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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요괴는 갈래는 영물이나 덕을 쌓고 수행을 하다 보면 털빛이 눈부신 은색으로 변하는데, 이때는 은여우라는 이름의 신수가 된다. 신수는 신령을 넘어서는 갈래로, 세상에 몇 존재하지 않았다.
천지천해의 사방신, 주작, 현무, 청룡, 백호와 사방신 직속 12신장. 이들이 바로 신수였다.
“뭐 동영상 보여줘 봐요. 움직이는 모습 보면 또 다를지도.”
하도 신기했던 도진은 팬에게 해서는 안 될 요청을 해 버리고 말았다. 신령은 당장에 노트북을 가져와 엄선한 영상을 줄지어 보여줬다. 뮤직비디오와 음악 방송 무대, 예능 클립들을 보던 도진이 물었다.
“다른 멤버들도 정체를 압니까?”
“당연히 모르죠. 여기 이 짧은 머리에 잘생긴 이 멤버가 모태 신앙이란 말입니다. 요하의 정체를 알면 기절할 거예요.”
“아니, 잠깐.”
도진이 황당하다는 듯 이리에게 물었다.
“이렇게 정체 속이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도 되는 거예요?”
이리는 옅게 웃었다.
“사람을 홀리거나 해하려는 의도가 없으면 규율에 어긋나지는 않아. 옛날에는 흔한 일이었어.”
“설마 윗세대 아이돌 중에도 여우 요괴가 있었던 건가요?”
“아이돌은 모르겠고, 진각국사나 서산대사나…. 예전엔 주로 승려가 많았구나.”
이리의 ‘옛날’은 도진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옛날이었다.
“이석진은 그냥 인간이죠?”
“응.”
도진은 조금 안도했다. 신령이 계속 영상을 보라고 내밀었지만 도진은 쉽게 흥분한 만큼 호기심과 신기함도 쉽게 꺼졌다.
“둔갑이 이렇게 완벽한데 어떻게 이자가 여우 요괴라는 걸 알았어요?”
“사실 우리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여느 때처럼 다들 모여 장기나 두는데 나비 선인이 권속을 통해서 요즘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여우 요괴가 나온다는 얘기를 전해 주더라고요.”
“그 사람은 대체 왜…….”
“저희는 마침 무료했던 차였습니다. 모든 산신령이 그렇듯 말이지요. 이 와중에 장차 신수가 될 수 있는 여우 요괴가 인간의 무리에 어울리고 있다고 하니 호기심이 들었습니다. 혹여나 여우 요괴 놈이 인간을 홀리려는 의도라면 또 저희가 저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 같이 방송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
“선인님은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으시겠죠.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아…. 정말이지 어찌나 열심히들 하던지…….”
신령은 어느샌가 도진이 아니라 이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리가 대여점에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잡혀 준 이유는 덕유산 신령에게 뭔가 고민거리가 있다는 걸 짐작해서였다. 이제 선인은 신령의 고민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았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는데…….”
모두가 이 말로 시작한다.
“보세요. 선인님.”
신령이 포토카드를 이리의 앞에 내밀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치호입니다. 어릴 때 축구를 했고 지금은 메인댄서로 활약 중이죠. 아주 파워풀한 춤을 춥니다. 이 아이는 메이슨입니다. 밤 아홉 시에 잠드는 바른 생활을 하는 아이인데, 무려 5개 국어를 할 줄 알아요.”
“…….”
“얘는 승헌인데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릅니다. 저조(櫧鳥)의 둔갑인 줄 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애는 다트라는 이름으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짜릿한 중저음을 가진 래퍼이지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덕유산 신령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가득하고, 눈빛은 아득하게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신령은 여우 요괴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다른 인간 아이들까지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신령의 삶에 비해 너무나 짧은 삶을 살다가 떠날 존재들을.
눈 한번 깜빡이면 사라지는 생명을.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리는 생명을.
“저는 항상 이 아이들이 죽는 날을 생각합니다. 선인님도 태고의 선인이라는 오랜 전설을 알고 계시지요? 전설 속에서 그들은 인간을 향해 ‘거미줄의 이슬’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새벽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이슬 말입니다.”
태고의 선인이라면 도진도 알고 있다. 덕유산 신령은 전설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전설이 아니라 실재했던 이들이다.
인류가 지적 능력을 꽃피우기 전부터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나 스스로 선인이 된 존재들. 가장 앞선 천지신명이자 뿌리 없이 스스로 태어난 존재인 이리 선인 또한 태고의 선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별칭에 ‘마지막 태고의 선인’이라는 별칭이 있는 것이다.
다만 너무 오래전에 존재했던 이들이라 지금 와서는 ‘태고의 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도 많다. 지금 이 덕유산 신령처럼 실제로 존재했던 게 아닌 전설로 취급하고는 했다.
“그 전설 속의 표현처럼 인간은 너무 쉽게 사라져 버리는 존재니까…. 마음의 준비를 한답시고 온갖 사고와 병마로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이미 삼백 번도 넘게 죽었지요. 그래도 실감할 수가 없더군요. 이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이 슬픔이 얼마나 거대할지…. 아마 선인님과 제자님도 동의하실 겁니다.”
“…….”
그야 물론이다. 이리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도진은 아주 공감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도희.
도진은 언제나 그들의 죽음을 상상해 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겪게 될 영원한 작별을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인간을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도진이 묻자 신령은 씁쓸하게 말했다.
“사랑하고 이별한 경험이 있었다면 이 비참함을 덜 느끼게 되나요?”
도진은 말문이 막혔다. 경험이 있어도 이별은 이별이고 슬픔은 슬픔일 것이다. 수없이 상상으로 예행연습을 한다고 해도 괴로우리라는 건, 도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령의 슬픔에는 도진으로서는 짐작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신령이 이리 선인을 붙잡은 이유는 단지 짧은 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털어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신령은 선인의 앞에서 겸허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그들의 죽음을 두고 볼 자신이 없습니다.”
“…….”
“제 마음이 욕심으로 물들기 전 선인님과 마주친 것은 운명이겠지요.”
‘뭐야. 그래서 스승님한테 뭘 해 달라고 이러는 거지?’
도진은 분위기상 묻지 않고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대신 이리의 옆에 슬금슬금 더 붙었다. 찻잔에 스며 나온 물기의 그림자를 찹찹 핥고 있는 암인 말고는 모두가 진지했다.
“선인님,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이리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됐어.”
“감사합니다.”
신령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도진이 못 참고 물었다.
“뭐가 알았고, 뭐가 됐고, 뭐가 감사한데요?”
신령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나는 권속을 만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
도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갈래의 끝에 다다른 위아인 신령은 권속을 만들 수 있다.
권속은 주인의 뜻에 따라 주인과 함께 몇백 년이고, 몇천 년이고 살아가는 존재.
내가 원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박제할 수 있다.
덕유산 신령의 안에서 저 아이돌을 권속으로 두고 싶은 욕심이 점점 커졌고, 내면의 욕망과 힘겹게 싸우던 이 시기에 딱 이리 선인과 마주한 것이다.
내 권능을 제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와.
만약 지금 이리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저 평범한 아이돌들은 신령의 밑에서 다른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불로불사하게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친….”
도진이 치를 떨었다. 뭐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리의 눈길 한 번에 입을 다물었다.
“혹시 내가 다른 신령들에게도 가야 할까? 사랑산이나 삼신댕이산 신령도 너처럼 흔들리고 있어?”
“아닙니다. 제가 유독 정신 못 차렸던 것이니 다른 신령들에겐 발걸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령이 포토카드를 가지런히 모아 아기자기한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는 사각 케이스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여우 요괴 때문에 제가 별 경험을 다 해 보는군요……. 그놈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선인님께 폐를 끼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여우 요괴는 항상 생을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이지.”
“그 즐거움이 제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 무게 또한 즐거움이란다.”
이리는 다 식은 차를 마저 마셨다.
“마지막으로 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생기 있어 보여. 안 좋은 생각을 하면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렴. 언젠가 맞이할 이별은 분명 네 생각만큼 슬프기만 하지는 않을 거야.”
네……, 신령은 고개를 숙이고 자그맣게 대답했다.
‘스승님은 분명 내가 가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아실 거야. 그러니까 나에 대한 조언이기도 해.’
언젠가 맞이할 이별이 정말 슬프지만은 않을까? 아직은 잘 상상할 수 없었지만, 도진 또한 이리의 조언을 뇌리에 잘 새겨 넣었다.
대화가 끝나고 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이제 가 볼게. 대여점을 너무 오래 비웠어. 내일 딴또리가 나오면 잘 안내하고.”
“맡겨 주세요.”
용건을 마친 신령은 더는 붙잡지 않았다. 이리를 따라 일어난 도진은 딴또리가 있는 방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그리고 테이블 위에 가득한 오색찬란한 굿즈에 시선을 두었다가… 신령의 축 처진 어깨를 마지막으로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