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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28화 (28/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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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가 병에 걸린 도깨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삭신 증세와 정확히 똑같았다. 이제 이 폐쇄적인 마을에 어쩌다가 역병이 퍼졌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이리는 병이 깊어 운신할 수 없는 도깨비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촌장댁으로 불렀다. 마을 구성원 총 31명 중 14명을 제외하고 17명이 모였다.

이리는 평소에 촌장이 앉았을 가장 상석에 앉았고, 양옆으로 도진과 약사가 자리했다. 도깨비들이 마스크 낀 모습을 낯설어한 탓에 마스크는 벗은 상태였다.

“스승님, 도깨비들이 스승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네요. 뭔가 켕기는 게 있나 봐요.”

“그런 것 같지.”

약사가 준 진통제를 먹고 삭신의 통증에서 잠시 벗어난 도깨비들은 분명 예의를 차리고 점잖게 앉아 있었지만, 하나같이 이리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았다.

“이런 폐쇄적인 마을에 역병이 퍼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자연 발생하지는 않았을 테니 바깥에서 들어왔겠죠. 전파 과정을 역추적해야 합니다.”

약사의 말에 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는 도깨비들을 천천히 훑다가 촌장에게서 멈췄다.

“해소. 너는 앞으로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진실만을 말해야 해.”

“…알겠습니다.”

“역병이 퍼지고 바깥에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가 뭐야.”

“…….”

도깨비들이 움찔움찔 떨었다. 해소는 우물쭈물하다가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인님….”

“…….”

“우선 말씀드리지만… 그 인간의 죽음은 절대 고의가 아니고 우연한 사고였습니다…….”

이리와 약사는 예상한 듯 놀라지 않았지만 도진은 전혀 상상도 못 했기에 벌떡 일어났다.

“인간의 죽음? 이 새끼들, 인간을 죽였어!?”

“마, 말하지 않았나. 고의가 아니었다고.”

“위아가 인간을 죽이다니! 이런 무거운 죄가 숨긴다고 숨겨질 줄 알았냐? 언제부터 살인을 즐겼지? 지금까지 몇 명 죽였어!”

“그 한 명뿐이다. 실수였다. 우리도 속아 넘어갔단 말이다!”

해소가 분통을 터뜨렸다. 다른 도깨비들 또한 병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해소를 거들었다.

억울하다, 원통하다. 우리는 속았다 등등.

“다들 조용.”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워지자 이리는 손을 들어 모두를 진정하게 했다.

“도진아, 그만해. 고의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살인을 즐겼냐 묻는 건 왜곡이고, 매도야. 해소에게 사과해.”

“……미안합니다. 촌장.”

도진이 입을 댓 발 내민 채 사과했다. 촌장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꾸벅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이리는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위아로 인해 인간이 죽는 일은 종종 벌어지곤 했다. 덩치 큰 위아가 기지개를 켜다가 지나가던 인간을 손바닥으로 깔아뭉갠다거나,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에 담긴 원념 때문에 지나가던 인간이 귀가 터져서 죽는다거나. 이런 일들은 단순히 사고로 여기고 처벌하지 않았다.

인간이 쥐를 죽이겠다고 설치한 쥐약을 잔챙이 위아가 먹고 죽어도, 저승에서 인간을 처벌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도깨비들도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건 왜일까? 고의가 아니라면 당당해도 되는데 해소는 지금 심하게 위축되어 있었다.

“선인님, 이 역병이 ‘병’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제가 아니라 학문가가 왔어야 했나 봅니다.”

이리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고는 해소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숨기지 말고 다 얘기해.”

“예…. 선인님.”

해소가 통영 도깨비에게 있었던 기막히고 억울한 일을 이야기했다.

*

한양에 살다가 여수로, 여수에 살다가 통영으로 이사 온 늙은 도깨비 철수는 음기 수거일에만 마을을 나가는 다른 도깨비들과는 달리 평상시에도 자주 외출하고는 했다.

인간 마을에 내려가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시장에서 값을 흥정하며 여가를 보냈다. 그러나 촌장인 해소에게서 인간과 너무 얽히지 말라는 주의를 들은 후에는 마을에 잘 가지 않았다. 대신 미륵산의 가장 큰 나무 위에 올라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인간들을 구경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한 번은 하늘이 흐리던 어느 날이었다. 항상 올라가던 나무에 오르려고 했는데, 처음 보는 작은 새 두 마리가 열심히 나뭇가지를 물고 나르며 둥지를 만들고 있어서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철수는 그 나무의 옆 다소 작은 나무 위에 자리 잡았다. 그 후로는 케이블카 대신 새들 구경에 빠졌다. 새의 이마는 붉은 원반을 올려놓은 것 같았고 부리를 노랬으며 부리 주위로는 검회색 털이 나 있었고, 배 부분은 다홍빛이었다.

“우째 이리 예쁘노.”

작고 예쁜 새들에게 푹 빠진 철수는 나중에는 둥지 만드는 것도 도와주었다.

“이 나뭇가지가 더 튼튼하지 않누?”

삑삑.

“알았다. 니들 맴대로 해라.”

빽.

“느그들 어찌다 여꺼지 다 왔노. 이름이 머꼬?”

짹짹짹.

대화하기에는 지능이 부족한 작은 동물들은 울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작은 새 두 마리는 뽀얀 알을 다섯 개나 낳았다.

철수는 할아비가 된 기분으로 새들과 함께 알을 보살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인간이 잃어버린 우산을 가져와 둥지 위에 걸쳐 두고, 가끔은 부모 새들 먹으라고 토실토실한 굼벵이도 한 줌 갖다줬다.

마침내 알에 금이 가더니 쭈글쭈글한 아기 새들이 눈도 못 뜨고 뺙뺙뺙 울며 태어날 때는 감동까지 느꼈다.

사건은 어미 새가 먹이를 구하러 가고 철수는 아비 새와 함께 아기 새들을 보살피고 있던 날에 일어났다.

“저거 비암 아이가? 구렁이 아뇨, 저거!”

둥지 옆 나뭇가지 끝부분에 앉아 있던 철수는 나무 기둥을 타고 올라오는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비 새는 발견을 못 했는지 높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쩌나. 새끼덜 다 죽게 생깃다.”

철수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도깨비방망이로 호루라기를 만들어 내서 삑- 불었다. 가까운 하늘 위를 날고 있던 아비 새가 금방 날아왔다.

짹짹-

아비 새는 접근하고 있는 천적을 알아채고는 그 작은 몸으로 부리를 쪼아 대며 위협했다.

철수는 둥지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괜히 부른 거 아이가? 저걸 어쩌나. 저 조그만 게 구렁이한테 상대가 되나. 어쩌나.

산도깨비가 아닌 이상 도깨비들은 촌장에게서 허가를 받지 않으면 산의 섭리에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마을로 가서 촌장에게 허락을 받고 오면 이미 다 죽어 있을 것 같았다.

철수가 고민하는 사이 구렁이는 새끼들 대신에 아비 새를 한 번에 삼켜 버리고 말았다. 아비 새가 떨어뜨린 깃털 몇 개가 휘날렸다. 구렁이는 아비 새로 만족했는지 나무를 내려갔다.

“아아……. 미안타. 미안하다.”

철수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중에 날리는 조그만 깃털 몇 개를 유품이라고 챙기는 일뿐이었다.

돌아온 어미 새는 몇 시간을 나무 위 하늘을 빙빙 돌며 울었다.

또 시간이 흘러서 아기 새들이 보송보송하게 자라 둥지가 좁게 느껴질 때쯤, 구렁이가 다시 찾아왔다. 구렁이는 서슴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왔다. 철수는 다시 호루라기로 어미 새를 불렀고, 어미 새는 금방 돌아와 구렁이에게 대항했지만 날갯죽지가 다쳐 땅으로 추락했다.

철수는 낙하하는 어미 새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능이 없는 이 새가 도와주지 않는 철수를 원망하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이 느낌만은 확실했다.

새끼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이었다.

“됐다 마. 인연을 맺아 부렸는디 할 수 없다. 느그들 새끼덜이 내한티 구해질라꼬 여꺼지 와서 집을 맨든갑다.”

철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도깨비방망이를 휘둘러 구렁이를 죽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땅에 떨어진 구렁이가 몇 번 몸부림을 치더니 지진이 일어나고 구렁이의 시신이 흙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이고, 영물이었나!”

철수는 정말로 큰일이 났다 싶었다.

영물이 왜 저항을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도깨비가 영물을 죽였으니 이는 대단히 큰일이었다. 어른이 아이를 죽인 것과 같았다. 물론 이유가 있긴 했다. 아끼는 짐승을 먹으려고 했으니까. 그러나 결코 정당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도깨비 마을과 미륵산 영물들 사이에 싸움이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철수는 지지배배 배고파 우는 아기 새들 곁에서 저지른 일을 후회했다. 그때 나무 아래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아. 내 아내. 내 아내가 죽었어.”

큰 키에 말끔한 외모의 젊은 남자가 하얀 상복에 굴건을 착용하고 나타났다.

그는 흙무덤에 다가오더니 통곡을 했다.

“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함께 신령이 되어 영생하자던 약속은 다 어디 갔어요? 여보, 일어나 보세요!”

철수는 눈물을 흘리며 내려와 그에게 자초지종을 고백했다.

사연을 들은 남편 구렁이가 말했다.

“아기 새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그 이유만으로 도깨비가 영물을 죽이는 것은 천지신명의 규율에 어긋난 것입니다. 당신의 간섭 때문에 내 아내는 신령이 되기 사흘 전 마지막 만찬도 못 하고 이렇게 가는군요.”

“미안하오. 미안하오…….”

“당신이 진심으로 사죄를 하니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령이 되면 함께 이 근처에서 활개치고 있는 악신 배리모스를 하계로 보내려 했는데, 이제 그 일이 요원하게 됐으니 이 일대의 인간 마을에 큰 혼란이 닥칠 것이라 걱정입니다.”

“악신 배리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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