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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38화 (3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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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생각나네요. 이해자 님 남자친구가 저 보고 질투한 것만 생각하면 얼탱이가 없어서….”

이해자에게는 오래 사귄 연인이 있다. 퇴마 영상 때문에 도진과 함께 넷이서 잠깐 만났을 때 그 연인이 도진을 보고 혼자 경쟁의식 느끼며 경계했다. 당시에도 도진은 몸이 완성되어 있었기에 사복을 입으면 절대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때를 떠올린 이리가 옅게 웃었다. 이해자랑 도진은 이해자의 연인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어처구니없다 못해 서로 메스꺼워 하며 구역질을 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한동안 그 장면을 떠올리며 미소 짓고는 했다.

“이해자는 아직도 그 사람이랑 사귀는 중이야. 그 사람이 너한테 되게 미안해했대.”

“사과 전해 듣긴 했어요. 근데 꽤 오래 사귀네요. 몇 년째죠?”

“30년인가.”

“신령들은 본래 한번 연애하면 오래 해요?”

“인간이 서로 다르듯 신령들도 서로 다르지. 학문가는 금방 헤어지더라고.”

“스승님은요?”

능숙하게 조립해 나가던 손이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멈췄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질문을 던진 도진이 이리에게서 이물을 가져가 자기가 조립하면서 힐끗힐끗했다.

“스승님도 연애하셨을 거잖아요. 한번 하면 오래 하시는 스타일이에요?”

“…….”

“저 과거 가지고 질투하는 쪼잔한 사람 아니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정인이 없었을 거란 생각은 안 하거든요.”

이리가 내적 한숨을 쉬며 도진을 바라봤다. 도진은 무조건 대답은 들어야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리가 그답지 않게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말했다.

“도진아. 나는….”

“네.”

“연애를 해 본 적 없어.”

“…….”

도진의 두 눈과 입이 더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커졌다.

“연애를….”

“응, 한 번도 안 했어.”

“…….”

“…….”

“선인은 거짓말을 못… 하잖아요?”

“응. 못하지….”

“……미친.”

도진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손에 든 것을 내동댕이쳤다. 이물이 와장창 다시 분해되었다. 도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내가 처음이라니!”

뭐? 이리는 당황했다. 도진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외쳤다.

“제가 처음이었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뭐가 처음인데. 정신 차려….”

“제가 처음…!”

“도진아. 우리는 연애 중이 아니고, 너는 내 제자란다. 나는 네 기저귀도…….”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곧 제가 첫 연애 상대가 될 거잖아요!”

도진이 혼자 단정 짓고 혼자 들떴다.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스승님! 저도 스승님이 처음이에요.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오로지 스승님만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스승님은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고 절 기다려 주시다니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감사 드려요, 스승님!”

도진이 이리의 양손을 덥석 붙잡았다. 두 손이 뜨거웠다. 도진은 쉽게 흥분하고, 그에 따라 이렇게 몸도 쉽게 뜨거워졌다.

이리가 낮게 탄식했다.

누가 누굴 기다려…. 그리고 네가 왜, 뭐가 고마운데….

흥분한 장사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라 그냥 도진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진은 그 뒤로도 흥분한 말처럼 콧김을 뿜으며 날뛰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거대한 구렁이 고객이 초인종을 누른 후에야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제가 알을 낳을 시기가 되어서요….”

거대한 구렁이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도진은 차를 리필하면서 몸서리가 쳐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잘 참아 냈다. 요물도, 요괴도 아니고 무려 영물이기 때문에 도진도 함부로 건방을 떨지 못했다.

“선인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구렁댕이는 알을 낳을 때는 꼭 짝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제가 사는 지역에는 짝지을 구렁댕이가 하나도 없지 뭐예요. 이러다 알을 못 낳게 생겼지 뭐예요.”

“신령한테 확인해 봤어?”

“네에. 산신령님도 소개해줄 구렁댕이 없나 하고 근처 산 다 뒤적거렸는데 제가 원하는 짝은 발견하지 못하셨다지 뭐예요.”

그러니까 결국, 짝을 소개해 달라고 온 것이다.

이물 관련이 아닌 이런 일은 복지관 소관인데 위아들은 그냥 무조건 이리 선인만 찾는 경향이 있다.

복지관이란 포도청, 의원, 출입국장과 마찬가지로 혼령이 운영하는 시설을 말한다. 주업무는 인간계에서 살아가는 위아들의 편리를 돕는 것. 그러나 생긴 지도 얼마 안 되었고, 홍보도 부족해서 이런 시설이 존재한다는 걸 아직 많은 위아들이 모르고 있다. 이 구렁댕이처럼 말이다.

‘역시 대여점이 아니라 종합 서비스 센터라고 바꿔야 돼.’

혀를 찬 도진은 구렁댕이가 직접 기입한 의뢰서를 확인했다.

이름: 실버 제인

종족: 구렁댕이

서식지: 서울 강남구 대모산

연락처: 010-0000-0000

내용: 함께 알을 낳을 짝을 찾고 싶지 뭐예요

강남구면 혼령이나 잡귀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영물은 드문 곳이었다. 특히 구렁댕이는 한반도 전체로도 희귀하니 짝을 만나기 어렵긴 할 터였다.

‘그런데 이름이 실버 제인이야?’

구렁이 표피가 은색이긴 한데…. 본인이 지었을지 궁금해졌다.

“혹시 이름 본인이 지으셨습니까?”

늘 그렇듯 도진은 참지 않고 물어봤다.

구렁댕이는 그 질문이 기쁜 듯 눈꼬리를 휘며 끄덕였다.

“네, 본래 이름이 촌스러워서 제가 지었지 뭐예요. 현대를 살아가려면 현대에 발을 맞춰야 하지 않겠어요?”

“훌륭한 태도이십니다.”

“그쪽은 인간인가요?”

“네. 이리 스승님의 하나뿐인-.”

이때 이리는 방금 전 일 때문에 혹시 도진이 ‘연인’이라고 소개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제자입니다.”

다행히 도진은 이리를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이리 선인을 잘 보필해 주세요. 언젠가 제 아이들도 선인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 뭐예요.”

도진은 이리의 뒤를 새끼 구렁이들이 바글바글 따라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윽고, 영물이 눈치챌까 봐 얼른 차를 마시며 소름을 가라앉혔다.

“알을 낳는 시기는 언제쯤으로 보고 있어?”

“이번 주 금요일이에요. 의도하진 않았는데 블렉데이지 뭐예요. 저는 블랙데이를 즐기고 싶지 않지 뭐예요.”

“블랙데이가 뭐야?”

이리가 고개를 갸웃하자 도진이 웃었다.

“솔로들이 짜장면 먹는 날이요. 우리랑은 상관없는-.”

도진이 입술을 꾹 닫았다. 본의로 닥친 건 아니었다.

제자에게 금언령을 걸어 버린 이리가 여상한 태도로 말했다.

“알았어. 한번 찾아볼게. 혹시 원하는 스타일이 있는지 말해 줘. 도진아, 메모 좀.”

“…….”

도진이 말없이 의뢰서에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구렁댕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원하는 바를 하나도 남김없이 설명했다.

“수컷, 암컷 상관없는데 인간형 둔갑을 좋아하는 구렁댕이면 좋겠어요. 평소에 인간 문물에 관심이 많으면 좋겠구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저는 영어를 모르는 구렁댕이는 별로지 뭐예요. 유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알파벳은 알았으면 좋겠지 뭐예요. 제 이름 정도만 읽을 줄 알면 되어요. 오랜 시간 간직해 온 이상형이 바로 영자 신문 읽는 구렁댕이지 뭐예요.”

도진은 받아 적으면서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리는 다정하게 끄덕였다.

“응. 그리고 또?”

“제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 별로 까다롭지 않은데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심성은 선인님이 소개해 준 구렁댕이라면 그저 믿을 뿐이지 뭐예요.”

“좋은 구렁댕이를 찾도록 노력할게. 만약 짝이 이어지면 이사 갈 의향이 있어?”

지금까지 바로바로 대답하던 구렁댕이가 고민에 빠졌다. 도마뱀 팔 같은 게 쭉 뻗어 나와 턱을 괬다.

“그 구렁댕이가 정말 마음에 든다면 이사 갈 수도 있어요. 지금 제가 사는 곳은 알을 낳고 키우기에 부적합하지 뭐예요.”

“알았어. 곧 연락 줄게.”

“네, 정말 감사해요. 이리 선인님.”

구렁댕이가 의자를 끼익 밀고 일어났다. 이리와 도진도 따라 일어났다. 이때쯤 함구령이 풀린 도진은 실버 제인의 정성들여 예쁘게 입은 원피스와 고운 자태를 보며 말했다.

“뭐. 사진 같은 건 안 찍어요?”

“사진?”

“사진이요?”

이리와 구렁댕이가 동시에 물었다.

“한 마디로 지금 소개팅 혹은 선을 봐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럼 상대 사진이 필수죠. 적어도 인간 사회에서는 그렇거든요.”

“정말 중요하지 뭐예요. 맞는 말씀이지 뭐예요.”

실버 제인이 도진의 말에 강력하게 공감했다. 영물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고는 팔을 쭉 뻗어 셀카를 찍었다. 한두 번 찍은 게 아닌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선인님, 제 셀카는 메신저로 보내 드릴게요.”

“어…. 그렇게 해.”

“혹시 외양적으로 바라는 부분 있습니까? 키가 3m는 넘어야 한다든가, 표피가 은색이어야 한다든가. 외모도 인간 사회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문제라서요.”

제인은 도진의 질문이 무척 흥미로운 듯 세로 동공을 좁히고 혀를 날름거렸다.

“생김새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껍질은 황색이 아니어야 하지 뭐예요. 우리 알들 지키려면 그래도 몸체는 컸으면 좋겠구요. 제게 소개해 줄 상대 구렁댕이의 사진을 미리 보내 주셨으면 좋겠지 뭐예요.”

안 그래도 까다로운 이상형에 생김새까지 하나 더 추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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