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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국은 홍길동이 없으면 유지되지 못하는 나라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의료, 교육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국 내에서 해결하는데, 그게 가능한 이유는 홍길동 대왕의 도술 덕분이다.
매우 배타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관광 비자는 아예 허용하지 않으며 오로지 공적인 업무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만약 제임스가 율도국의 약초가 필요하다며 문을 두드린다면 아무리 슬픈 사연을 털어놓아도 절대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율도국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이리 선인 덕분이었다.
‘여기서 뭘 배워. 왕은 배타적이어선 안 된다는 걸 배우라는 걸까?’
도진이 지금까지 겪은 이리는 진보적인 면과 보수적인 면이 같이 있으며 다정하면서도 냉철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쉽게 의도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와아……. 하늘보다 위로 올라가면 우주가 있는 거 아니었어요? 세상에… 바다가 펼쳐지다니. 너무 아름다운 오색 바다네요.”
제임스의 탄성에 도진이 고개를 드니 정말로 갑판 밖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눈부신 오색빛깔의 바다였다.
도진은 이리와 함께하면서 워낙 신묘한 풍경들을 자주 봐 왔기에 웬만해서는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 오색 바다는 정말 아름답고 황홀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은 잘게 부서진 보석들로 뒤덮인 듯했고, 수면 아래에서는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헤엄쳤다. 마치 보석이 살아 숨 쉬며 유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저기 좀 보세요. 세상에! 고래인가요? 너무 예뻐요!”
멀리서 보기 드문 영물인 빙고래가 오색 분수를 내뿜으며 도약했다.
“아… 씨발.”
도진이 욕을 내뱉자 제임스도, 끼웅이도 ‘지금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욕을 한 게 맞는 거냐.’라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도진은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이리 선인과 함께 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마음 탓이었다. 그 좁은 대여점에 갇혀서 홀로 야근을 하고 있을 선인을 생각하니 이 풍경도 더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스승님을 너무 사랑해. 이 감정을 무엇에 빗댈 수 있을까. 스승님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실까….’
스무 살 김도진은 이리 선인을 향한 자신의 애틋한 연정에 스스로 취해서 갸륵한 표정을 지으며 저 먼 수평선을 바라봤다.
물론 그때 이리는 오랜만에 홀로 남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야근을 즐기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금세 시간이 흘러 율도국에 착륙할 때가 되었다. 안내 방송에서 약간의 흔들림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서 도진은 갑판의 손잡이를 붙잡았고, 제임스는 갑판 바닥에 달라붙었다.
끼웅?
막상 착륙할 때는 끼웅이도 겁내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착륙했다.
율도국은 마치 조선시대를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보수적인 나라의 항구치고는 사람이 많았는데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는 듯했다. 전부 한복을 입고 다녔고, 곳곳에 상투를 튼 이들도 보였다. 핸드폰을 하며 돌아다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신발은 운동화 종류를 신고 있기는 해서 답 없이 보수적이지는 않구나, 싶었다.
“도, 도진 씨. 다들 저희를 노려보는데요. 한복까지 입었는데도…….”
이리한테서 어떤 곳인지 설명을 들은 도진은 한복도 준비해 왔다. 하선하기 전에 나름대로 양반 복장으로 깔끔하게 갖춰 입었는데도 날카로운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큰 실수를 한 흡혈귀라는 걸 알아본 걸까요? 서역의 이방인은 반기지 않는 걸까요? 저는 오지 않을 걸 그랬나 봐요…….”
“약초를 얻으려면 네가 반드시 같이 와야 했어. 소심한 티 내지 말고 당당하게 걸어.”
도진은 노려보는 이들을 마주 쏘아보았다.
“…….”
“……!”
“……!”
사람들이 눈싸움을 해 오다가 결국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장사의 부리부리한 시선을 받고도 몇 초나 버텼으니 인간치고는 아주 오래 버틴 것이다.
율도국 국민들을 기선제압한 후에는 주술로 존재감을 낮추려고 했는데, 율도국의 결계가 무척 강력하여 주술이 쉽지 않았다. 대신 이리가 준 율도국 화폐로 마차를 빌려서 목적지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 제임스가 바깥을 구경했다.
“율도국은 야밤에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네요. 꼭 한낮인 줄 알겠습니다.”
제임스의 말대로 밤 10시가 넘은 시각인데도 길거리에 사람이 무척 많았다. 모든 이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고, 행동에는 활기가 넘쳤다. 다들 즐거운 일이 넘쳐흐르는 사람들 같았다.
“치안과 복지가 좋은가 보네요. 보고 있자니 저도 행복해져요.”
“그럼 여기 이민 오든가.”
“이방인을 그토록 경계하는데요…. 이민을 받아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쉬워요…….”
끼웅.
창틀에 매달려 구경하던 암인이 서러운 소리를 내며 도진의 그림자로 파고들었다.
“끼웅이가 왜 그러는 겁니까?”
“친구가 없어서 서럽나 보네.”
“네? 친구가 없다니요?”
“돌아다니는 사람 중에 혼령 말고는 위아가 한 명도 없잖아. 죄다 인간이야.”
“아…!”
제임스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창밖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도진의 말대로 보이는 사람이 전부 인간 혹은 인간의 혼령뿐이었다.
제임스는 사람들이 야행성인 게 이해가 되면서 어쩐지 섬뜩해져 커튼을 쳤다.
“역시 저는 얼른 약을 구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넌 신령이 왜 이렇게 겁이 많냐? 신령 정도면 꽤 강한 능력치를 가졌을 텐데.”
“저는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치게 하는 게 무섭다 보니 겁이 많아졌어요.”
비웃을 준비를 했던 도진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멍해졌다.
다치게 하는 게 무섭다. 자신도 과거에 숱하게 했던 생각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무섭다’가 아니라 ‘싫다’에 가까웠지만.
힘 조절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한 지금도 도희에게 함부로 손을 못 댔다. 다치게 했던 기억 때문에.
도진은 이 마음을 ‘겁’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싫은’ 거지. 절대 ‘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진 씨, 저희는 어디로 가는 중인가요?”
“…중앙시장.”
“중앙… 시장이요? 물건들을 놓고 파는… 그 시장?”
“그래. 스승님이 저잣거리의 약초 상점에서 거래하랬어.”
“사람들은 야행성이라고 해도 약초는 밤에는 시들지 않을까요?”
“햇빛 아래에서는 시드는 약초들을 취급하는 상점이라 밤에만 문을 연대. 왜 이렇게 의심이 많냐? 그냥 좀 닥치고 가자.”
“네…….”
도진은 이리가 대체 여기서 뭘 배워 오라고 보낸 건지 점점 알 수 없어졌다. 역시 반면교사 삼으라는 뜻에서 보낸 걸까? 위아를 배척하고, 지나치게 보수적인 데다가 인간의 생리에 맞지 않는 생활 리듬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너는 그렇게 통치하지 말라고…….
도진으로서는 이리의 의도를 영 짐작할 수가 없었다.
중앙시장은 축제라도 열렸나 싶을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실제로 광장에서는 용고와 편경 등의 악기 소리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도진은 잠깐 멈춰 서서 근심 걱정 없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리가 얻어 오라고 한 게 대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는 숙제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나 겁먹은 제임스가 옷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다시 길을 걸었다.
시장 상인들의 시선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 속에서 도진은 당당하게 얼굴을 들었지만 제임스는 죄인처럼 점점 쪼그라들더니 결국에는….
끼이.
박쥐로 변했다. 털빛이 번쩍번쩍한 황금박쥐가 도진의 크로스백 안으로 숨어들었다.
끼웅?
끼이.
끼웅, 끼웅.
끼이이.
크로스백의 기존 거주자 끼웅이와 담소를 나누는 제임스를 보며 도진은 역시 인간이든 위아든 너무 겁이 많으면 하찮아 보인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이리가 알려준 약초 상점은 시장의 끝자락에 있었다.
‘나 혼자 ㅅ급 약초꾼’이라고 적힌 손글씨 간판 앞에서 제임스가 쏙 빠져나왔다.
“ㅅ급이 뭔가요?”
“뭐야. 너 말할 줄 알아? 아까는 끼이거렸잖아.”
“저, 저도 나름 신령입니다. 짐승화를 해도 사람 말 정도는 한다구요…….”
“어우, 징그러워.”
“너무하십니다… 흐흑.”
뜻을 알 수 없는 간판이 달린 약초집은 6평 남짓한 아담한 가게였다. 대여점처럼 내부에 들어가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가게 문은 닫혀 있었고, 초인종 대신 종이 있었다. 도진이 줄을 잡아당기자 띠리리리리리- 생각보다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예. 나갑니다아.”
문이 열리고 나타난 가게 주인은 전형적인 농사꾼이었다. 구릿빛 피부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도진의 위아래를 훑었다. 눈이 제법 날카로웠다.
“이방인이로군.”
“예,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앤리초’라는 약초를 판다고 들었는데 혹시 한 뿌리 살 수 있을까요?”
“앤리초라…. 그게 왜 필요하지?”
“자초지종을 말하기엔 길어서 말입니다. 대가는 부족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앤리초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예.”
도진이 크로스백에 다시 숨어 버린 박쥐의 양날개를 한 손으로 붙잡고 들어 올렸다.
“여기요.”
“…! 끼이! 아니, 잠깐만요. 이, 인신매매!? 절 인신매매하시는 겁니까?”
제임스가 급하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도진에게 단단히 붙잡힌 팔목을 빼려고 어떻게든 애를 썼으나 장사의 완력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약초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임스를 살폈다. 눈동자와 송곳니, 창백한 피부를 확인한 약초꾼이 말했다.
“진짜 흡혈귀로군. 그렇다면 거절할 수는 없지. 들어오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