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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51화 (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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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면 훈련 빡세게 시킨다. 이제 그림자 잡기 놀이 안 해 줄 줄 알아.”

끼웅…….

무시무시한 협박에 암인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 잔챙이들이 도진의 난폭한 행동에 거의 도망친 상태라 암인은 더는 겁먹지 않고 주머니 위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도진과 이리는 늘 그렇듯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더는 사람이 걸을 길이 없다는 의미의 바리케이드를 무시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용추폭포를 지나 좀 더 걷자 울창하게 우거진 세 그루의 밤나무 아래에서 이물의 마지막 조각을 가지고 놀고 있는 요괴들을 발견했다. 어린아이만큼 작은 체구에 귀가 길고 눈이 툭 튀어나온 그들은 야광귀들이었다.

“이리 선인? 이리 선인이다!”

“이리 선인께서 여긴 무슨 일이시오?”

“이리 선인! 우리와 숨바꼭질을 하러 오셨소?”

야광귀들이 조르르 이리에게 다가왔다. 이리는 상냥하게 웃으며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너희가 가지고 놀고 있는 그게 이물의 일부분이라서 가지러 왔어.”

“이 나막신 말이오?”

이 이물 조각은 윷 조각처럼 생긴 것으로 절대로 나막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새 신발이 생겨서 다들 기뻐했는데…….”

“대신 우리 신발을 줄게.”

이리가 눈짓하자 도진이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열었다. 팔을 쑥 넣고 더듬다가 꺼낸 것은 새 신발이었다.

한번 외출 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 새 옷과 신발을 항상 구비하고 다니는 보람이 있었다.

“오오, 이것은 운동화로군! 숨바꼭질하기에 딱 좋은 신발이지.”

“좋은 재질이오. 브랜드의 냄새가 나오.”

“나막신은 가져가시오. 우린 이걸 갖겠소.”

손쉽게 교환에 성공했다. 도진이 마지막 조각을 서류 가방에 넣었다. 새 신발이 생겨서 들뜬 야광귀들에게 이리가 물었다.

“산신령은 어디 갔어? 근처 산이 다 비어 있던데.”

“오늘 모임이 있다고 가셨소.”

도진이 ‘모임이 진짜였네’ 하고 중얼거렸다.

“무슨 모임?”

“우리도 모르오. 자세히 묻지 않았소.”

“요즘 신령들은 자주 어떤 모임에 간다오.”

“다녀올 때마다 묵과 떡과 과자를 잔뜩 챙겨 온다오.”

“선인도 기다렸다가 같이 먹겠소?”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모은 신발을 구경시켜 주겠소!”

이리는 대답도 안 했는데 몇몇 야광귀들은 벌써 소중히 모셔 놓은 신발들을 찾으러 떠났다.

대여점의 부리부리한 신입 직원이 눈을 부릅뜨며 “선인님은 바쁘시다. 귀찮게 하지 마.” 경고한 후에야 야광귀들과 헤어질 수 있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도진이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설마 그 모임이란 게 막… 새보르미 연구회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죠?”

“여기서 새보르미 연구회가 왜 나와.”

“아니, 신령들이 한꺼번에 뭔 모임에 가서 핸드폰까지 꺼 놓으니까 수상하잖아요. 덕유산 신령도 연락을 안 받는다면서요. 대체 토요일 대낮에 모일 일이 뭐 있습니까. 새보르미 연구회가 아니면.”

“보통 인간들도 토요일 대낮에 모임을 갖지 않아?”

“…….”

도진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사람들은 거의 주말에 약속을 잡는다.

이리는 제자가 새보르미 사건으로 의심증이 생겼나 해서 넓은 등을 토닥였다. 웬만해서는 먼저 해 주지 않는 스킨십이었다.

“너무 의심하지 마. 신령들도 살아 있는 존재들이고…. 계모임일 수도 있어.”

“산신령이 무슨 목적으로 계모임을 해요? 돈이 필요하지도 않는데.”

“산의 정기나 도토리의 풍요를 주고받을걸. 신령들은 도토리를 워낙 좋아하니까.”

새보르미 연구회 같은 심각한 추리를 하던 도진은 도토리라는 앙증맞은 단어에 김이 빠졌다. 하지만 이리의 다독임을 계속 받고 싶어서 일부러 계속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고…. 그 사실을 단번에 알아챈 이리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어 버렸다. 정말 가혹한 선인이었다.

둘은 해 질 무렵 무주에 도착해 도진이 인터넷을 뒤져 가며 찾아낸 맛집에서 음식을 포장했다. 딱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순간 덕유산 신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 선인님. 전화하셨습니까?

“응. 잘 지냈어?”

-네, 네. 저야 잘 지냈고말고요…….

어째서인지 전화 건너편이 수상하다 싶을 만큼 고요했다. 만약 신령들이 모여 있다면 상대가 이리 선인인 것을 알고 입 다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 전에 만들어진 이물 때문에 전화하셨지요? 제가 집에 잘 가져다 놨습니다. 어디신가요? 가지고 가겠습니다.

“마침 탈피할 때가 된 어린 융이 연락을 해 와서 말이야. 괜찮다면 네 집을 빌려도 될까?”

-무, 물론이지요. 선인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고마워. 5분 걸릴 거야.”

-…선인님께서 저보다 빨리 도착하실 듯합니다. 현관 비밀번호는 827911*입니다. 들어가 계세요…….

도진은 내비게이션에 ‘덕유산 산신령 집’을 입력했다. 웬만한 산신령 집은 다 입력되어 있는 용마의 내비게이션은 훌륭하게 길 안내를 했다.

보통 산 입구가 용마가 차로 갈 수 있는 끝인데, 이 집은 집 바로 앞까지 갈 수 있었다. 주차장을 구비한 전원주택인 듯했다.

신령과 통화를 마치자마자 전화가 왔다. 발신 번호가 공중전화임을 확인하고 이리가 전화를 받았다.

“딴또리, 어디야?”

-3, 30분 더 걸릴 것 같아서…….

“마중 나갈 테니까 키가 크고 부리부리한 남자를 보면….”

-나는 길 잘 찾아서, 마중은 필요 없는데!

“알았어. 도착하면 벨 눌러.”

-아, 알았다.

어린 융은 무지한 자의 특권인 ‘이리 선인에게 말 놓기’를 시전했다. 이리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산신령의 집에는 금방 도착했다. 도진의 예상대로 전원주택이었는데, 특이하게 도로가에 붙어 있었다. 산보다는 인간이 사는 마을과 더 가까웠다.

신령의 결계를 간단히 열고 들어가자 아담한 주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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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용마가 뛰어놀고 싶다는데요.”

“그래. 결계는 나가지 말고.”

허락하자마자 용마가 곧장 모습을 바꿨다. 강아지보다는 조금 크고 말보다는 조금 작은 망아지 정도의 사이즈였다.

끼힝!

용마는 주둥이로 도진과 이리를 한 번씩 부빈 후 주차장 탐방에 나섰다.

끼웅…….

도진의 셔츠 포켓에 숨은 암인이 아마도 눈이 있을 듯한 머리 부근만 빼꼼 내밀고 용마의 뒷모습을 좇았다. 호기심은 있는 듯했으나 따라가지는 않았다.

도진과 이리는 낮은 계단을 올라 닫힌 현관문 앞에 섰다.

“스승님 비밀번호 기억하세요? 아까 메모도 안 해 놓으시던데.”

“아.”

“그럴 줄 알고 제가 기억했어요. 완전 다행이죠. 완전 도움 되죠. 완전 멋진 제자죠.”

도진이 실컷 뻐기며 키패드를 터치했다. 이리는 사실 도술로 열려고 했으나 제자의 자랑을 위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양보했다.

탁월한 기억력을 뽐내며 안으로 들어온 도진이 오오, 하고 감탄했다. 덕유산 신령의 집은 평범한 사람이 사는 곳처럼 현대적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자동 센서가 내부의 불을 환하게 밝혔다. 공기청정기와 가습기를 구비한 거실. 스탠딩 에어컨과 널찍한 TV에 높낮이 조절 테이블. 주방에는 오븐과 에어프라이어도 있었다.

가전과 가구만 현대적인 게 아니었다.

TV 옆의 투명한 유리문 책장 안에 가득한 물건들을 보며 도진이 혀를 내둘렀다.

“아이돌 굿즈를 모으는 산신령이라니….”

유명한 남자 아이돌 그룹의 브로마이드, 응원봉, 앨범 등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대적이어도 너무 현대적이다…….

“‘샤먼’이네.”

이리가 옆에 다가와서 나직이 말하자 도진은 깜짝 놀랐다.

“스승님도 얘네를 아세요? TV는 일절 안 보시는 분이?”

“음악가가 이 아이들 팬이잖아. 저번에 음악가네 집에 갔을 때 포스터 붙어 있었지.”

“아, 맞네요….”

도진이 턱을 쓸었다.

“보대사(普大士) 님이랑 백액호(白額虎) 님네도 이 아이돌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요즘 신령들한테 인기가 많나 보네요.”

보대사는 영축산 산신령, 백액호는 남산 산신령이었다.

도진이 이 아이돌 그룹의 뭐가 그렇게 매력적인가 싶어 포스터를 살펴봤다. 가지각색 헤어스타일을 한 다섯 명은 다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냐 묻고 싶을 정도로 말랐다. 그냥 평범하게 아이돌스러운 외모인데 산신령들에겐 특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나 보다.

도진은 아이돌에게서 관심을 끊고 집 안을 구경했다.

“밥도 해 먹나 봐요. 냉장고에 반찬들 장난 아니네요. 완전 살림 꼼꼼하게 하는 집인데요?”

“도진아. 남의 집 함부로 뒤지지 마.”

“신령도 허락했는데…….”

“하지 마.”

“네.”

도진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이리의 말을 따랐다. 이리는 곧장 거실 테이블로 향했는데, 이유는 마지막 이물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신령이 잘 모셔다 놓은 마지막 이물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백지(白紙) 한 장이었다.

“이물들 다 꺼낼까요? 딴또리 오기 전에 끝내죠.”

“응.”

도진이 테이블에 끝이 움푹 파인 나무 막대와 다섯 조각으로 나눠진 조각을 꺼내 백지 옆에 뒀다.

이로써 세 개의 이물을 모두 모았다.

“이건 생긴 건 딱 주걱이네요.”

끼웅!

도진이 암인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나무 막대의 오목한 부분에 올렸다. 암인이 끼웅거리며 당황하는 사이 도진이 막대의 끄트머리를 눌렀다.

끼우우웅.

암인이 주욱 미끄러졌다. 도진은 킬킬 웃고는 반대쪽 끝을 눌렀다. 암인이 끼우우하며 다시 이쪽으로 내려왔다.

“시소인가. 어린 위아들용 장난감 시소 아니에요? 시소 아니면 주걱. 아니면 좀 손이 큰 사람용 숟가락.”

“비슷하네.”

“네? 진짜요? 진짜 시소예요?”

“아니. 주걱이나 숟가락이라고 보면 돼.”

이리는 도진에게 놀림당하며 끼우끼우 우는 암인을 잘 구출해 놓고 나무 막대를 들었다.

“은행나무 잎사귀와 바닷물 약간, 용의 침, 흙을 여기다가 잘 섞은 다음 먹으면 내가 이 순간 가장 먹고 싶은 맛을 느끼게 하는 이물이야.”

“음식… 이 된다는 뜻인가요?”

“누가 먹어도 맛있는 음식.”

그 재료가 침과 흙이라는 걸 안 이상 도진은 맛있게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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