 내는 반딧불이들이 울타리 주위를 날아다녔다.
이리는 제게 다가온 호기심 많은 반딧불이 한 마리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호롱불을 든 청색 옷을 입은 아이가 나타났다. 진현계 선인들의 수발을 드는 청의동자였다.
“이리 선인님,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습니다.”
청의동자가 이리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 뭉용은 안에 있어?”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리는 청의동자를 따라 걸었다. 호젓한 경치를 감상하며 몇 분 정도 걷자 정자가 나왔다. 용 머리에 인간 몸을 한 사람 하나가 곰방대를 물고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청의동자는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이리가 정자에 올라가 뭉용의 맞은편에 앉았다.
“뭉용. 하늘에 뭐라도 있어? 뭘 그렇게 봐.”
뭉용은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둔 채 곰방대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오랜만입니다, 이리 선인.”
“응. 오랜만이야.”
“소문을 듣고 놀랐습니다.”
“무슨 소문.”
“무슨 소문이겠습니까.”
뭉용이 웃음을 짓자 양쪽으로 뻗은 두 갈래 수염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리 선인께서 곧 기도식을 여신다는데, 저는 아무리 선인님과 친우인 나비 선인이라도 허무맹랑한 헛소문을 퍼뜨려서야 되겠는가 혀를 찼습니다. 그런데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뭉용이 씁쓸히 웃었다. 그가 씁쓸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의 제자인 전우치는 아직 인간이었을 적 한 선인에게 사제지연을 맺어 달라고 수십 년을 쫓아다녔다. 그러나 그 선인은 끝내 거절했고, 전우치가 나이만 들어가던 중 다른 선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선인은 자네를 받아 줄 마음이 전혀 없다. 도사가 되고 싶다면 나와 사제지연을 맺자꾸나.’
전우치를 끝내 거절한 선인이 바로 이리 선인이었고, 전우치가 어쩔 수 없이 택한 선인이 바로 뭉용 선인이었다.
“제자 들이기를 그토록 꺼리시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 셨습니까?”
“글쎄……. 그냥 자연스럽게 사제지간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라고요…….”
“너는 전우치를 들였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뭉용이 드디어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이리를 바라봤다. 상체만 용 머리로 둔갑을 한 선인이 손을 휘젓자 곰방대는 사라지가 이제는 수묵화가 그려진 부채가 나타났다. 이는 전우치가 직접 그려서 스승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재능 있는 인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실연의 아픔 속에서도 그리도 눈부시게 빛나는 이이니… 내 밑에서 도술을 가르치면 나보다 더 크게 성장하여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실제로 도사가 된 전우치는 조금만 더 수행에 집중하면 선인이 될 수 있음에도 무궁한 영예를 뒤로 미룬 채 포도대장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고 있다. 스승의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저는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이리 선인은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이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나도 너와 같아. 도진이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장사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어. 그 아이가 왕이 되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더 확실한 후원 방법을 선택했지.”
그 후원의 방법이 바로 사제지연을 맺는 것이었다.
뭉용이 부채를 천천히 흔들었다. 몇 가닥 없는 수염이 팔랑거렸다.
“그거 아십니까? 선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김도진에 대한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리도 나비가 연회만 열었다 하면 도진 이야기를 해댄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무려 후견인이 이리 선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기장수, 장사면서 장군신이 아니라 선인이 되려는 자, 다소 다혈질이고 건방진 성격……. 강림도령과 도술 대결을 펼치고 염라대왕과 팔씨름을 해서 이겼다는 것까지.
그동안은 후견인이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김도진’이라는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았는데, 나비 덕분에 많은 진현계 주민들이 김도진이라는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기억했다. 사신방 현무의 후보는 아직까지 이름도 모르는 이가 많은 반면 도진은 이제 세 후보 중에서 가장 유명한 후보가 되었다.
“나비 선인은 가끔… 황당무계한 말도 하더군요.”
“황당무계한 말?”
“선인님의 제자가 선인님에게 연정을 품었다고 말입니다.”
“…….”
이리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뭉용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 지금 난처해하시는 건가요?”
“으음…….”
“그 황당무계한 소문이 진실이란 뜻입니까?”
이리는 그저 입술을 꾹 닫았다. 거짓말을 못 하므로 입을 열면 그 소문이 진실이라는 근거만 나불거릴 것 같았다. 나중에 제자가 정인이 된다는 망측한 예지가 있었다는 둥…….
하하하하하! 뭉용은 만나고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주위를 날아다니던 반딧불이가 쩌렁쩌렁한 웃음소리에 흩어졌다가 금세 다시 돌아왔다.
“제자의 연심을 훔쳤으니 마음이 무겁겠군요. 싫지 않으시다면 이 기회에 첫 정인을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도진이 기저귀를 갈아줬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선인이 정인을 만드는 데에 가장 방해되는 것은 수명인데, 상대가 장사라면 수명도 문제 될 것이 없고. 마음을 열어 보십시오, 이리 선인. 사랑이란 감정이 선인이 생각하는 만큼 두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날 난처하게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이러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군요. 선인님은 웬만해서는 난감해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분이니.”
뭉용이 부채를 탁, 접고는 다른 쪽 손바닥에 갖다 댔다. 그리고 다시 부채를 펼치자 뭉용과 이리의 사이에 환상이 펼쳐졌다.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였다. 너무 미동이 없어서 언뜻 풍경화 같기도 했다.
“선인님의 감정은 이 호수와 같습니다.”
“…….”
“잠잠하고… 조용하고, 적막하지요. 저는 이렇게 고요한 호수는 선인님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선인’은 각자마다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비 선인의 전문 분야는 꿀벌과 나비, 지렁이 등 화단에 존재하는 생명들이고, 이리의 전문 분야는 만물이 저절로 탄생시키는 괴이한 물건들이다.
그리고 뭉용의 전문 분야는 바로 ‘감정 감지’. 엄밀히 말하면 ‘강렬한 감정’. 기쁨, 분노, 사랑, 슬픔……. 색채가 강하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다른 선인들보다 예민하게 감지했다.
“하다못해 무기력증에 잠겨 계신 임금님조차 때때로 감정의 풍랑에 휩쓸리는데, 이리 선인만은 언제 보아도 고요하더군요. 처음에는 태고의 선인은 역시 보통 존재와는 다르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3천 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점점 생각이 변했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거 아십니까? ‘적막하다’에는 ‘쓸쓸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쓸쓸하지 않아. 정인을 만들지 않고 사랑을 하지 않으며 산다고 해서 삶이 쓸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쓸쓸하지 않으시다고요.”
“그래. 오히려 소란스러운 나날이란다.”
대여점에서 일을 하다 보면 쓸쓸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특히 요새는 아예 제 방을 차린 제자 때문에 더더욱.
“저는 쓸쓸하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리 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