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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멍청하고 외로운 퇴마사, 친구의 탈을 쓰고 퇴마사를 이용하는 나쁜 놈, 악신 배리모스’를 남의 집 서재에서 꺼낸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오늘 팔 하나를 잃은 이 나쁜 놈이 바로 연예인 이석진이고요. 대체 목적이 뭘까요? 훔쳐 간 도깨비방망이로 무언가를 저지른 건 분명해 보이는데.”
도진은 도깨비방망이 옆에 물음표를 적어 넣었다. 양아치스러운 포즈로 껄렁껄렁하게 걸터앉아 있던 이해자가 머리를 헝클였다.
“도깨비방망이는 기껏해야 둔갑 좀 하고, 금과 은을 생산하는 게 끝이잖아요. 대체 그걸로 뭘 했던 걸까요?”
“알 수 없지.”
“어차피 이석진이랑 이아진 사는 곳도 알겠다. 가서 물어보면 안 됩니까?”
“안 돼…. 그들은 죄의 대가를 치렀고 더는 내가 끼어들 수 없어.”
“그렇죠….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뭐 선인님의 무시무시한 경고를 들었으니 이제 케이스 종결이겠지만 당분간은 저희 선에서 지켜볼게요.”
이해자가 볼을 긁적였다.
반쪽짜리 퇴마사에 무당 하나, 평범한 인간 하나 그리고 악신 둘.
이리와 비교했을 때 너무 미약한 존재들이었다. 한 번 더 영물 이상의 존재에게 저주를 뿌리지 않는 이상 이리는 더는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런데 스승님, 너무 약하게 경고하신 거 아니에요? 낮고 서늘해서 존나 무섭긴 했는데, 그쪽에 잘 들렸을지 모르겠어요. 팔이 뚝 뽑혀져 나가서 완전 피바다에 다들 비명 지르고 개난리 났었을 텐데…….”
푸흐흣. 이해자의 비웃음에 도진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뭐야. 왜 또 비웃는데요.”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걱정하니까. 우리한테나 낮았지 저들에겐 다르게 들렸을걸.”
“그럼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왜 비웃어요…. 얼른 백업이나 해요, 집에 가게.”
도진이 퉁명스레 말하곤 턱을 괬다. 테이블 위에는 사역마였던 암인이 발돋움하고 머그컵에 매달려 물을 츕츕츕 마시고 있었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는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마셔 대는데 너무 조그맣다 보니까 물 높이가 줄 생각을 안 했다.
잠시 암인을 구경하던 도진의 시선은 자연스레 이리를 향했다. 이리는 도진이 끼적거린 노트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느끼고 눈꺼풀을 들었다.
“왜?”
“스승님.”
“응.”
“저도 반쯤 인간으로서 생각해 봤는데… 어쩌면 특별한 목적은 없고 못된 장난 정도일 수도 있겠어요.”
“못된 장난?”
“네. 아파트 위에서 벽돌 던지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비비탄총 쏘는 어린애들이랑 비슷하게 말이에요. 마침 벽돌과 비비탄총이 손에 들어왔고, 주위에 말리는 사람은 없고 대신 부추기는 악신만 존재하고, 저질러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니까 한번 해 본 거죠.”
“…….”
그러니까 결국….
‘할 수 있으니까 했다’라는 것이었다.
할 수 있어서 저주를 뿌렸고, 할 수 있어서 도깨비들을 속였고, 할 수 있어서 도깨비방망이를 빼앗았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제약이 없다는 뜻이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제약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쪽 세계에서 보자면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인간도 위아와 같은 제약을 받았다. 요괴가 인간을 골탕 먹이든, 인간이 요괴를 골탕 먹이든 공평하게 포도청에 잡혀갔다.
그러다 하계의 족속들이 중간계에서 물러나며 퇴마사도 사라지고, 그 후에는…….
부적을 잃어 버린 인간의 무기는 총과 칼뿐. 그런 무기는 위아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 반면 위아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인간의 가죽을 아무렇지 않게 벗길 수 있고, 강한 음기로 매혹해서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다. 심지어 위아란 존재들은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으니 인간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이에 진현계의 임금님은 인간을 ‘약자’로 규정하고, 위아와는 다른 느슨한 규율로 다스렸다.
그 결과가 이렇다.
중간계를 인간이 지배하게 되었다.
‘할 수 있으니까 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까?
이리는 방금 저들에게 제약을 만들었다.
한 번 더 저주를 뿌리면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과연 제약이 생겼으니 이제는 못된 장난을 저지르지 않을 것인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스승님, 어쩌면 저 퇴마사는 자기 저주 때문에 진짜로 위아들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건 아닐까요? 만약 남매와 악신에게 이용당한 거라면요. 진짜 장난이라고 아는 건지도 몰라요.”
“저주는 저주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못해.”
“뭐야. 그러면 퇴마사도 나쁜 놈이네요.”
도진은 ‘멍청하고 외로운’에 선을 긋고 ‘나쁜’이라고 고쳐 썼다. 참 쉬운 태세 변화였다.
“퇴마사의 팔도 확 뽑아 버리지 그랬어요.”
“퇴마사에게는 한쪽 팔 절단보다 이쪽이 가혹한 징벌이었을 거야. 사역마를 빼앗겼으니까.”
“아… 그렇구나.”
도진이 테이블 위를 내려다봤다.
물로 배를 채운 암인은 이미 실컷 모습을 보였으면서 이제는 머그컵 뒤에 숨었다. 빼꼼 얼굴을 내민 채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끼웅! 펄쩍 뛰었다. 갓 태어난 암인이 덜덜 떨면서 몸을 웅크렸다.
“왜 이렇게 겁이 많을까요?”
“우리가 무서운가 봐.”
“흠. 야.”
도진이 암인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너는 죄 없어. 너를 부린 주인이 잘못한 거 아니까 걱정하지 마라. 나는 성격이 못됐지만 이리 선인님은 아주 인자하신 분이거든.”
이목구비 없이 까맣기만 한 암인이 냄새를 맡듯 도진의 손가락 끄트머리에 얼굴을 대고 킁킁거렸다. 도진이 손가락으로 암인을 툭 밀치자 깜짝 놀라며 테이블 끝까지 허둥지둥 도망갔다.
“놀리지 마. 갓 태어난 애인데.”
상냥하고 다정한 선인으로 돌아온 이리가 도진을 타박하고는 암인에게 올라탈 손가락을 내려 주었다. 암인은 도진의 냄새를 맡으며 경계하던 것과는 반대로 얼른 이리의 손가락에 올라탔다.
“어쭈.”
도진의 목소리에 잠깐 멈칫했지만 꿋꿋이 영차영차 팔을 기어 올라가 어깨에서 멈췄다.
끼웅. 끼우우우웅.
암인이 몸을 주욱 늘리자 20cm 길이가 되었다.
끼웅, 끼웅.
이리의 얼굴에 몸을 비비며 어린 동물처럼 아양을 부리는 암인을 보고 도진은 기가 찼다.
“사역마 별거 없네요. 이렇게 쉽게 주인을 바꿔 버리다니.”
그때 백업을 마친 이해자가 노트북을 탁, 닫으며 말했다.
“이제 저 아이는 사역마도 아니지만, 사역마는 엄청나게 별거란다, 아가야. 이만한 크기의 사역마 하나 만드는 데에 필요한 주술 재료가 수천여 개고 어렵게 만들어진 만큼 주인을 배반하는 일도 없어.”
“주인을 배반한 케이스가 바로 여기 있는데요?”
“이건 예외로 쳐야 한다구. 이리 선인님이 개입하신 일은 무조건 예외야. 생각해 봐. 네가 수능을 보는 날, 하필 집이 무너졌어. 그래도 수능을 보러 가겠지?”
“네. 욕하면서 가야죠.”
“그런데 만약 가는 길에 외계인이 나타나 지구에 선전포고를 한다면?”
“…외계인이 나타나면 수능이고 뭐고.”
“바로 그거야.”
“…….”
“이리 선인님이 개입하면 퇴마사의 일생을 건 주술이고 뭐고… 라는 거지. 이해했어?”
“네.”
아주 명확한 설명이었다. 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자.”
“사역마도 데리고 가게요?”
“일단 대여점으로 데려가서 적당한 서식지를 찾아 줘야지.”
“네. 야, 들었냐. 그 대여점에 갈 거야. 엄청나지?”
도진이 암인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허공에서 흔들었다. 끼우우우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도진은 까만 인형 키링 같은 위아를 유심히 살폈다.
“근데 이 녀석은 이제 갈래가 뭐예요? 혼령은 아니고. 요물? 아, 잡귀인가.”
“잡귀 맞아. 오로석영지에 그려진 그림을 뿌리로 둔 잡귀.”
“아하….”
도진이 암인을 제 어깨에 내려놨다. 내심 이리에게 꼭 붙어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스승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에요. 저도 얼른 발끝이라도 따라가고 싶어요.”
“너도 대단해.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구나.”
“네? 뭘요?”
도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리는 스스로 알아내라는 듯 빙긋 미소 지었다. 답을 알려준 이는 야구방망이와 노트북을 옆에 낀 이해자였다.
“너 아까 금언령 걸려 있었잖아.”
“그랬죠.”
“선인님은 금언령 푼 적 없어.”
“…네?”
도진이 눈을 깜빡이며 제 입술을 더듬었다.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자유롭게 벌어져 있었다.
스승을 쳐다보니 조용히 웃고 있었다.
“…….”
비록 가볍게 걸었다지만 어쨌든 제 힘으로 이리의 금언령을 풀었다. 20년 동안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도진이 숨을 들이켜더니 흥분하며 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이 상황에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미친…! 저도 개쩔잖아요! 그 스승의 그 제자라더니. 와, 나 개쩔어! 우와아아.”
정말 날것 그대로의 감상이었다.
* * *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아직도 온몸에 일어난 전율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하하…. 피범벅이 된 신당에서 이석진은 허탈한 웃음만 내뱉었다.
“조, 조심. 우, 움직이면 안 돼.”
어수룩한 퇴마사가 왼쪽 어깨에 부적을 붙이며 지혈했다.
-으그, 으그그. 그으…….
세상 무서울 게 없는 것처럼 굴었던 뱀은 바닥에 납죽 엎드려 공포에 떨었고, 그 옆으로는 이아진이 핏기 없는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이석진은 피 묻은 오른손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저게 바로 그 이리 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