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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손도 뻗지 않는 엄마를 보고 아기는 몸에서 힘을 뺐다. 풀어 달라고 울면서 떼쓰지도 않았다. 한 번도 부모님은 들어준 적이 없었던 탓이다. 기운 없이 축 처진 아기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룸미러를 통해 남편과 아내가 눈을 마주쳤다. 아기의 부모는 말없이 서로의 고통을 나눴다.
남편 김순호는 외국계 무역회사 CEO의 직계 가족이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아내 정은희 또한 병원장인 아버지와 대학교수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고생 없이 자란 둘은 서로를 만나 사랑을 키우고 결혼하여 마침내 결실을 이뤘다. 태어날 아기에게 붙여주려고 ‘김도진’이라는 멋진 이름도 지어 놨다.
그랬는데….
8일 전, 아기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8개월 전이 아니라 8일 전이었다.
태아 때는 평범하게 태동하며 평범하게 자랐던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간호사의 손가락을 부러뜨렸다.
아기에게 기이할 정도의 괴력이 있다는 게 알려지고 부부는 도망치듯 병원을 나와야만 했다. 다행히 정은희의 아버지가 믿을 만한 산후조리원을 알아봐 줬지만 그곳에서도 이틀도 채 쉬지 못했다. 아기는 괴력만을 지닌 게 아니라 성장 또한 괴상할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하루가 한 달인 것처럼 자랐다.
김순호도, 정은희도, 아기의 조부모도 모두 아기를 쓰다듬어 주거나 만져 주지 못했다. 기저귀를 갈다가 발에 차이면 바로 뼈가 부러지고, 머리채가 잡히면 두피에서 뜯기는 걸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아기는 너무 예뻤다.
빨리 자라난 만큼 말도 빨리 배워 엄마, 아빠! 하며 빙긋빙긋 웃는 아기는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예쁜데 품에 한번 안아 볼 수도 없는 게…. 이렇게 예쁜데 품에 한번 안기지도 못하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졌다.
어쩌면 이 슬픔이 오늘부로 끝이 날지도 모른다. 정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부르튼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하지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를 보는 가슴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여주의 봉미산 입구였다. 불빛이 전혀 없는 어두컴컴한 밤이라 차에서 내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은희는 곧바로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김순호 또한 손전등을 들고 내렸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마중 나와 있을 거라고 했어요. 우리가 일찍 도착해서 아직 안 왔나 봐요.”
정은희는 초조하게 주위를 살폈고, 김순호는 유모차를 꺼냈다.
이제 아기를 유모차에 앉혀야 하는데 어깨까지 내려간 담요가 신경 쓰였다. 김순호는 이미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아빠아.”
아기가 제 아빠를 보고서는 반갑다고 작게 불렀다. 김순호는 그래, 작게 답하고는 심호흡했다.
아기에게 손을 뻗자 아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의 아기라면 안아 주려는 것을 알았을 텐데, 한 번도 안긴 적이 없으니 그저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김순호는 떨리는 두 팔로 아기를 들어다 바로 유모차에 앉혔다. 아버지의 손이 떠나가자 아기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조차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다. 정은희가 김순호에게 다가왔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위로했다.
적막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무의식적으로 발을 떨던 김순호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약속한 시각에서 30분이 지났습니다.”
“그러게요…. 늦으시네요.”
“전화라도 해볼까요?”
“오미선녀님 지금 외국에 나가 계실 텐데…….”
“우리랑 만날 사람 연락처는 안 알려 주셨죠?”
“네. 함부로 알려 줄 수가 없다고 했어요.”
“이런…….”
한밤중, 산기슭에 덩그러니 떨어져서 연락도 안 되는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둘은 어쩔 수 없이 선녀님께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김순호는 아내에게 외투를 벗어 주고 핸드폰 플래시를 제일 밝게 올렸다.
“여기 유명한 사찰 있잖아요. 그곳에 가 보죠.”
“안 돼요. 입구에서부터 도깨비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와야만 한댔어요. 인간의 길은 안 된다고.”
“…….”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요.”
도깨비니, 인간의 길이니 뭐니. 김순호는 답답하고 암담해졌다.
이런 종류는 전혀 믿지 않고 살아왔는데.
어떤 기업가들은 무당과 미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김순호와 그의 가족들은 이쪽에는 전혀 발도 들이지 않았다. 조부모도 의사와 학자였던 뼈대 깊은 혈통의 정은희 또한 그러했는데, 이제는 ‘도깨비’라는 허무맹랑한 단어를 입에서 내뱉는 처지가 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우리의 아기를 구하려면.
도진이를 구하려면.
이 귀여운 아기를 한 번이라도 품에 안아 보려면.
“그럼 차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낫겠군요.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데 내내 밖에서 기다리기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위험합니다.”
“네…. 그렇게 해요.”
“저거…….”
유모차를 끌고 차로 돌아가려는 둘을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저거!”
밝은 목소리로 외친 아기는 어딘가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부부가 그 시선을 손전등으로 비쳤는데, 그곳엔 나무 기둥뿐 아무것도 없었다.
“파래. 파랑색! 엄마, 파랑색.”
“파란색…?”
“파란 불이야. 엄마, 아빠. 파란 불.”
파란 불이라면.
정은희가 떨리는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봤다.
아기가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온갖 무당을 만나며 돌아다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오미선녀님은 안내자가 도깨비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진이가 말하는 파란 불이 ‘도깨비’불은 아닐까?
둘은 그 자리에서 잠시 상의했다. 아이가 보고 있는 그것이 안내자가 아닌가 하는 마음과, 확실하지 않은데 따라가도 되는가, 아이를 꾀려는 악한 귀신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 혼란스러웠다. 그들의 눈엔 보이지 않는 것을 섣불리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동안 도진은 처음 보는 이상한 푸른 불을 감상했다.
이맘때쯤 아기라면 두려워해야 마땅한 괴기스러운 불빛에도 아기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감정이 결여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도진에게는 저 처음 보는 푸른 불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저 불뿐만이 아니라 가끔 나타나는 모든 괴기스러운 것들이 무섭지도 겁나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것들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부는 도깨비불로 추정되는 불빛을 따라 걷기로 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도진의 반응을 살피며 따라 걷던 그들은 옳은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유모차만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좁은 산길을 지나고 나니, 그곳엔 낙원이 펼쳐져 있었다.
환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 노랗고 하얀 꽃이 가득 핀 들판.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평범한 인간 두 사람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작은 나비들이 사방을 날아다니고 향긋한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평화로운 곳이었다. 들판 한가운데에 넓고 높은 한옥 기와집이 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오미선녀님이 얘기한 ‘신령님’이 살고 있는 곳인 듯했다. 바로 둘의 목적지였다.
김순호는 이 순간이 어이없고 믿기지 않았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지 생시인지…….”
“저기로 들어가야겠죠?”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김순호가 앞장섰다.
도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와아, 우아, 감탄하며 꺄르르 웃는 게 영락없는 8개월 아기였다.
한옥 기와집은 대문이 열려 있었다. 마당은 항아리가 너무 많은 면적을 차지해서인지 생각보다 아담하게 느껴졌다.
“저기에! 저기 머 있어!”
도진이 정면의 사랑채를 바라보며 반응했다. 김순호가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문이 드르륵 열렸다.
안쪽에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백발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아니, 한복은 여성 한복이었는데 남자인 것 같기도 하고. 성별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들어와 앉거라.”
백발인은 많이 봐도 20대 후반으로 보였으나 부부는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고 그 지시에 따랐다.
8일간 아들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곳을 찾았다. 이 짧은 기간에 무당부터 바티칸 엑소시스트, 저명한 뇌과학자까지 만나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누구도 아이의 기이한 체질에 딱 잘라 정답을 말하지 못했다.
그러다 바로 엊그제, 정재계 큰손들의 일을 봐주고 있다는 무당인 지리산오미선녀를 만났다. 부부가 찾아간 게 아니라 무당이 먼저 접촉해 왔다. 다른 무당과 마찬가지로 화장을 진하게 한 오미선녀는 아기는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다짜고짜 부적을 건넸다.
‘밧줄에 이 부적을 붙여서 묶으면 아기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오. 내일 밤 열 시까지 여주 봉미산에 찾아가시오. 그곳에서 안내자를 따라가면 신령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오.’
‘신령님이요?’
‘그분은 우리 같은 일개 인간 무당이 아니오. 실로 영험한 신령님이시니 예의 바르게 행동하시오.’
이 백발인이 바로 그 영험한 신령님인 것이다.
도깨비불을 따라오자 밤이 낮이 되고, 산이 들이 되었다. 직접 목격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부부는 유모차를 방에 들인 후 신령의 앞에 잠자코 무릎 꿇고 앉았다.
신령은 낮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 툭 치며 도진을 바라봤다. 도진이 뭐라 옹알거리며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밧줄을 풀어 내지는 못했다.
“부적이 드는 모양이구나.”
“아, 예……. 혹시 선생님이 이 부적을 만든 분이십니까?”
“아무리 나라도 장사의 괴력을 억제할 부적을 만들지는 못한다.”
“장사…? 그럼 누가 이 부적을 만드신 겁니까?”
“기다리거라. 부적을 만든 분이 오고 계시니.”
“그분도 신령님이신가요?”
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들은 듯 신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분은 우리와는 빗댈 수 없는 까마득히 신성한 분이시다. 너희는 너무나 무지하니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게 낫겠다.”
혼이 난 부부는 혹시라도 상대의 기분을 거슬리게 할까 봐 입을 꾹 닫고 기다렸다. 도진을 ‘정상’으로 만들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조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