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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도 선인님을 뵈면 좋아했을 텐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멀리 출장 나가 있습니다. 나중에 돌아오면 자랑해야겠군요.”
“출장? 흔치 않은 일이네. 어디로?”
“루마니아로요. 큰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얼마나 중한 일이기에 직접 오신 건지 슬슬 두렵습니다만…. 혹시 저와 도술 대결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강림도령을 도술로 찍어 누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소문이 퍼졌구나, 중얼거리며 이리가 마른세수를 했다. 전우치가 수염을 손으로 쓸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선인답지 않게 애들 싸움에 끼어드셨습니다. 나비 선인이나 할 법한 행동인데 말이지요.”
“그때는 그래야만 했어.”
“스승님은 제자를 보호하려고 하셨던 거예요. 아무리 애들 싸움이라도 제자가 크게 다치게 생겼는데 그걸 방관하면 오히려 나쁜 짓 아닌가요? 스승님, 잘하셨어요!”
이리는 제자의 칭찬에 더 부끄러워졌다.
“일 얘기나 하자. 너한테 맡길 일이 하나 있어.”
“일이라면…. 악신 관련이겠지요?”
“그래.”
이리가 일련의 일을 요점만 축약해서 얘기했다.
전우치는 으음, 탄식하며 수염을 쓸었다.
“제 생각에도 퇴마사보다는 무당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깨비 마을에는 따로 죄를 물으러 가야겠군요.”
“그건 알아서 하고. 배리모스라는 악신에 대해선 너도 처음 듣나 보네.”
“예. 이름을 보면 서양 악신이 아닐까 싶군요.”
도진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이리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서양 악신이 중간계와 하계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걸 동양 악신들이 그냥 보고 있을 리가 없는데…….”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걸 수도 있습니다. 악신들은 외톨이 기질이 강해서 서로 교류하지 않으니까요.”
전우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최근 100년간 악신을 받은 무당들의 명단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켰다. 마우스를 몇 번 달칵하자 프린터기가 우웅-하고 인쇄를 시작했다. 다섯 장이었다.
“포도청에 감금된 악신은 제외하고, 현재 활동 중인 악신을 받은 무당은 세 명입니다.”
“생각보다 많구나. 왜 안 잡아들였어?”
“잡아들여 봤자 어차피 또 생깁니다. 나쁜 무당이 새로운 악신을 만들고 소환하고 난리를 치는 것보다는 있던 악신들이 순환하는 게 저희 포도청으로써는 더 관리하기 편합니다.”
전우치가 인쇄된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리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도진이 프린트를 받아들였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아진이라는 무당이 있습니다. 그자를 눈여겨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도진이 마지막 페이지를 이리가 편히 볼 수 있도록 들었다.
이아진, 23살. 창백한 피부에 눈 밑이 까맣고 눈빛이 탁했다. 어깨까지 기른 머리카락은 부스스해 보였다.
“계속 신내림을 거부하다가 작년 말에 악신을 받고 무당이 되었는데, 그 악신이 바로 만인사(萬人蛇)입니다.”
“만인사….”
만인사는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에 자리를 잡은 뱀 악신이었다. 인간을 주먹이로 삼아 잔인하고 끔찍한 짓을 벌이기도 해서 포도청에 구금된 적만 열 번이 넘어갔다.
“스승님, 왜 그런 새끼들을 하계로 안 쫓아내는 거예요? 그냥 지들끼리 하계에서 모여 살라고 하면 안 되나요?”
“힘들지. 악신을 죄다 쫓아 내려고 하면 그쪽에서 신령도 나가라고 할 테니까. 신령이 사라지면 인간계에는 큰 혼란이 닥칠 거야.”
“아니, 뭐. 일단 쫓아낸 뒤에 우리가 중간계를 점거하면 되잖아요. 나가라고 한다고 꼭 그 말을 들어야 해요?”
하하하, 전우치가 웃었다.
“전쟁을 하자는 겁니까? 역시 장사답다고 해야 할까. 오만하고 급진적이군요.”
전우치는 흥미롭다는 눈빛을 했는데 그 눈빛이 도진이 아닌 이리를 향했다.
“이런 자를 임금 후보로 등록하신 겁니까?”
“도진이는 잘 해낼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하진 않습니다. 선인님의 판단과 선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니…. 다만 김도진, 그대는 그대 스승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언행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선인님의 제자였다면 항상 조심했을 겁니다.”
“…….”
도진이 입을 댓 발 내밀었다. 붉은 기가 도는 눈에는 반항기가 넘쳐흘렀다. 하지만 뭐라 대거리하지는 않았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도진을 보아 온 이리로서는 이 정도도 큰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악신에 대해 좀 더 얘기를 나누다가 일어났다.
“오늘 대화 내용은 아무한테나 말하지 마.”
“알겠습니다. 도청은 하계의 첩자가 많은 곳이니 조심해야지요. 선인님도 이런 말은 무의미하겠지만… 몸 보중하십시오.”
“정말 무의미하네.”
“그 몸은 적절하게 수면을 취해야 하는 신체라고 들었습니다. 김도진, 그대는 스승을 잘 보살피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또 밤산책을 나오려고 하면 꼭 말리고 말입니다.”
“내가 알아서 하니까 내 스승님 일에 신경 끄세요.”
도진이 인상을 구기고 양아치처럼 표정으로 위협했다. 전우치는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작게 젓는 것으로 대화를 끝냈다.
그는 마중 나왔을 때처럼 건물 밖까지 나와서 배웅했는데, 차에 타는 그 순간까지도 표정, 말투, 분위기와 행위 등 모든 것에 이리를 향한 존중과 경애가 듬뿍 묻어 있었다.
“그 전우치를 실제로 보니까 어때?”
이리 만물 대여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리가 물었다.
“전혀 악동 스타일은 아니네요. 그거 말고는 뭐 전혀 감흥 없는데요. 그냥 평범 그 자체던데요.”
도진은 한껏 자존심을 부렸다. 이리가 눈썹 끄트머리를 기울였다.
“그런 사소한 발언들도 거짓말에 속한단다.”
“아니, 진짜로 저는 옛날부터 전우치보다는 홍길동파였어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너무 좋잖아요. 전우치는 그런 서사도 없고 얄팍하고…….”
“홍 왕이라. 조만간 율도국에서 100년에 한 번 있는 커다란 행사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홍 왕과 인사하는 것도 좋겠지.”
“축제? 완전 좋죠. 꼭 가요, 우리.”
도진은 이번 여름에는 반드시 이리와 끝내주는 축제를 보내리라 다짐했다.
다만 그러려면 이 악신과 저주 사건이 그전에 깔끔하게 해결되어야만 한다.
용마는 고삐만 잡아 주면 알아서 제 갈 길을 가므로 도진은 핸드폰을 꺼냈다. 이아진이라는 무당에 대해 좀 알아볼 생각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자 의외로 프로필이 떴다. 출생도 없고 그저 가족관계만 적힌 간단한 프로필이었는데, 가족 이름이 굉장히 익숙했고, 링크가 걸려 있었다.
“스승님!”
도진이 품에서 프린트지를 허둥지둥 꺼내 뒷좌석의 이리에게 넘겼다.
“이아진, 가족관계 보세요!”
가족 : 오빠 이석진
“이석진이랑 남매였어요!”
“연예인 이석진?”
“네!”
도진은 제 핸드폰도 이리에게 넘겼다. 놀란 도진과는 달리 이리는 담담하게 정보를 확인했다.
조만간 한 번 더 이름을 듣게 되지 않을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석진이 다니는 연구회 이름이 새보름 혹은 새보르미라고 했어. 악신의 이름은 배리모스고…….”
도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새보르미가 배리모스였네요. 애너그램이었어요!”
흥분한 도진이 핸들을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용마가 아프다고 경적을 울렸다.
[ (╬▔皿▔)╯]
“아, 미안.”
도진은 내리친 부위를 쓰다듬으며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그 새끼들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죠? 그냥 ‘퇴마 영상’ 동호회가 아니었나? 기껏해야 인간에 무당 주제에 존나 나대네요. 어떡할까요? 당장 이석진네 집으로 쳐들어갈까요?”
“일단은 조사를 맡겨야지.”
늘 그렇듯, 이리가 조사를 맡길 이들은 바로 신령들이었다.
학문가
학교수
넵?
인간 연예인 이석진이랑 새보르미 연구회에 대해 알아보고 메일 줘
학교수
…옙
약사
엥…
약사
배리머시기인가 배리모스인가 하는 악신이랑 관련 있는 거예여?
아마도
약사
헐…
약사
일이 참 요상하게 돌아가네여 여기서 갑자기 이석진이라니
학교수
이석진 연기 잘해서 좋아했는데,,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몰라. 무슨 일이 났는지 알아보려는 거야
학교수
선인의 명령을 받사옵나이다~~
학교수
근데 이 와중에 해자조자 이자식들 쥐죽은듯 가만히있는거봐라
약사
ㅋㅋㅋㅋㅋㅋㅋ
약사
조자는 본래 말이 없지만 해자 이 녀석 안 되겠네 ㅋㅋㅋ
이리는 웃음이 넘치는 대화창을 눈으로 훑고 화면을 껐다.
막막했던 것과 달리 결국 도깨비도 모두 살았고, 생각보다 많은 단서를 발견해서 그런지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무엇보다 희한한 것은 악신과 연관된 인간이 저주를 뿌린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크게 마음이 불안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리의 직감은 대부분 정확히 들어맞기 때문에, 생각보다 복잡한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을 듯해 다행이긴 하지만 왜 이 일이 불길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의아했다.
“스승님, 여차하면 제가 직접 이석진 만나러 갈게요.”
“직접 만나서 어쩌게.”
“아니, 퇴마 영상 오타쿠들은 웬만하면 제 얼굴을 알아보잖아요? 절 신처럼 떠받들고 생각보다 쉽게 음모를 밝힐지도 몰라요. 인간은 복잡한 것 같지만 존나 단순하거든요. 한 대씩 대가리 패면 바로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무릎 꿇고 빌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
“절대 안 되지. 때리지 마.”
“주먹질은 안 해요. 이 종이, 이 프린트지 요걸로 때릴게요. 종잇장에 맞아 봤자 얼마나 아프겠어요? 저 힘 조절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아무튼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골치 아픈 일은 제가 다 해결할 테니까 스승님은 일단 좀 주무세요. 대여점까지……. 아, 뭐야. 3분 남았네. 뭐가 이렇게 빨라. 스승님, 3분이라도 좀 자요. 눈 좀 붙여요. 도착하면 깨울게요.”
이리가 설핏 미소 지었다. 불길한 예감에 잠식되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 단순하고 귀여운 제자 덕분인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