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37화 (3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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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스승님 진짜…. 미치셨네요. 능력 구속구. 만화랑 소설에서만 보던 걸 현실에서…. 개멋있다 진짜…….”

이리는 다소 거친 칭송을 들으며 수만 가닥이 모인 실타래 중 한 가닥을 골라냈다.

가장 어두운 빛깔의 실이 이리의 손끝에 달려 나와 주욱 늘어났다.

“도진아. 이게 이물과 관련된 기억이야.”

“하. 진짜 개쩔어요. 그런데 왜 능력 구속구를 사용하시는 거예요? 왕이 스승님 견제한다고 차고 다니라고 명령했어요?”

도진은 벌써 기억 타래에는 흥미를 잃은 듯했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실을 끝까지 뽑아낸 이리는 다시 팔찌를 착용했다.

“그게 아니라 인간의 몸을 유지하려면 능력을 봉인하는 편이 편해서 차고 다니는 거야. 왕이 날 왜 견제해…….”

“아, 그런 거구나….”

바닷속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려면 아가미가 있는 게 편하듯이, 인간계에서 오래 지내려면 인간 신체로 사는 게 편하다. 그렇기에 인간계에서 지내야 하는 이리는 인간 신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리가 다른 선인과 달리 피로나 체력적 한계도 느끼는 이유도 이 신체 때문이었다.

물론 완전히 인간과 같지 않으므로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매일 여섯 시간 이상씩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 다만 하루 두어 시간 정도는 반드시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로 꽤 큰 패널티였다.

“수면 말고 이런 패널티도 있는 줄은 또 몰랐네요. 스승님 그동안 너무 강하셔서 제한 상태라고는 전혀….”

“그만해.”

이리는 머쓱하게 일어났다. 손가락에는 너무 가늘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 실 한 올을 걸친 채였다. 보기와는 다르게 이물에 대한 탐욕으로 묵직하기 때문에 바람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 실 네가 없애 볼래?”

“제가요? 이렇게 연약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과장되게 엄살 부리는 도진을 이리는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럼 내가 하고.”

“아, 스승님. 제가 할게요. 주세요.”

도진이 잽싸게 실을 가져갔다. 이리가 충고했다.

“불태우되, 재도 남겨서는 안 돼.”

“‘신불’을 써야 한단 말이죠. 알겠습니다.”

신불은 도술 중에서도 막대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고위 도술인데, 도진이 요 근래 배운 것이었다.

도진은 검지와 중지를 제외한 손가락은 접은 상태로 실을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실을 가리킨 채 집중하자 손가락 끝에서부터 푸른 불이 피어올랐다. 바로 ‘신불’, 신물도 태울 수 있다는 강력한 불이었다.

처음에는 촛불보다 작았던 것이 점점 커지고 개수도 늘어나 나중에는 불고양이만한 푸른 불덩어리들이 도진의 주위를 감쌌다. 총 열두 개의 푸른 불이 하나로 뭉치더니 유재호의 기억의 실을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재가 남아서는 안 되기에 도진은 끝까지 집중을 잃지 않았다.

화르륵, 하고 순식간에 타올랐던 불이 꺼졌을 때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리가 나풀거리는 재가 있는지 확인했으나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잘했어. 성공이야.”

“그럼 칭찬의 의미로 뽀뽀해 주실래요?”

이리는 대답 없이 실타래를 다시 유재호 안에 집어넣었다. 유재호의 몸이 오색찬란하게 빛이 났다.

“스승님, 방금 그 타래에 기억이랑 감정이 함께 있다고 하셨죠?”

“응.”

“그럼 유재호의 감정 중에 ‘이물에 대한 탐욕’은 남아 있는 거잖아요. 그 실도 빼야 하지 않아요?”

“감정은 건드리지 못해. 그건 규율에 어긋나거든. 기억이 사라졌으니 어차피 그 감정이 다시 눈 뜰 일도 없을 거야. 이제 곧 일어날 테니 우리는 모습을 숨기고 확인하자.”

“네.”

도진이 재호를 잘 앉혔다. 불고양이가 애앵, 애앵 재호에게 몇 마디 힐난했다.

“너도 이리 와, 새끼야.”

도진이 불고양이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셋이 모습을 숨기고 얼마 되지 않아 재호가 눈을 떴다.

“…뭐야. 여기가 어디, 아.”

재호는 손에 쥔 예쁜 편지를 보고 ‘그래. 나 고백받았지.’하고 떠올렸다. 상대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요즘 밤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가….

얼마 전 쪽지 시험에서 운 좋게 아는 문제들만 나와 높은 점수를 받은 후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이제 고3이니까 역시 고백은 거절해야겠지.’

재호는 씁쓸했지만 그렇게 결심했다. 거절 멘트를 생각하던 재호가 문득 제 손목을 봤다. 아무것도 차고 있지 않은 빈 손목.

“…어?”

재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의성어를 내뱉자 도진은 순간 불안했다. 뒤이어 재호가 중얼거렸다.

“시계 차는 거 깜빡했네. 지금 몇 분이지.”

도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이 불안하게 하고 있어.”

“성공했다고 했잖아. 이제 가자.”

“네!”

팔찌에 대한 기억이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가뿐해진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불고양이도 리리를 보기 위해 희희낙락 달려갔다.

도무지 오지 않는 편지의 주인을 기다리며 좌절에 빠진 고3 학생의 기분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7. 이상형

이리 만물 대여점도 엄연히 한국의 전기와 가스, 수도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꼬박꼬박 세금을 냈다. 이번 달에는 다 합해서 42만 원이 나왔다. 실제 부지를 생각하면 훨씬 많아야 하나 이물의 도움으로 상당히 절약했다.

도진은 이리가 안쪽 작업실에 들어간 사이 고지서들을 처리했다. 전액 이리의 계좌가 아니라 제 계좌에서 이체했다.

여기에 0이 하나 더 붙어 있어도 가볍게 지불할 수 있다. 워낙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지라 어렸을 때부터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스무 살이지만 아직도 부모님은 어마어마한 용돈을 주고 계시고…….

이리가 주는 월급도 상당했다. 지금까지 월급날이 두 번 지나갔는데 3월에는 8백만 원, 4월에는 천만 원을 받았다. 전부 현금이라 세금도 떼지 않고 말이다.

도진은 미성년자일 때는 그냥 막연하게 이리 선인은 부자구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선인은 현금을 어마어마하게 가지고 있었다. 주술로 만든 가짜 돈이 아니라 진짜 돈.

예전에 도진이 물은 적이 있었다.

‘선인님, 이 많은 현금은 다 어디서 나셨어요?’

‘아. 보부상 통해서 다이아몬드를 팔았어.’

‘다이아몬드는 어디서 나서요?’

‘해왕성에서.’

‘…….’

그때쯤 도진은 이리의 능력을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아, 세금 내는 거야?”

마침 안쪽 작업실에서 나온 이리가 널브러진 고지서들을 보고 다가왔다.

“그거 필요하지? 서랍에 있어. 그거 써…….”

“그거요? 현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거. 계좌이체 할 때 필요한 거. TOP…….”

“OTP 말이죠.”

선인으로서의 능력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데 현대 문물과 관련에서는 어린애처럼 순수할 때가 있다.

“존나 귀여워.”

다 들리게 중얼거린 도진이 이마를 작업대에 쿵쿵 박았다. 대여점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리는 멋쩍게 옆에 앉았다.

“OTP 꺼내 줄까?”

“아뇨. 이미 제가 제 돈으로 입금했어요.”

“그럼 다음 달 월급에 세금 포함해서 줄게.”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직원이 아니라 스승님의 하나뿐인 가족이잖아요.”

이마가 벌겋게 된 도진이 히죽히죽 웃으며 이리에게 은근슬쩍 어깨를 붙여 왔다. 이 ‘가족’이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지 이리도 알기에 그저 고개를 돌리고 할 일을 했다.

대여 나갔다가 반납된 이물을 분해한 후 깨끗이 씻고 지금은 다시 조립하는 중이었는데, 무려 84조각이었다.

“스승님, 제가 없을 때는 어떻게 계좌이체를 하셨어요?”

“이해자를 통해서 했어.”

“아하. 하긴 그 신령님이 요즘 세상엔 좀 치트키죠.”

신령들은 대부분 컴퓨터와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반면, 이해자는 컴퓨터에 빠삭할 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속으로 자유롭게 침투할 수도 있었다. 이 능력을 이용해 이리를 포함하여 위아들에게 주민번호도 만들어 주고, 핸드폰도 만들어 주고 한다.

오직 이해자만이 인터넷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뿌리가 혼령이기 때문이었다. 저승사자와 퇴마사를 피해 방황하던 혼령이 덕을 쌓아 잡신이 되었고, 그 잡신이 우연히 이리 선인의 일을 한번 도우면서 신령이 되었다. 그래서 이해자는 이리를 은인으로 여겼다.

“앞으로는 어려운 건 다 저한테 맡기세요. 저는 세금 자동이체 신청도 해 드릴 수 있고, 고지서도 이메일 발급할 수 있어요. 다른 은행에 공동인증서 등록해 드릴 수도 있고요. 어때요. 말만 들어도 완전 어려워 보이죠. 하지만 저는 해 드릴 수 있다고요. 엄청나죠? 대단하죠? 멋있죠?”

도진이 눈을 부라리며 높은 콧대를 더 높게 치켜들었다. 이리는 틈만 나면 자기 어필을 하는 제자가 귀여워서 짧게 웃었다. 자동이체 신청, 이메일 발급, 공동인증서 등록. 사실 이리에게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이긴 했다.

“그래. 멋있어. 네 덕분에 최근엔 이해자한테 뭐 부탁한 적도 없어. 퇴마 영상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구나.”

2년 전의 퇴마 영상 또한 이해자를 통해서 인터넷에 올렸다. 신령의 손길이 닿았으니 사람들이 글 게시자에 대해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한 게 당연했다. 개개인이 저장한 영상이나 캡쳐 화면 또한 어디에도 업로드하지 않았더라도 이해자가 일일이 다 삭제했다.

인터넷에서만은 이리와 비슷한 절대적인 권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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