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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 삐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 5월 5일 어린이날에 이리가 선물을 줬다.
도진이 초등학교 졸업하면서 “이제부터 선인님은 저한테 어린이날 선물 주지 마세요!”라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한동안 주지 않았는데, 갑자기 어린이날 아침부터 곱게 포장한 선물을 내민 것이다.
내용물은 손목시계로, 어린이날 선물치고는 상당한 고가의… 어른스러운 제품이었으나 도진은 어린이날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에 격양했다.
‘스승님이 절 어리게만 봐도 어차피 우리는 정인이 될 사이예요! 이건 의미 없는 발악이라고요! 헛된 바람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인정하시라구요!’
참고로 그 시계는 지금 도진의 손목에 잘 채워져 있었다. 화는 나지만 이리가 준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탓이었다.
도진이 삐진 두 번째 이유는 이리가 ‘백지’의 예언 이후 계속 도진을 아파트에서 자게 했기 때문이었다. 도진이 어찌 상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도술을 사용해서 집에 돌려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시간이 밤 8시였다.
‘스승님 제발, 여기서 절 재우진 않더라도 8시는 너무 이른 시간이란 말이에요! 앞으로 고집부리지 않을 테니 한 시간만 더, 제발 11시까지라도 여기 머물게 해 주세요. 저 다른 게 아니라 일하고 싶어서 그래요. 일이 너무 하고 싶어요!’
도진이 그렇게 빌어도 이리는 가차 없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잔뜩 삐진 제자는 대여점의 전화조차 무시하고 있다.
‘내일 ‘그곳’에 함께 가야 하는데 이래서야….’
삐이이- 전화는 계속 울리는데 도진은 이리를 노려보기만 할 뿐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이리가 몸을 일으키는데 너무 오래 쪼그리고 있었던 데다가 화로의 연기 때문에 몸이 휘청거리고 기침까지 튀어나왔다.
“스승님!”
도진이 얼른 튀어나와 이리를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아, 씨. 들어가세요. 화로는 제가 볼게요.”
“응……. 고마워.”
“가서 물 마셔요.”
“그래.”
어차피 제 걱정에 이리 달려올 거면 전화나 좀 받아 주지….
이리가 쓰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도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네, 이리 만물 대여점입니다.”
-선인님, 잘 지내셨습니까?
“아, 전우치.”
전화를 건 이는 바로 포도청의 포도대장, 전우치였다.
이리는 입가에 미소를 내걸다가 도진이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얼른 다시 내렸다.
“무슨 일이야?”
-바로 용건을 물으시는 겁니까?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여전히 대여점은 바쁜지, 그간 있었던 소소한 일들 좀 왔다 갔다 하지요.
“아. 맞다. 퇴마사 쪽에 경고했으니 당분간 조용하겠지만 악신 만인사나 배리모스가 무슨 일을 벌이면 나한테 바로 연락 줘.”
-전혀 소소하지 않군요. 혹여라도 퇴마사와 싸우다 부상을 입지는 않으셨겠지요?
“그랬다면 대여점을 잠시 닫을 수는 있었겠네.”
-대여점은 여전히 바쁩니까?
“글쎄. 네가 바로 용건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제는 전화를 끊어야 할 정도?”
전우치가 나지막하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바쁘신 듯하니 바로 말씀드리지요. 사실 포도청에서 선인님께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뭔데? 이물 대여?”
-이물 대여 겸… ‘불법 체류자’ 하나를 안전하게 배송해 주셨으면 합니다.
“불법 체류자?”
-예. 기수가 루마니아까지 데리러 갔는데 서로 엇갈려서 위치를 확인해 보니 불법 체류자가 되어 있더군요.
“…음. 자세히 말해 봐.”
전우치가 목소리를 낮추고 본론을 꺼냈다.
이야기를 듣는 이리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어차피 ‘그곳’에 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제자에게 좋은 경험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헤헤. 스승님 저 다 씻었어요!”
“그래……. 옷 좀 입어.”
“좀 더 구경시켜 드리고 입을게요.”
“…….”
“후후후.”
도진의 기분이 풀렸다. 이리가 오늘은 대여점에서 자고 가도 좋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삐치는 이유도 단순하고, 풀리는 이유도 단순한 도진이었다.
도진은 이리 앞에서 실컷 근육을 뽐내다가 ‘불법 체류자’가 도착할 시간이 되어 옷을 입었다. 전우치는 ‘불법 체류자’가 늦은 밤에야 대여점에 도착할 거라며 미안해했지만 도진에게는 감사 편지라도 보내고 싶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여기서 자게 됐으니까.
“무슨 애가 키는 안 자라고 옆으로만 크냐. 돼지 그림자야. 그만 좀 먹어 대.”
도진이 약과에 달라붙어 있는 암인을 들어 전등 밑에서 탈탈 털었다.
암인은 이렇게 흔들거나 충격을 가하면 먹었던 그림자를 토해 냈다.
끼웅, 끼웅. 끼우우웅.
“도진아, 애 괴롭히지 마.”
“괴롭히다뇨. 애 건강 나빠질까 봐 그런 건데.”
도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행동을 멈추고 얼른 이리의 옆에 앉았다. 암인이 서럽게 울면서 이리에게 건너왔다. 이리는 암인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부모님께 어버이날 선물은 드렸어?”
도진이 크게 움찔했다.
“아, 아침에 기프티콘 보냈어요.”
“전화 통화는?”
“스승님은 제가 애인 줄 알아요?”
“어버이날에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지 않으면 어린애 맞지.”
“지금은 어차피 주무시고 계실 거라서요.”
“너희 부모님은 밤 10시에는 깨어 있단다.”
“…….”
이리의 말이 옳기에 도진이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혈육2]에게 전화를 걸자 단 두 번 만에 연결되었다.
-그래, 도진이냐.
“네. 어버이날 인사드리려고요.”
-빨리도 하는구나. 선인님은 잘 계시고?
“지금 옆에 계세요. 안 바꿔 드릴 거예요.”
-선인님께 잘하거라. 그리고 평소에 엄마한테 전화 좀 자주 하고.
“엄마 옆에 있어요?”
-있지. 바꿔 주마.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는 담백하게 끝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도진아. 우리 아들 목소리 너무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아니, 잘 지내긴 잘 지내는데 누가 보면 몇 년은 못 만난 줄 알겠어요. 우리 설날에도 봤잖아요.”
-그게 벌써 몇 달 전이니. 오늘이 5월 8일이야.
“뭐 얼마나 지났다고….”
-네가 우리한테는 데면데면 굴어도 도희한테는 잘해서 다행이구나. 얼마 전에도 만났다면서?
“걔는 뭐 그런 걸 미주알고주알 얘기한대요.”
-도희한테 어린이날 선물 줬니?
“걔 고딩이에요. 다 큰 녀석이 무슨 어린이날 선물을 받아요.”
-선인님은 주셨던데.
“…….”
도진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선물 안 주셨으면서! 라고 질투하기에는 절대로 나한테 어린이날 선물 주지 말라고 스스로 엄포를 놓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스승님 기준에서야 도희는 어린애니까요. 솔직히 엄마랑 아빠도 어린이임. 어린이날 선물 쌉가능.”
-너 선인님 앞에서도 그런 말투 쓰니?
“…….”
-좀 어른스럽게 굴려무나. 이제 스무 살이나 되었으면서 쌉가능이 뭐니, 쌉가능이. 나중에 도사 된다며 그런 말투 계속 사용해도 되는 거야? 응?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도진은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옆에 이리가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10여 분간 잔소리를 듣다가 통화를 마친 도진에게 이리가 웃으며 말했다.
“너희 부모님은 대단한 사람들이야. 괴력을 가진 기이한 아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용기 있는 자들은 역사상 몇 없었어. 부모님한테 잘해 드려.”
“…네. 맞아요. 저도 아는데.”
도진이 꿍얼거렸다. 아기였을 때의 일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
갓난아기의 발차기에 손가락이 부러지고 온몸이 멍이 들어도, 애 굶기면 안 된다고 꼬박꼬박 이유식을 먹인 사람들이다.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과 자신의 수명은 다르다. 어차피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될 이들이다.
‘저는 항상 이 아이들이 죽는 날을 생각합니다. 인간은 너무 쉽게 사라져 버리는 존재니까.’
‘안 좋은 생각을 하면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렴. 언젠가 맞이할 이별은 분명 네 생각만큼 슬프기만 하지는 않을 거야.’
신령과 이리의 대화가 떠올랐다. 도진이 생각하기에 분명 이리의 조언은 자신을 향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신령처럼 가족의 죽는 날을 상상하는 제자에게 현재에 충실하라고 돌려 말한 것이다.
“스승님. 스승님은 부모님… 아, 없었죠. 참.”
도진은 괜히 더 삐죽거리며 이리의 옆에 좀 더 붙었다.
“도희한테는 선물 뭐 줬어요?”
“눈 마사지기.”
“엥. 무슨 그런 걸.”
“도희가 달라고 했는데.”
“달라고 했다고요? 어린이날 선물로 눈 마사지기를 달라고…. 도희가 직접 말이에요?”
“응. 귀여운 아이야.”
“어이가 없네요, 진짜. 내 스승님한테 지가 뭔데.”
물론 이리가 도희의 기저귀를 갈아준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기억도 못 하면서 뻔뻔하게…. 하지만 나도 선물 받았지. 나도 손목시계를 받았어. 내 거가 훨씬 더 비싸고 좋아!
손목시계 때문에 삐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더 의기양양해지는 도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곱슬거리는 짧은 금발과 창백한 피부, 늘씬한 몸, 갸름한 눈매와 새빨간 입술.
불법 체류자는 바로 짐승에 뿌리를 둔 신령인 ‘흡혈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