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60화 (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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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초꾼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으아아. 흡혈귀 살려. 사람 살려. 여러분! 상인 여러분! 지금 선량한 흡혈귀가 납치당하고 있습니-!”

“닥쳐, 좀. 그냥 피만 뽑을 거니까.”

“…네? 피요?”

“흡혈귀의 생피가 앤리초의 대가야. 그게 아니었으면 너 데리고 오지도 않았어.”

“…진즉 그렇게 말씀하셨어야지요.”

제임스가 얌전해진 후에야 도진이 붙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제임스의 팔목에는 혈관이라도 터진 듯 검붉은 흔적이 남았다. 인간이었다면 손목이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약초꾼은 능숙하게 제임스의 피를 뽑았다. 500ml로 세 번 채혈했는데, 흡혈귀인 그에게 이 정도는 아무 의미도 없으면서 어지럽다느니, 주삿바늘이 무섭다느니, 아프다느니 온갖 엄살을 떨었다. 물론 엄살을 받아주는 이는 끼웅이밖에 없었다.

“자, 이게 앤리초네. 어디에 필요한지는 묻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답례로 저도 흡혈귀의 피를 어디에 쓸 건지 묻지 않아 드리죠. 아, 그 대신 다른 질문이 있는데.”

“무엇인가?”

“간판의 ‘ㅅ급’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밖에서는 이런 표현을 하지 않나 보군. 선인급의 ㅅ급이네. 인간급, 도사급, 선인급 중 가장 강한 등급이지.”

“B급, A급, S급 같은 거군요.”

“바깥 표현은 영 정이 안 들어.”

도진이 다시 물었다.

“장사랑 장군신 등급은 없습니까?”

“둘 다 ‘ㅈ’이라 구분이 안 가지 않은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진을 약초꾼이 따라 나왔다.

“이봐. 자네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

“어떤 평범한 인간이 이 살벌한 율도국에 들어오겠습니까.”

“살벌하다니. 이 풍경 어디가 살벌하단 말인가? 오늘도 다 함께 춤추고 노래하던 모습 못 봤나?”

“어딜 봐도 위아가 없잖아요. 살벌하고 기괴하죠.”

“이보게.”

약초꾼이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 시선에서 보자면 자네들 세상이 더 살벌하고 기괴하네. 잡귀들이 길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해도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가지 않나? 한쪽만 일방적으로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니. 그건 인간을 가지고 노는 짓이지. 조롱하는 짓이란 말이네. 그게 더 살벌하고 기괴해.”

도진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약초꾼의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을 없는 것처럼 만드는 이곳이나,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는 그곳이나 따져 보면 기괴하기로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솔직하게 인정했다.

“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당연히 화낼 줄 알았거든. 자네들 세계를 험담했다고.”

도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닌데요, 뭐.”

“자네 같은 외지인은 처음 보는구만.”

약초꾼이 혀를 찼다. 도진을 보는 이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이었는데, 도진은 그런 반응이 싫지 않았다.

약초꾼과 헤어지고 가게를 나왔다. 앤리초는 아주 샛노란 색이라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시야에 조금도 걸리게 하고 싶지 않아 크로스백 지퍼를 잠그려고 하자 끼웅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기어 나왔다. 끼웅이는 도진의 손목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도진 씨, 저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머리가 어지럽구… 다리에 힘도 안 들어가구.”

제임스가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엄살을 피웠다. 낯선 이방인들을 구경하고 있던 상인들이 하찮은 모습에 이제 경계보다는 웃음을 띠기 시작했다.

“야, 그럼 박쥐로 변해서 가방에 들어가.”

“앤리초의 색이 너무 눈이 부십니다….”

“그럼 어쩌라고. 여기서 살든가. 약은 우리가 만들어서 네 전 연인한테 우편 보낼 테니까.”

“도진 씨이이이. 제가 여기 홀로 남겨졌다가 사고라도 치면서요? 선인님께서 율도국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저 같은 사고뭉치를 놓고 왔냐고 도진 씨를 혼낼 수도 있어요…….”

“아오, 빡치게 하네.”

제임스는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매달렸고, 율도국 상인들의 비웃음은 더욱 심해졌다. 도진은 결국 두 손가락으로 더러운 쓰레기봉투를 붙잡듯 제임스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좀 편하게… 업어 주시면 안 됩니까?”

“되겠냐. 너 저기다 던져 버리기 전에 닥쳐라.”

‘저기’는 시장을 나와 조금 더 걸으면 있는 넓은 호수였다. 앞에는 ‘주의! 깊이 50km!’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제임스는 급히 입을 닫았다.

아무리 말랐어도 180cm가 넘는 큰 키인데, 장신의 남자를 두 손가락으로 든 채 걸어가자 사람들의 속닥거림이 커졌다.

“저기 이방인 좀 봐요. 힘이 왜 저렇게 세?”

“뭐, 주술 아닐까요? 평범한 인간 같지는 않은데.”

“도깨비가 인간 형태로 둔갑한 거면 어떡해요?”

“에이, 율도국에는 대왕의 결계가 걸려 있잖소. 도깨비도, 여우 요괴도 이곳에 발 딛는 순간 둔갑이 풀려 버린다오.”

“그럼 대체 저 인간은 뭐 하는 자인데 힘이 저리 세단 말이에요.”

도진은 계속 속닥거림을 들을 바에야 ‘내가 장사다!’ 쩌렁쩌렁 소리치고 싶었다. 워낙 답답한 걸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진짜로 그래 버릴까 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도진을 불렀다.

“이봐, 거기 흡혈귀 들고 가는 장사.”

도진이 멈춰 섰다. 그를 세운 자는 커다란 갓을 쓴 사내였고, 아무 무늬가 없는 검은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갓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자네, 보통 힘이 아니군.”

“그래. 보통 힘 아니다. 내가 바로 장사다. 성인이 된 아기장수다! 됐습니까?”

도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갓을 쓴 사내는 왜 성질을 내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고는 뭔가를 던졌다.

명함 사이즈만 한 종이였는데 마치 무게가 있는 돌멩이처럼 도진에게 날아왔다. 도진은 갓 쓴 사내가 도사임을 바로 알아챘다. 도사가 왜 접근하는지 수상하긴 하지만 일단 종이를 낚아채 펼치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13회 전국 팔씨름 대회

접수-23:59:59까지

장소-저잣거리 중앙 광장

자격-아무나!

“팔씨름 대회?”

“그래. 100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지. 자네가 당연히 참가할 줄 알았는데 왜 이 방향으로 가나 했더니 설마 모르고 있었나?”

“전혀 몰랐는데요.”

“승자는 무한한 영예와 더불어 진귀한 상품을 받는다네. 꼭 나가보게나.”

“이방인도 참가 가능합니까?”

사내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거기 자격에 ‘아무나’라고 적힌 글 못 봤나? 아무나면 아무나인 걸세.”

“그렇게 배타적이면서 이런 대회는 또 참가하게 해 주네요.”

도진은 아까 함께 배를 타고 왔던 일행이 떠올랐다. 도깨비 그룹과 흰 베일 그룹. 그들도 이 대회에 참가하려고 온 거였나.

“상품이 궁금하지 않은가?”

“상품이고 뭐고 저는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 말입니다. 내 스승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그럼 이만.”

“덕.”

“…….”

도진이 우뚝, 멈춰 섰다.

“100년에 한 번 열리는 율도국 팔씨름 대회에서는 승자 1인에게 100년어치의 덕을 준다네. 어때, 좀 끌리는가?”

* * *

덕을 세는 단위는 대개 기간이다. 하루치의 덕, 한 달 치의 덕, 일 년치의 덕. 그리고 그 기간 앞에는 ‘수행 중인 사람이 평균적으로 쌓는’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수행 중인 사람이 평균적으로 쌓는 100년 치의 덕.

당장 진현계에 발도 못 들일 정도로 덕이 부족한 도진으로서는 흘려 넘길 수 없는 유혹이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많은 걸 얻어서 와라’는 홍길동의 통치를 보고 얻으라는 게 아니라 바로 100년 치의 덕이었구나!’

이리 선인이 얻어서 돌아오라고 했으니 그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도진은 당장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향해 참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야, 흡혈귀. 너도 참가할 거냐?”

“아닙니다……. 도진 씨가 참가를 한다는 사실을 아는데 뭐 하러 저도 참가해서 힘을 빼겠습니까…. 꼭 이기고 오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끼웅. 끼우우웅…….

끼웅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불참을 선언하며 제임스와 똑같은 자세로 벤치에 앉았다.

도진은 대회 스태프에게 신청서 한 장과 접수비를 건넸다. 스태프가 친절하게 받아 들었다.

“막판에 아슬아슬하게 접수하시네요. 성함은 김도진 님, 나이는 20세. 아이고, 어리네요. 음? 잠깐. 장사라고요? 장사… 가 뭐였죠?”

“그런 게 있습니다. 저 잘 접수된 거 맞죠?”

“예. 맞습니다. 꼭 이기세요.”

기계적으로 대답한 스태프가 팔씨름 대회 날인이 찍힌 딱딱한 종이를 도진에게 건넸다. 도진이 그 종이를 쥐자 날인은 물감이 번지듯이 도진의 손등에 번졌다.

“야, 너네. 얌전히 있어라. 어디 가지 말고.”

도진은 겁 많은 위아들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성큼성큼 대회장으로 향했다. 대회장은 조명을 설치해 놓아 대낮처럼 환했고, 무대에 팔씨름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참가 인원은 약 200여 명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도깨비 그룹과 흰 베일 그룹도 보였다. 그 외에 눈길을 끄는 사람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장한(壯漢) 정도.

‘딱히 몸을 풀 필요도 없겠네.’

100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인데 참가 인원수가 이렇게 적은 이유는 율도국이 워낙 비밀스러운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진은 벌써부터 우승을 예감하며 혼자 즐거워하다가 마침 빈 의자 하나를 발견하고 앉았다. 대회 시작까지 30분 정도 남아 찍어 놓은 스승님 사진이나 보려는데, 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악. 야, 자리 찼잖아. 누가 앉았잖아. 그러게 내가 여기 있으랬지. 왜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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