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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는 이마를 짚었다.
“가서 옷 제대로 입고 와….”
“스승님. 저 몸 되게 좋아졌죠. 예전처럼 말랑말랑하진 않지만 단단해요. 제 가슴 찔러 보실래요?”
근육 그리는 법을 알려주는 책에 예시로 들어갈 법한 견고하게 잘 짜여진 근육을 자랑하며 도진이 다가왔다.
이리는 뒤로 주춤 물러서다가 작업대와 부딪쳤다.
“나 진짜 네가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진아, 내가 네 기저귀를 갈았다.”
“그거 이미 백 번 말씀하셔서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침도 닦아 주고 콧물도 닦아 줬어.”
“네. 스승님이 이 손으로 제 앙증맞은 코를 쥐고 ‘흥, 해. 흥.’ 하셨죠. 그때 정말 좋았는데.”
어느새 다가온 도진이 이리의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작업대와 부담스러운 제자 사이에 갇힌 이리가 오른손 손목의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난감하고 난처할 때 나오는 이리의 버릇을 본 도진이 씨익 웃었다.
“스승님 그거 아세요?”
“뭘 알아.”
“스승님은 절 의식하고 계세요. 이건 완전 좋은 징조죠.”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가서 옷이나 입어. 곧 고객 올 거야.”
“실없다니요. 정말 절 꼬맹이로만 생각했으면 제가 상반신 누드든, 하반신 누드든 상관하셨겠어요? 이렇게 제 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내가 기저귀 갈아준 애가 다 커서 나한테 들이대면 보통은 외면하지 않을까.”
“외면이 아니라니까요. 의식하는 거라니까요. 저 보세요, 스승님.”
도진은 능글맞게 웃으며 이리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이리의 눈은 여전히 사람을 부끄럽게 할 정도로 맑았다. 그러나 도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므로 오히려 뻔뻔하게 눈맞춤을 해 왔다.
“저 잘생겼죠?”
“잘생겼는데…. 이 손 좀 놓고 말할래?”
도진은 아까 박철순에게서 조언을 얻었다. 철순은 딱히 조언이라는 생각은 안 했겠지만 도진에게는 시기적절한 조언이었다.
‘이상형이 따로 없는 사람이라면 나 같은 스타일로 이상형을 맞출 수 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도진은 결심했다.
내가 스승님께 이상형을 만들어 드려야겠다.
바로 나 같은 스타일로!
정말 멋진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얀 도화지는 색칠하는 대로 물드는 법이다. 도진은 이리를 가둔 채 오면서 연습한 가장 잘생겨 보이는 각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완전 잘생긴 제 턱선과 곧은 콧대를 보세요. 시원시원한 눈매와 진한 눈썹도. 그리고 제 어깨를 한번 만져 보세요.”
“…어깨는 뭐 하러 만지는데?”
“얼마나 단단한지 보시라고요. 팔뚝이랑 복근도 만져 보세요. 손가락 푹 찔러 보세요. 예전에야 말랑말랑했지 지금은 푹 찔러도 안 들어갑니다.”
“…….”
“저 가슴 근육 움직이는 거 보실래요? 이렇게. 꿀렁꿀렁.”
도진이 가슴을 꿀렁거리자 이리가 으, 하며 고개를 돌렸다.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설마 지금 징그러워한 거예요?”
“…….”
이리가 대답을 못 해도 도진은 상처받지 않았다.
“스승님, 스승님은 색욕도 느낀 적 없고 연애도 하신 적 없어서 모르시겠지만 지금 스승님의 그 감정! 결코 징그러운 감정 아닙니다. 거부감도 아니고요. 제가 섹시하고 멋있는데 나이 차이와 신분 차이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거라니까요. 절 믿으세요. 저는 섹시합니다. 김도진은 잘생기고 멋있어요. 스승님은 제게 끌립니다. 손가락으로 복근을 찌르고 싶습니다. 스승님은…….”
도진이 턱도 없는 세뇌를 시도했다.
이리는 자기 자랑과 세뇌를 줄줄 읊는 도진이 귀엽다가도, 시야에 가득 찬 완벽한 몸매 때문에 난처해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기절이라도 시킬까. 제자의 저돌적인 대쉬가 난감한 나머지 생각이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그때였다. 작업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핸드폰으로 향했다.
[학교수]
“웬만해서는 전화 잘 안 하는 애인데…….”
“타이밍 한번 더럽네요.”
도진이 쳇, 혀를 차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옷을 입을 생각은 없어?”
“좀만 더 어필해보고요.”
“곧 고객 오는데 내 제자가 노출증 환자라고 소문날까 봐 걱정이구나.”
이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화를 받았다. 속으로는 조금 안도하고 있었다.
“응, 학문가. 무슨 일이야?”
-선인님. 얼마 전에 부탁하신 이석진이랑 새보르미 연구회 건 때문에 전화 드렸는데요.
“응.”
-이 일이 생각보다 커질 것 같습니다. 이해자랑 함께 알아보니까…….
학문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얘기를 듣는 이리와 도진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졌다.
평화로운 일상에 돌이 던져지는 순간이었다.
8. 퇴마사
“지연 언니, 오늘도 못 만나요?”
-응. 미안.
“혹시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하세요?”
-그게 아니라…. 나 혼수상태였을 때 엄마랑 동생이 고생 많이 해서 당분간은 가족이랑 보내려구.
“아아…….”
민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연은 얼마 전 교통사고로 일주일이나 혼수상태에 있었다. 연구회 멤버들끼리 병원에 병문안도 갔었는데 깨어난 후로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러라고 해야지.
항상 이런 식이다.
언제는 ‘엄마는 날 이해해 주지 않는다.’, ‘동생이 언제 철들지 모르겠다.’ 뒷담화를 하더니 결국에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지금까지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안 그런 사람이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는 꼭 봐요.”
-응.
민아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저녁도 혼자다.
아버지는 4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밤늦게 가게를 닫는다. 형제자매 없이 외동인 민아는 오늘도 혼자였다.
민아는 의자에 늘어진 채 핸드폰의 메시지 목록을 죽죽 내리다가 ‘김도희’라는 이름에서 멈칫했다.
김도희는 잘사는 집안 막내딸로,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활발해서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특이한 면모도 갖췄는데, 얼마 전에는 민아에게 고백 편지를 대필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그 고백 편지 이후 어떻게 됐나 물어나 볼까, 싶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사적인 일인데 함부로 물어보는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민아는 컴퓨터를 켰다. 결국, 이거였다. 컴퓨터.
할 일이 없으면 늘 컴퓨터부터 켠다. 주말 내내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컴퓨터 앞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웹소설을 보거나…….
‘그 사이트’에 들어간다.
주소창에 익숙하게 주소를 쳤다. www.saebo…….
2년 전 퇴마 영상에서 시작된 모임, 새보르미 연구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 남자 배우인 이석진이 요즘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동호회라고 대놓고 언급하면서 한때 자주 인터넷에 관련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가장 많이 올라오는 종류는 언제 신규 회원을 받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석진의 많은 팬들이 가입하고 싶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연구회는 신규 회원은 받지 않았다.
2년 전, 한 채팅방에서 함께 실시간으로 퇴마 영상을 봤던 이들 16명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모임이 바로 이 새보르미 연구회였다.
연예인, 스트리머, 대학교수. 직장인, 자영업자, 학생 등 직업은 다양하나 퇴마 영상을 본 후로 오컬트와 미신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만은 모두가 같았다.
이 사이트에는 필명 게시판 하나와 익명 게시판 하나가 있다. 필명 게시판 쪽에는 일상 글이 활발하게 올라왔지만, 익명 게시판은 오히려 뜸한 편이었다. 다만 이쪽에는 가끔 굉장히 흥미로운 글을 올리는 익명이 한 명 있었다.
오늘도 글을 올리셨을까, 기대하며 게시판에 들어가자 new가 떠 있는 글이 하나 있었다.
[익명] 친구를 만드는 주술 (초보)
안녕하세요 ^^
익명님께서 요청하신 친구 만드는 주술을 초보용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진정한 친구를 갖고 싶다면 한번 사용해 보세요.
아래와 같이 부적을 만들어서 지갑에 넣고 다니면 됩니다.
아, 용지는 괴황지x 오로석영o
이미 몇 번 언급해서 다들 아시겠지만 요즘에는 괴황지는 사용하지 않아요.^^
1. 오로석영지를 아래와 같은 크기로 자른다.
2. 흑수에 넣는다
흑수는 사실상 구할 수 없으니 생수를 끓인 후 핏방울을 떨어뜨려서 적수로 만드세요.
본인 피 아니어도 ok 동물 피 ok
3. … …
가끔 이렇게 누군가가 주술 글을 올렸다. 워낙 괴담과 미신, 오컬트를 좋아하는 곳이라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주술의 종류는 대개 사소한 것들이었다. 여드름 사라지는 주술, 밥 먹어도 살 안 찌는 주술, 길을 걸을 때 신호등 초록불만 걸리는 주술…….
민아는 이 중에서 흥미로운 주술 하나를 어설프게 따라한 적도 있었다. 바로 여드름이 사라지는 주술이었다. 이마에 커다란 게 자라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홧김에 해 봤는데, 다음 날 자고 일어나니까 여드름이 사라져 있었다.
정말 그 주술 덕분일까. 오컬트에 환장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를 만드는 주술’
장난삼아 이런 주술은 없냐고 댓글을 남겼는데, 이 무당인지 그냥 관종인지 모를 사람이 정말로 글을 써 주었다.
친구라.
민아는 친구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가벼운 친구들이다. 결국엔 내가 아니라 가족에게 향할 스쳐 가는 인연.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진정한 친구를 갖고 싶다면 한번 사용해보세요.’
민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도한다고 손해 보지는 않는다.
진짜 주술이라면 효과를 보는 거고, 아니라면 그냥 시간만 버린 거고.
민아는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