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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와 헤어진 이리와 도진은 우선 대여점으로 돌아왔다. 고객들과의 약속을 미룰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비운 시간만큼 집중해서 빠르게 접객과 일을 처리하고 나니 어느덧 새벽이었다. 밤이 늦으면 꼭 이리가 소용없을 걸 알면서도 집에 가라고 한마디씩 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말도 없었다.
도진은 당당하게 뻐기며 말했다.
“스승님, 저 아니었으면 오늘 앉을 시간도 없었겠네요. 저 잘했죠. 예쁘죠? 뽀뽀해 주실래요?”
“응, 잘했어. 도진아. 가서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고 와. 우리 바로 포도대장 만나러 가야 해.”
“네? 이 시간에요? 갑자기?”
“밤에만 문을 여는 곳이라…. 가면서 설명해 줄게.”
“알겠습니다아. 스승님 외투도 가지고 올게요.”
도진이 자기 것으로는 멋있고 깔끔한 재킷을, 이리 것으로는 캐주얼한 재킷을 가지고 내려오자 이미 1층에 불이 다 꺼져 있고 이리는 검은 벤 앞에 있었다.
“어지간히 급한가 봐요.”
“또 어딘가에서 저주가 퍼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타자.”
아무리 유능한 명마라고 해도 반드시 고삐를 잡아야만 하듯이, 누군가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어야만 하기에 도진이 운전석에 타려고 했다. 그러나 이리가 주머니에서 헝겊 인형을 꺼내더니 운전석에 던졌다.
펑! 소리와 함께 헝겊 인형이 사람이 되어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바른 자세로 운전석에 앉았다.
“저 뒤에 타요?”
“응. 설명할 게 많아.”
“네.”
도진은 이리와 나란히 앉아 가는 게 기분 좋아서 얼른 탔다. 이리가 내비에 주소를 입력했는데 주소가 남쪽이어서 의아했다.
[ヾ(⌐■_■)ノ♪]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용마는 목적지가 마음에 든 듯했다.
“일단, 퇴마사라는 직업에 대해선 대충 알지?”
“네.”
오래전, 하계에 속한 존재들이 중간계에서 자꾸 인간들을 괴롭혔던 시기에는 퇴마와 제령이 크게 성행했다. 뒷산에는 호랑이, 앞산에는 요괴가 괴롭히던 시대에 퇴마사는 누구나가 선망하는 직업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다만, 극소수 사명감과 선의로 일하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탐욕적이어서 퇴마사의 말로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비참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천 년 전 ‘하루 전쟁’ 후 하계 위아들이 중간계를 떠나면서 자연스레 퇴마나 제령이 필요한 일들도 사라지고, 퇴마사라는 직업도 점점 쇠퇴했다.
지금도 인간계에 퇴마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예전의 퇴마사가 신수와 대요괴를 상대했다면 지금의 퇴마사는 요물과 혼령에도 쩔쩔매는 수준이었다. 이쪽에 재능이 있다면 퇴마사보다는 무당이 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분명히 그러했는데…….
“무려 도깨비에게도 저주를 퍼뜨리는 퇴마사가 등장한 거야. 악신과도 손을 잡은 듯하고, 실력도 짧은 사이 일취월장하고 있어. 분명 지금은 세계 어디에도 이 정도 실력을 지닌 퇴마사 가문이 없으니 이상한 일이지.”
“퇴마사가 아니라 무당일 수도 있지 않아요?”
“퇴마사는 혼자지만 무당은 신과 함께잖아. 무고한 이들에게 저주를 퍼뜨리는 무당을 그 어떤 신이 돕겠어?”
“악신을 받은 무당이라거나…….”
“바로 그거야.”
이리가 잘 생각해 냈다는 듯 칭찬했다.
“악한 사람이 마침 영안도 트여서, 악신을 내려받고 무당이 되었을 확률이 있어. 그래서 지금 악신 전담 기관에 배리모스의 추적을 부탁하러 가는 중이지.”
“포도청 말이군요!”
심각한 상황이지만 어쩔 수 없이 도진의 목소리에 기대가 담겼다.
포도청은 이리 만물 대여점과 함께 중간계에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나쁜 짓을 저지른 위아들을 잡아가는 곳으로, 경찰청과 교도소 역할을 동시에 했다.
중간계에 터를 잡은 위아들은 대개 순둥순둥하기 때문에 포도청에 들어가는 이들은 대부분 원혼이나 악신이었다. 그래서 포도청에는 ‘악신 전담 기관’이라는 별칭도 붙었다.
“앞으로 대여점에서 일하면서 포도대장과 마주칠 때가 제법 있을 테니 너도 인사를 해 두는 게 좋겠어. 성격이 서글서글하면서 품행도 반듯해서 좋은 귀감이 되어 줄 거란다.”
“갈래는요? 신령? 아니면 요괴?”
“으음….”
이리가 말하려다 슬며시 미소 지었다.
“가서 직접 보렴. 참고로 너도 아는 사람이야.”
“제가 아는 사람요? 그렇게 많지 않은데.”
도진이 한 명, 한 명 손으로 꼽았다.
이리의 신령들과 보부상. 나비 선인, 강림도령…. 이름만 들었던 도우 선인……?
“설마 갑자기 음악가나 요리이기가 나타나는 건 아니겠죠? 저 그러면 실망할 거예요.”
하하, 이리는 작게 웃기만 하고는 알려주지 않았다.
도진은 두근두근하면서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얼른 포도청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 * *
“아, 이리 만물 대여점의 신입 직원이라고요? 처음 뵙는군요. 포도대장 전우치입니다.”
코가 쭉 뻗은 잘생긴 얼굴에 수염을 기른 남자가 도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포도대장은 그 전우치였다.
뭔가 악동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보기 드문 미남인 데다가 도진과 엇비슷한 체격을 가졌고, 성격도 좋아 보였다. 도진은 급하게 나오느라 생활복에 재킷만 걸쳤는데, 전우치는 맞춘 듯한 정장까지 입고 있었다.
“김도진입니다.”
도진은 악수를 하면서도 갑자기 이리가 포도대장을 엄청나게 칭찬했던 게 떠올라 찜찜해졌다.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품행이 반듯하다고 했지…. 얼굴도 잘생겼다고 했었나? 외모는 그래도 내가 더 낫지 않나?
도진은 지금껏 많은 위아를 만났지만 이렇게 잘생긴 미남자는 처음이었다. 보부상이나 강림도령 또한 잘생긴 축에 끼지만 자신과는 다른 계열이라 괜찮았는데, 전우치는….
속 좁은 도진이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이리의 옆에 좀 더 붙었다.
“이리 선인님. 선인님의 제자가 저를 경계하는군요.”
“그러게. 사인 받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히려 경계를 하네. 어린애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린애라뇨! 저 애 아니거든요? 산도깨비랑 씨름을 해서 이기는 어린애 보셨어요?”
“그래. 미안해.”
이리가 도진을 대충 달랬다. 전우치가 호오, 수염을 쓸며 감탄했다.
“도깨비랑 씨름을 해서 이겼다고? 힘이 장사로군요. …아, 혹시 장사입니까?”
“네, 제가 장사입니다! 잘생기고 멋지고 나중에 왕이 될 장사죠.”
“아주 씩씩하군요.”
전우치가 빙긋 웃었다. 완전히 어린애 대하는 태도였다.
“뭉용은 잘 지내?”
“스승님은 잘 지내십니다. 요즘에는 용에 꽂히신 것 같더군요.”
“뱀보다는 낫네.”
“저도 동감입니다. 이러지 마시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선인님이 방문하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전화로는 할 수 없는 얘기였던 거겠죠?”
전우치가 에스코트하듯이 팔을 뻗어 이리를 안내했다.
그들은 외관은 지은 지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허름한 빌딩 앞에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자 최신식 기술로 무장한 초호화 빌딩이 그곳에 있었다. 한겨울 야외처럼 한기가 도는 점만 제외하면 대기업이 사옥으로 쓸 법한 건물이었다.
이리 만물 대여점과 마찬가지로 영안이 있거나 미리 허가를 받은 존재만이 로비를 통과해 호화로운 신식 빌딩을 영접할 수 있었다.
전우치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63층에서 내렸다. 너무 번쩍번쩍해서 거울 같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지나자 ‘포도대장실’이 나왔다.
가죽 소파와 테이블, 먼지 한 톨 가라앉지 않은 난초, 구석에는 골프채가 세워져 있고, 책장에는 뭔가 어려워 보이는 책들이 꽂혀 있었으며, 집무 책상 뒤로는 끝내 주는 경관까지 갖춘 대기업 회장실이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 비서가 차를 내왔다.
“감사합…….”
무심코 비서를 보던 도진이 깜짝 놀랐다. 비서가 여우 요괴였던 탓이다. 여우 요괴는 희귀하고 특별한 위아로, 이름이 ‘여우 요괴’일뿐 갈래는 영물에 속한다.
자주 볼 수 없는 영물이 세상에서 가장 무미건조한 얼굴로 찻잔을 세팅하다가, 이리 선인에게만 미소를 띠고 고개를 꾸벅했다. 이리도 고개를 까딱했다. 여우 요괴가 집무실을 나가고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전우치가 설명했다.
“비서 일을 하면서 죗값을 갚고 있는 녀석입니다. 10년을 더 일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년 일했는데요?”
“99년 일했습니다. 처음엔 실수가 잦았지만 요즘엔 꽤 능숙해졌지요.”
“그런데 왜 내 스승님한테 인사하고 가요? 스승님, 저 여우 요괴 아세요?”
“아니….”
“위아들은 언제나 이리 선인을 반가워합니다. 모든 생명은 위아가 되자마자 자연히 이리 선인의 존재를 알게 되니까요. 알고만 있던 분을 실제로 영접하는 순간은 정말이지 신비롭고 거룩한 느낌이죠. 그대도 알 텐데요.”
“알지만 싫은 거거든요.”
인간이기도 하지만 위아이기도 한 장사 도진은 이리만 보면 인사하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위아들의 심리를 잘 이해했다.
갓난아기일 때부터 이리 선인의 존재를 알았다. 마치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호흡하는 것처럼, 이리 선인과 이리가 운영하고 있는 대여점에 대한 정보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존재를 실제로 봤는데 어떻게 인사하지 않고 지나치겠는가.
도진이 옆에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어도 슬금슬금 모여들어 이리의 옷을 타고 올라간다거나 귀여워해 달라고 몸을 비비는 잔챙이 위아들이 수두룩빽빽이었다. 이해는 하면서도 마음에는 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