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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본래 도사였으니까. 초대를 제외하고 2대와 3대는 모두 인간 출신이야.”
“하계의 찰마 공주도 인간 출신 선인이었고요.”
“응. 정말 인간이 삼계를 모두 지배하는구나.”
“그렇네요.”
도진은 뿌듯해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리가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에서 다리를 쭉 폈다.
“어린 학생들이 이 불편한 의자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건 굉장한 일이야. 이렇게 교육에 열심이니까…. 노력하는 만큼 얻는 법이지.”
스승님은 한 종족이 세상을 지배하는 게 껄끄럽지 않으신 걸까. 하긴, 도진이 생각하기에 이리는 인간이 아니라 여우 요괴나 도깨비가 세상을 지배해도 ‘굉장한 일이야.’ 하며 넘길 것 같았다.
이리는 누가 지배하든 세계가 평화롭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이물을 돌려받기가 쉽지 않아 문제구나. 예전에는 누가 이물을 우연히 주우면 당신이 주운 건 이물이니 돌려 달라고 하면 끝이었거든. 요즘엔 기억도 없애야 하고 힘드네.”
도진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일이 옛날에도 있었어요?”
“종종 일어나곤 했어.”
이리는 흐릿한 웃음을 지으며 머나먼 과거를 떠올렸다.
“‘조호롱박’이나 ‘금척’ 등 전부 인간의 손에 들어가서 설화로도 남은 이물이야.”
“미친. 둘 다 엄청난 이물이잖아요.”
조호롱박은 호롱박 형태의 이물로, 쌀 한 톨을 넣으면 바가지 가득 쌀이 불어난다. 위아들이 식량을 비축할 때 사용하는 이물이었다. 금척은 길이를 재는 금색의 자로, 이 자로 죽어 가는 생명의 길이를 재면 병이 낫고 금세 살아난다. 주로 ‘의원’에서 대여해 가는데 지금도 그곳에 있었다.
도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 엄청난 물건들을 그냥 달라고 했더니 줬다고요? 스승님의 그 신묘한 능력 사용 안 하고요?”
“응.”
“말도 안 돼. 아무리 인간이 못 배웠어도 소유욕은 가졌을 텐데요. 순순히 줬을 리가 없어요. 대신 대가를 준 거죠?”
“진짜야. 조호롱박을 주운 이는 이미 이것으로 재산이 풍족해졌으니 만족한다며 돌려줬고, 금척을 주운 이는 주위에서 신선이냐고 떠받드는 바람에 부담스러운 차였다며 돌려줬어.”
“와…. 선인이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걸 몰랐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예요.”
현대의 탐욕에 익숙해진 도진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순박한 시대였네요.”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온 이리는 딱히 순박한 시대라는 표현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기근이 닥치면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기도 했던 시대였으므로…….
불과 수백 년 전인데 너무 많은 게 달라졌다.
인간 세계는 언제나 변화하고 변화해 왔지만, 최근 백 년간의 변화의 폭이 수천 년보다 훨씬 더 가팔랐다.
고작 백 년 살면서 교육까지 열심히 하는 인간들이야 이 변화에 대대손손 잘 적응해 나가겠지만, 천 년을 사는 위아들은 잘 적응해낼 수 있을까?
이리는 지금 이 이물 탈환 사건도 위아의 부적응에서 발단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불고양이는 인간이 돌려주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고양이의 나이는 300살로, 300년 전이었다면 인간은 몇 번 쓰고 인간의 것이 아님을 알고서 돌려줬을 테니까.
그렇다고 위아를 교육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삶의 방식이 각양각색이라 인간처럼 천편일률적인 교육은 통하지 않는다.
왠지 앞으로 이런 일이 많아질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조금 기다리자 1학년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우렁찬 함성과 굉음이 들려왔다. 도진이 복도 쪽 창문을 통해 구경하다가 감탄했다. 복도를 내달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마치 아프리카 물소들 같았다. 이리가 짧게 웃었다.
“2학년이랑 3학년들은 저 소리 들으면 수업에 집중 안 되겠다.”
“맞아요. 그래서 저희 학교는 저 2학년 다닐 때쯤 그냥 전학년 점심시간 통일했어요.”
“그러면 식당에 자리 없지 않아?”
“자리가 생기긴 하더라고요. 저는 또 남고였으니까 애들이 점심을 물처럼 흡입해서.”
우다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키가 큰 단발머리 여학생이 눈을 희번덕 빛내며 들어와서는 곧장 이리에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리 선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우리 저저번 달에 봤지?”
“네! 2월 1일 설날에 뵀었으니 존나, 아… 아니. 엄청 오랜만이죠! 건강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너도 잘 지냈지?”
“네! 선인님 덕분에 건강합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이리의 연약한 고막이 고통을 호소했다. 꼼꼼하게 문단속한 도진이 혀를 찼다.
도진의 가족은 모두 이리 만물 대여점과 위아라는 존재에 대해 알았다. 그리고 이리 선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단한 무당인 줄만 알고 선생님, 선생님하고 부르다가 사람들이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할 때의 그 천지신명 중 하나가 이리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선인님’이라고 불렀다.
도희는 태어나 보니 가족들이 다 이리를 선인님이라고 불러서 선인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선인님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렸을 때는 제 오빠 따라 학교만 끝나면 대여점으로 달려와 놀았는데, 영감이 전혀 없는 아이에게 괜히 헛바람이 들까 봐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이리가 오지 못하게 했다.
도희는 서운하다고 몇 날 며칠을 울며 보냈는데, 이에 부모님이 애 숨넘어갈까 봐 이리와 영상 통화를 시켜 주기도 했다. 그때 얘기를 꺼내면 도희는 흑역사라며 민망해했다. 불과 5년 전의 일인데도.
“야, 내 스승님 괴롭히지 말고 이거나 얼렁 써서 줘.”
“뭔데?”
“편지. 여기 있는 내용 그대로 써라. 괜히 드립 치지 말고.”
도희가 미간을 찌푸린 채 도진의 편지를 읽었다.
“이게 뭐냐. 이게 글씨냐? 한글 맞냐? 오빠 막 요괴 문자 배운 거 아니야?”
“닥치고 얼른 쓰라고. 우리 시간 없어. 스승님, 저희 시간 없죠?”
“한시가 급하긴 해.”
“지금 바로 씁니다!”
도희가 준비된 예쁜 분홍색 펜을 쥐었다.
“재호?”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필기에 집중했다.
이리는 자초지종을 묻지 않는 도희가 대견했다. 17살이면 내가 이런 특별한 사람과 아는 사이다, 세상에는 요괴라는 게 진짜 있다 등 주위에 자랑하고 다닐 만도 한데 도희는 아주 입이 무거운 아이였다.
‘그래도 함구령은 유지해야겠지.’
도진의 가족에게는 외부에 위아에 대해 발설하지 못하도록 간단한 도술이 걸려 있었다. 혹여라도 만취했거나 방심한 상태에서 실수로 발설할 수도 있으니 유지는 해 놓아야 할 듯싶었다.
열심히 필기하는 동생을 감시하듯이 옆에 팔짱을 끼고 선 도진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너 글씨가 왜 이 모양이야. 장난치지 말고 정성 들여서 써. 우리 지금 진지하거든?”
도희가 발끈하며 고개를 들었다.
“뭔 소리야. 나도 엄청 진지하게 쓰고 있는데. 친동생 글씨체가 원래 이런 것도 몰랐냐?”
“이게 네 글씨체라고?”
“어.”
“…….”
도진이 당황하며 이리를 쳐다봤다. 이리가 가까이 와서 보니 도희의 글씨체는 도진이 쓴 것보다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남매 아니랄까 봐….
“어, 어떡하죠. 스승님?”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구나. 도희야, 고마웠어. 얼른 밥 먹으러 가.”
“잠깐만요. 뭔진 몰라도 예쁜 글씨체면 되는 거죠?”
도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이리가 그렇다고 끄덕이자 도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제 친구 중에 글씨 엄청 예쁜 애 있거든요. 재호라는 이름만 가리고 써 달라고 하면 돼요. 지금 부를게요.”
“밥 먹으러 가지 않았을까?”
“걔는 교실에서 빵으로 때우는 애예요. 아, 자고 있겠다. 잠깐만요.”
도희가 벌떡 일어나 과학실을 나갔다. 친구를 데리고 오려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도진은 편지에서 ‘재호에게’, ‘ㄷㅈ’ 두 부분을 지웠고, 이리가 주술을 펼쳐서 둘의 모습이 안 보이게 했다.
“어, 뭔데. 무슨 일인데?”
“일단 와 보라니까.”
“과학실? 어? 열려 있네?”
“야. 빨리….”
과학실 문을 벌컥 연 도희는 아무도 없는 풍경에 잠깐 당황했다가 곧 자연스럽게 친구를 자리에 앉혔다. 친구는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길게 기른 아이였다. 명찰에는 ‘오민아’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누구한테 고백 좀 하려는데 알잖아. 내 글씨 개판인 거. 대신 편지 좀 써 줘라.”
“도희야. 너 금사빠 기질 언제 고칠 거야. 이번엔 또 누군데?”
“그건 비밀. 아무튼 빨리 써 줘.”
“초콜렛이랑 빼빼로 전달에, 이제는 편지 대필이라니….”
친구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도 순순히 펜을 쥐었다. 이런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던 듯했다. 본의 아니게 여동생의 연애 생활을 엿보게 된 도진이 메스껍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누굴 닮아서 금사빠냐. 지 친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쭉 한 명만 좋아하는데.”
“…….”
“지 친오빠는 그 한명 좋아하느라 아직 한 번도 연애 못 해 봤는데 어린 게 발랑 까져 가지고.”
“도진아.”
“왜요, 또 민망하세요?”
“그게 아니라…….”
도진이 능글능글 웃으며 쳐다보자 이리가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민아의 뒤쪽이었다.
도진이 집중해서 그곳을 노려보니 희미하게 뭔가가 보였다.
“어…?”
반투명한 베일처럼 아른아른거리는 그것은 주술의 흔적이었다. 도진이 구사하는 것처럼 완벽한 주술이 아니라 아마추어가 만든 게 우연히 성공하면서 흔적을 남긴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