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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목적지인 부천에 도착했다. 도진과 이리가 함께 차에서 내리는데 대여점용 핸드폰이 울렸다. 용마와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놀고 있던 암인이 깜짝 놀라며 시트에 떨어졌다.
“제가 받을게요. 다녀오세요.”
“응.”
이리는 도진에게 통화를 맡기고 차에서 내렸다.
평범한 사거리의 편의점에 어여쁜 청년 한 명이 들어서자 졸고 있던 알바생이 허읍, 숨까지 들이켜며 놀랐다.
이리는 잔챙이들이 좋아할 법한 과자와 초콜렛을 골라 카운터로 가져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3,200원입니다.”
알바생이 허둥지둥 가격을 얘기하고, 이리가 핸드폰을 건네 계산했다. 알바생은 이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느라 몇 번이나 바코드를 잘못 찍었다.
참 신비한 청년이었다. 눈이 너무나 맑아서 계속 쳐다보고 싶기도 했고, 저 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이돌인가? 이렇게 묘한 분위기를 가진 데다가 얼굴도 예쁘니 연예인은 맞겠지? 사인을 받아야 하나? 사진을 찍어도 될까?
“저기 혹시.”
그때 신비한 청년이 알바생에게 말을 걸었다. 알바생이 화들짝 놀라서 네, 대답했다. 눈이 마주치자 어째서인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최근 여기에서 주걱이 발견되지 않았나요?”
“네? 주걱? 주걱이요…?”
“끝부분이 주걱처럼 움푹 파인 30cm 정도 길이의 긴 막대예요. 색깔은 갈색이구요. 본 적 있죠?”
“네, 네, 갈색…….”
“지금 어디 있어요? 버리진 못했을 텐데.”
“네, 네? 어디… 버리진 못했…….”
직원은 앵무새처럼 이리의 말을 따라했다. 이리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직원은 이리를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리는 이 어린 인간의 어리버리한 모습이 더 귀엽고 예뻤다. 이리는 다시 상냥하게 물었다.
“최근에 바닥에 떨어진 주걱,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날 거예요. 그렇죠?”
“아…. 네.”
황홀감에 떠돌던 직원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거 비싸 보이고 버리기가 뭐해서 여기 서랍에 넣어 놨어요. 어디 있더라, 아, 여기요.”
직원이 왼쪽 세 번째 서랍에서 막대를 꺼내 주었다.
인간을 포함해 어떤 종족이든 이물을 발견하면, 그게 이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생겼어도 일단 어딘가에 모셔 둔다. 이 막대 또한 겉보기에는 쓰레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도 편의점 사장과 알바생들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 둔 것이다.
“손님 물건이었어요?”
“네. 챙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아뇨. 뭘…….”
직원은 분실물은 당연히 챙겨 놓는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리는 재차 고맙다고 인사한 후 편의점을 나왔다. 묘한 친근감에 연예인이라고 확신한 직원이 이리를 붙잡으려고 하자, 이리가 “전 신경 쓰지 말고 일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말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안 된다니까. 내일 오시라고요!”
도진은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미간이 잔뜩 구겨진 게 성질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다. 암인이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다가 헐레벌떡 이리의 그림자에 숨어들었다.
[::-_-::]
용마 또한 귀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이리는 초콜릿 포장을 벗겨서 도진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도진의 미간 주름이 조금 펴졌다.
도진의 통화는 이동하면서도 계속되었다.
“…네. 듣고 있고.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무조건 내일에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지금 대여점 가 봤자 문 닫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리는 걸까요, 씨발?”
새로운 이물, 주걱처럼 생긴 막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이리가 마침내 도진의 통화에 관심을 보였다.
“나 바꿔 줘.”
도진은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이 진상 고객을 절대로 선인께 넘길 수 없다는 듯 결연하게 고개를 저은 그가 다시 욕을 내뱉으려는 때였다.
“도진아. 그 위아 다섯 살이야.”
“…….”
도진이 핸드폰을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내가 다섯 살짜리 애한테 욕했다니…. 위아 나이는 도통 가늠이 가지 않는다. 도진은 자괴감에 이마를 감쌌다.
“안녕. 날 찾았어?”
-이리 선인!
굵디굵은 중년 아저씨의 목소리가 이리를 불렀다. 도진이 착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딴또리인데, 햇빛이 대여점에 있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게 필요한데, 자꾸 안 된다고 해서……!
“햇빛 말이지. 꼭 오늘이어야 한다면 밤 열두 시 이후에 가능한데 괜찮을까?”
-나는 지금, 지금 필요해서, 허물을 벗어야 해서, 안 그러면 죽는다고 그래서…….
“허물을 지금 당장 벗지 않으면 죽는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이만한 형들이랑 누나들이……!
이만한이라는 게 얼마만 한 크기인지는 통화상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이리는 이 딴또리라는 위아가 어떤 종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가족 없이 혼자 살아?”
-나는 혼자는 아니지만 가족은 없어서…….
“지금 지역이 어디야?”
-서울인데…….
“어차피 대여점에서는 못하고 산에서 해야 하니까 무주 덕유산으로 와. 오면 산신령이 안내해 줄 거야. 아, 혹시 날개 꺼내는 법… 알지?”
-나는 방법 배워서…! 나는 송골매보다 높게 날 수 있다!
“기특하네. 덕유산에서 보자.”
-고맙, 고맙다……!
전화를 끊고 이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룸미러로 빤히 쳐다보던 도진이 물었다.
“딴또리라는 위아는 처음 듣는데요. 어떤 위아예요?”
“딴또리는 이 애 이름이고, 종은 ‘융’이야.”
“아…. 융이었군요.”
융은 탈피 전에는 요물, 탈피 후에는 요괴로 분류된다. 태어나자마자 상공을 날 수 있는데, 대기권 밖을 날아다닐 시기가 되면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난다. 이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요물로 머물게 되며, 그때의 수명은 최대 5년이었다.
“보통 3년에서 5년 사이에 허물을 벗죠?”
“응. 딴또리는 고아라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 봐. 보다 못한 다른 위아가 허물 벗는 방법을 알려 준 거지.”
“지금 다섯 살이니 하루가 급하긴 하네요.”
“만나면 음식부터 배불리 먹이자. 내려오는 동안 날갯짓하느라 체력을 많이 소진할 테니까.”
“마침 무주가 도리뱅뱅이랑 어죽이 유명하니까 그거 먹이죠. 융, 생선도 먹어요?”
“응, 잘 먹어.”
웬만해서는 위아에게 마음 주지 않는 도진이었지만, 다섯 살짜리한테 욕했다는 게 양심에 찔려서 미리 무주의 맛집을 알아봤다.
‘어죽과 도리뱅뱅이, 방어 튀김을 시키고… 다슬기전이라는 것도 있군. 스승님이 좋아하시려나. 분위기 좋은 소담한 찻집은 없나?’
도진은 자연스럽게 ‘무주 데이트 코스’를 검색했다.
제자가 김칫국을 마시는 동안 이리는 무주 덕유산 산신령에게 전화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다시 걸어 주세요.
부재중이길래 간단히 메시지를 남겼다. 어린 융이 탈피를 하러 갈 테니 공간을 마련해 놓으라는 내용이었다.
‘덕유산 신령이 말수가 적은 아이였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수백 년 전이다. 여우, 노루, 삵, 송골매 등 동물 형태를 주로 하는 다른 산신령들과는 달리 덕유산 신령은 바위나 돌멩이, 말라죽은 나뭇가지 같은 형태를 취하고는 했다.
숫기 없고 소심한 성격이라 도진이 험악하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 얘기를 도진에게 하면 질투심으로 도리어 더 험악해질 것 같아서 참았다.
부천에서는 사람이 주워서 잘 모셔 놓은 덕에 쉽게 찾았지만, 괴산에서는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동진천에 살고 있던 수달이 이물을 주운 후 다섯 조각으로 분해해서 여기저기 숨겨 놓은 바람에 곳곳을 돌아다니며 추적해야 했다. 수달도 나름대로 소중히 보관한다고 그렇게 해 놓은 것이었다.
둘은 시간 절약을 위해 흩어져서 찾기로 했다. 이리가 꿀벌 테마 전시체험관에서 호기심 어린 어린이들과 부모님에게 둘러싸여 난처해할 때, 도진은 시장에서 어르신들에게 둘러싸여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조각 하나씩을 찾고 이리는 또 휴게소로, 도진은 삼신댕이산으로 건너갔다. 마지막 장소인 사랑산에서 만났을 때는 괴산에 온 지 세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아니, 왜 삼신댕이산에도 여기도 신령들이 없어요? 사랑산은 동네 뒷산도 아닌데.”
“그러게. 잠시 외출 중에 우리가 왔나 봐.”
“산신령들끼리 모임이라도 갖는 건지, 원. 아, 거기 나무뿌리 튀어나왔어요. 조심해요.”
“고마워.”
“제발 그냥 제가 안고 가면 안 돼요? 넘어지실까 봐 불안해요.”
“응, 안 돼.”
이리가 도진의 수작질을 냉정하게 잘라 내며 등산로를 걸었다.
삐익삐익.
뀽!
삥삥! 삥!
사랑산의 잔챙이들이 이리에게 끌려 자연히 모여들었다. 이리는 아까 편의점에서 산 과자와 초콜렛, 그리고 시장에서 따로 사온 묵과 떡을 아낌없이 나눠 줬다.
탱탱한 메밀묵에 달라붙어서 쪼아 먹던 쇠박새 요물이 도진의 어깨에 있던 암인을 발견하고는 파닥파닥 날아왔다.
삐잉?
끼웅…….
삥!
끼우웅…. 끼잉…….
요물이 부리로 콕콕 찌르며 호기심을 보였는데, 암인은 어찌나 겁이 많은지 오들오들 떨다가 낑낑 내려와 도진의 셔츠 앞주머니 속에 숨어 버렸다.
“야, 뭐하냐. 당장 안 나와?”
“그냥 놔두지, 왜.”
“스승님, 그렇게 오냐오냐 키우면 이 녀석은 영원히 성장할 수 없어요. 솔직히 암인이 이런 잔챙이들보다야 더 강하지 않아요?”
“이 아이들 그림자 정도는 충분히 붙잡을 수 있긴 하지.”
“그렇죠? 야, 이놈아. 들었냐. 네가 더 강한데 왜 네가 겁을 먹냐.”
도진이 셔츠 주머니를 흔들어 댔지만 잔챙이들만 삐이삐이 울면서 흩어질 뿐, 암인은 꽁꽁 숨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