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57화 (57/203)

57

큰 키에 비해 다소 마른 체격을 가진 흡혈귀가 도진과 이리 앞에서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죄… 죄송합니다아…….”

도진과 이리는 그저 평범하게 인사 후 대여점에 데리고 왔을 뿐이었는데 혼자 덜덜 떨다가 사과했다.

도진의 앞 포켓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경계하는 암인이나 무려 신령인 이 흡혈귀나 간덩이 크기는 비슷해 보였다.

“뭐가 죄송한데?”

“부, 불법 체류자라서…….”

흡혈귀가 고개를 숙이더니 훌쩍거렸다.

아무도 뭐라고 안 했는데…….

도진이 이때다 싶어서 이리에게 속삭였다.

“포도청에서 엄청 괴롭혔나 봐요. 막 고문도 하고 정신 세뇌하고 그랬나 보다. 너무 무섭다. 전우치 포도대장이랑 좀 멀어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간질하면 덕 나간다….”

“아니, 이간질이 아니라 그냥 심증에 의한 추론으로….”

“딴또리도 너보다 어른스럽겠어.”

“…….”

도진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애 같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딴또리는 이제 요물이 아니라 요괴이므로 그렇게 애는 아니다.

덕유산 신령의 말로는, 아름다운 요괴가 된 딴또리는 가만히 제 날카로운 발톱을 살피다가 어디론가 훌쩍 날아갔다고 했다. 목적지는 밝히지 않았다.

융은 ‘어른스러운’ 선택을 했을 것이다. 도진은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네 이름이 제임스라고 했지? 불법체류에 대한 처벌은 받았으니 그렇게 죄인처럼 굴지 않아도 돼. 먼 길 왔으니 하루 쉬고 내일 해지면 도진이랑 같이 출발하렴.”

“여, 여기서 쉬나요?”

“응. 손님방을 청소해 놨어.”

“참고로 바로 옆이 내 방이니까 허튼 생각은 하지 마라.”

도진이 날카롭게 경고했다. 그 허튼 생각이 뭔지도 모르면서 제임스가 네에, 네에 했다.

“저기… 그런데 내일 어디로 가라는 건지…….”

“포도대장한테 얘기 못 들었어?”

“저는 대여점 오면 방법을 알려줄 거라고만 들었습니다….”

“으음…….”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진이 속삭였다.

“자기가 설명하기 싫으니까 스승님한테 미룬 거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수염만 멋지게 기르면 답니까? 제 책임도 미루는 관리직이라니 정말 최악이에요.”

“…덕 날아간다.”

이리는 하는 수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제임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너는 흡혈귀화 진행을 중단할 방법을 찾아서 한국에 왔다고 들었어.”

“마, 맞습니다…….”

세상에는 ‘권속’ 말고도 위아가 아닌 존재를 위아로 만드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특정 종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데 그 특정 종족 중 하나가 바로 흡혈귀다.

여우 요괴와 사이가 좋지 않아 주로 서방 지역에 사는 흡혈귀는 상대에게 제 피를 천 일 동안 빠뜨리지 않고 먹이면 상대를 자신과 같은 흡혈귀로 만들 수 있다.

제임스는 자연 태생 흡혈귀인데, 최근에 인간과 사랑에 빠져서 상호 동의하에 흡혈귀화를 진행했다. 그러다 900일째가 되었을 때쯤 상대가 사실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게 아니라 불로불사를 원해서 사랑하는 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럼에도 그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계속 흡혈귀화를 진행하다가… 960일째 날, 상대가 지나가다가 어깨를 부딪친 사람을 일부러 쫓아가 죽이려 드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960일째면 이미 흡혈귀화가 상당히 진행된 터라 그저 피 흡입을 멈춘다고 끝나지 않는다. 제임스는 정확한 방법은 모르지만, 그 또한 태어나자마자 대여점과 이리 선인의 존재를 알았으므로 무작정 한국행을 결심했다.

‘이리 선인이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

평생 루마니아에서만 살아온 제임스를 위해 포도청에서 미리 포도군사 송기수를 보냈으나 길이 엇갈렸고, 제임스 혼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국 땅에 발을 딛자마자… 포도청에 잡혀갔다. 한국에 오면 무조건 출입국장을 들러야 하는데 그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고, 하필 도착한 곳도 악신들이 모여 사는 마경(魔境) 근처였기 때문이었다.

불법 체류자라도 신령급이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일이라 포도대장 전우치가 직접 자초지종을 들은 후 가벼운 벌금만 물고 풀어 주었다.

아니, 풀어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리에게 직접 연락해 약속까지 잡아 줬으니 제임스로서는 불법 체류함으로써 더 이득을 본 셈이다.

“흡혈귀화를 멈추려면 우리 대여점의 이물과 특별한 재료를 사용해서 약을 만들어 먹여야 해. 그런데 그 특별한 재료는 지금 이곳에서는 구할 수 없거든. ‘율도국’에서만 자라는 풀이라서.”

“율도국이요?”

“그래. 아주 유능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한국에서 그리 멀진 않은 곳에 있어. 어디서 약초를 구해야 하는지는 도진이가 아니까 내일 해가 지면 같이 가서 가지고 와.”

“네…….”

흡혈귀가 덩치 크고 부리부리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런데 저분은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마세요.”

도진이 날카롭게 말했다.

“난 당신뿐이 아니라 내 스승님 말고 모든 게 마음에 안 드니까.”

“아, 예……. 죄송합니다….”

흡혈귀가 쭈굴쭈굴해졌다.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 흡혈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 *

“스승님, 저 가요.”

이튿날 저녁, 도진이 대문 앞에서 이리를 불렀다. 이리가 고객에게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얼른 나왔다.

“출입국장 직원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고, 율도국에서도 항상 예의 있게 행동해. 함부로 말 낮추지 말고. 위아가 아니라 인간이지만, 율도국민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할 테니까 자극하면 안 돼.”

“네. 걱정하지 마세요. 대여점 직원 신분으로 가는 거니까 저도 조심할게요.”

도진이 자기만 믿으라는 듯 듬직하게 웃어 보였으나 이리는 그다지 미덥지 않았다.

도진 옆을 보니 흡혈귀는 호달달 떨고 있었다. 이자가 나이는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도진보다 더 미덥지가 않아서 부탁할 수도 없었다.

“율도국 방문은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곳의 왕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는지 잘 보고…. 많은 걸 얻어서 오렴.”

“네. 거기 전화 안 된다고 했죠?”

“외부와의 연락은 불가능한 곳이야.”

“스승님이랑 통화 못 한다니까 슬프네요. 저 스승님 사진이라도 찍어 가면 안 돼요?”

“그래…. 그렇게 해.”

도진이 이리의 독사진을 찰칵, 찰칵 찍었다. 이리는 뒤통수가 따가웠다. 고객이 대놓고 구경 중이었기 때문에….

“그럼 갈게요. 아, 잠깐만.”

그때 도진이 쑤욱, 손을 뻗었다. 이리의 어깨를 향해서였다.

끼웅!

이리의 목 뒤에 숨어 있던 암인이 도진에게 뒷덜미를 붙잡혔다.

“야, 김끼웅. 내가 가면 너도 가는 거야. 알겠냐?”

끼웅. 끼웅. 끼우우웅.

암인이 이리에게 앙증맞은 팔을 뻗고 버둥거렸다. 살려 달라는 뜻이었는데 이리는 그에는 관심이 없었다.

“왜 김끼웅이야?”

“제 성이 김이니까요. 아니면 이끼웅 할까요?”

“김끼웅 하자.”

이리는 김끼웅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끼웅아, 너라도 따라가서 도진이 챙겨 줘. 잘 다녀와.”

끼웅…….

암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출입국장으로 향하는 동안 차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가끔 암인만 서럽게 끼웅거릴 뿐, 흡혈귀와 장사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제임스는 창밖의 야경이라도 보려고 했으나 하도 빠르게 지나가서 뭐 보이는 것도 없었다.

“저, 저기…….”

“뭐요.”

용기 내서 말을 붙이자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 그쪽이 진현계 왕 후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맞아. 내가 왕 후보 중 하나야.”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완전히 인간은 아닌데. 그것도 못 알아보나.”

“그, 그럼 갈래가 어떻게 되시나요?”

“장사.”

“장사가 무엇인지…….”

“그것도 몰라? 너 몇 살이냐?”

“2, 243살입니다.”

“아하. 어리네. 모를 만도 해.”

20살짜리 장사가 건방을 있는 대로 떨었다. 소심한 제임스는 그저 이자는 어린데도 아는 게 많구나, 역시 이리 만물 대여점의 직원이구나 우러러봤다.

도진은 제임스에게 장사에 대해 설명했다. 왕이 될만한 재목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주위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결국 어린 나이에 죽는… 그런 비극적인 설화를 듣자 제임스가 눈물을 글썽였다.

“너, 너무나 슬픕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시기와 질투를 하는 걸까요……. 이 사랑만 퍼붓기에도 아까운 아름다운 세상에서….”

“흡혈귀처럼 사랑만 존나 하는 것보다는 낫지. 너네 종족은 낭만과 사랑에 미쳐서 한때 인간을 마구마구 흡혈귀화 해 버렸다면서.”

“그, 그건 제 조상의 일입니다. 아주 오래전의…….”

“지금도 사랑 때문에 한 명 흡혈귀화 하려다 실패했잖아.”

“흐읍. 저는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임스가 뿌엥 울음을 터뜨렸다. 암인이 끼웅, 끼웅 당황하며 제임스에게 다가가 열심히 다독였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절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

도진은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바라봤다.

도진은 짝사랑을 하면서 힘든 적도 있었고, 답답한 적도 있었지만…. 엄청 서러워서 밤새 잠 못 이룬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슬프게 운 적은 없었다.

‘스승님은 날 거절하고 쳐내면서도… 슬프게 만들진 않아.’

창문에 훌쩍훌쩍 우는 제임스가 비쳤다. 서로 사랑한다고 확신했는데, 그 믿음을 배신당한 이의 얼굴은 너무나…….

‘어우, 못생겼어. 난 절대로 스승님 앞에서 울지 말아야지. 뭐 울 일도 없겠지만.’

역시 남을 향한 안타깝고 애틋한 감정 따위는 쉽게 갖지 않는 도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