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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지적, 단기적으로 발생했다가 죄다 죽이고 사라지는 무서운 역병입니다. 심지어 이제는 영물과 도깨비급까지 병에 걸리고 있어요. 3개월 만에 변이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데 전 이렇게 빠른 위아 역병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외국에는 퍼지지 않았고?”
“네. 아직은요. 하지만 몇 달만 지나면 빠르게 전파되겠죠.”
한국은 이리 만물 대여점이라는 곳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많은 위아가 살고 있다.
대여점을 중심으로 위아들이 모이고, 그러다 보니 출입국장과 포도청, 의원, 복지관 등 여러 공익 시설도 자연히 생겨나고, 시설이 있는 근처로 더 많은 위아들이 모이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한국은 위아계의 수도 같은 지역이 되었다. 역병이든 유행이든 항상 한국에서 먼저 발생해 해외로 퍼져 나갔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누구누구 있어?”
“나비 선인이랑 강림도령, 그리고 우리요.”
여기서 ‘우리’란 이리의 신령들을 뜻했다.
“도깨비들은 아직 죽은 녀석은 없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감염되었다더라고요. 마을에는 들어가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 녀석들이 허락을 안 해 줘서. 이제 선인님이랑 같이 가서 봐야죠. 임금님께는 언제 보고하실 생각이세요?”
“음…….”
“선인님.”
약사가 미간을 좁혔다.
“약도 없는 병에 마을 전체가 감염되었잖습니까. 이미 심각한 상황이라고요. 도깨비 마을 하나가 박살나면 그 지역은 그냥 원혼과 악신에게 납세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 아시죠?”
“알지….”
답답한 듯 약사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도 보고를 안 할 겁니까?”
“도깨비 마을이 전멸됐고, 그 지역 인간 마을에 혼란이 찾아왔다는 정도로 임금님께 보고 드릴 수는 없어.”
“대체 어느 정도는 되어야 왕께 보고를 올릴 수 있습니까?”
“인간의 도시가 전멸됐고, 그 나라에 혼란이 찾아왔다는 정도여야 해. 지금의 규율이 그래.”
약사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쳤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도진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기, 잠시만요? 저 한마디 좀 해도 될까요.”
“그래. 도진이 새삼 많이 컸구나. 키가 몇이냐.”
“192cm인데 계속 크고 있어요.”
“정말 장하다. 지금 몇 살이었지? 대학은 들어갔나?”
도진은 약사가 친한 척을 해오는 게 조금 어이없었다.
이리의 신령들 중 관조자만 제외하면 모든 신령들과 안면을 트긴 했다. 하지만 약사와는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본 게 마지막인데 이렇게 친한 척을 하다니. 명절 때 용돈도 안 줬으면서.
“20살이고 대학은 안 갔는데 저 질문 하나만요.”
“하려무나.”
“지금 사람들이 다 여기 쳐다보고 있는데 우리 은신술 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도진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쓰윽 둘러봤다.
약사는 인물이 아주 훌륭하지는 않으나 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미 정장 차림이었고, 이리와 도진은 생활한복 차림새였다. 더군다나 누구나가 인정하는 훌륭한 인물을 가진 이들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죄다 이쪽을 흘끔거렸다. 아예 뒤에서 따라오며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도술을 사용해서 인간의 눈을 속이는 걸 싫어하거든. 우리 대화를 훔쳐 듣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지 않겠니?”
“아니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쳐다보고 있는데…. 그리고 이 정도 거리면 귀 밝은 사람은 목소리 들릴지도 모르거든요?”
“정 불편하면 네가 결계를 세워라.”
도진은 딱 감이 왔다.
약사가 지금 제 도술을 테스트하려는 것이다.
도진은 코웃음을 치고는 손가락을 한번 튕겼다. 일행에게 집중되었던 시선들이 천천히 흩어졌다.
“제법인걸. 적덕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들었는데 도술 수행은 열심히 하나 봅니다, 선인님.”
“열심히도 하고, 타고난 재능도 많지. 하던 얘기 계속할까?”
“그러죠.”
셋은 다시 등산길을 올라갔다.
“병의 증상은 삭신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몸의 근육과 뼈마디가 삭는 현상이죠.”
“삭신도 한번 발병하면 일주일 내로 사망이었지?”
“신수와 신령급이 일주일, 영물급은 사나흘, 요물급은 하루면 다 죽었죠.”
“잠깐만요…. 신수랑 신령도 전염병에 걸렸었단 말이에요?”
도진이 기겁을 하더니 갑자기 배낭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스승님, 마스크 끼세요. 혹시 몰라서 챙겨 왔어요. 인간 사회에서는 감염병이 돌았을 때 마스크로 큰 효과를 봤거든요.”
“나는 없어도 되니까 너는 끼고 들어가.”
“마스크, 좋지. 나도 주려무나.”
약사가 손을 내밀었으나 도진이 등 뒤로 숨겼다.
“스승님 안 끼면 저도 안 끼고 약사 신령님도 안 줄 거예요.”
“왜 나까지…?”
약사가 황당하단 얼굴로 쳐다봤다.
“신령이랑 신수도 걸리는 병이라면서요. 저는 장사지만 인간에 가까운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알았어. 마을에 가면 마스크 착용할게.”
이리가 마스크를 손에 달랑달랑 들었다.
그들은 등산로를 더 걷다가 옆으로 빠졌다. 사람이 전혀 다닐 수 없는 길에 들어서서는 도술을 펼쳐서 공간을 좁히며 달렸다.
“하계 쪽에서도 역병과 관련해서 조사하고 있다면서요. 대적 장군은 뭐 새로운 정보 없을까요?”
“나야 모르지.”
“하계는 진현계에 허구한 날 첩자 보내는데 왜 진현계는 첩자를 안 보냅니까?”
“규율이라서 어쩔 수 없어.”
“아우, 그놈의 규율. 답답해 죽겠네. 도진아, 네가 왕이 되면 규율 싹 갈아엎어라.”
“네. 그럴 생각이에요.”
도진은 꽤 고급 도술을 시전 중이라 말하기 벅찼지만 태연한 척 대답했다. 약사 신령은 눈치채지 못했으나 이리는 제자의 상태를 눈치채고 슬며시 웃었다.
일행은 금방 도깨비 마을 초입에 도착했다.
절벽 앞에 키가 높은 나무들과 커다란 바위들, 160cm 정도의 장승 하나 있었다. 아주 험악하게 생긴 장승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통영 도깨비 마을]
“이제 마스크 쓰세요.”
“알았어.”
마스크를 착용한 이리가 장승에 손을 댔다. 그러자 장승이 주우욱 길게 늘어나더니 세 명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는 다시 주우욱 줄어들어 땅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갔다. 도진이 당황했다.
“설마 이 굴을 따라 내려가야 해요?”
“아니. 장승은 도깨비 마을 촌장에게 이런 방문자가 왔다고 알리려고 간 거야. 촌장이 허가하면 입구가 열려.”
“최첨단 시스템이네요.”
곧 바위와 나무가 구우우우- 소리를 내며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동굴이 드러났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벽에 은은하게 빛나는 돌들이 박혀 있어서 어둡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깨비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을 이루는 집은 으리으리한 기와집 형태였다. 집과 집 사이마다 크고 작은 밭들과 우물, 놀이터 등을 갖췄고,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포목점, 철물점, 국밥집, 피시방 등 여러 가게들도 있었다.
보도블럭과 시냇물이 공존하는 깨끗한 도로를 걸으며 도진이 이리에게 달라붙었다. 이리는 덩치 큰 제자가 제 팔을 가져가 멋대로 팔짱을 꼈지만 그냥 놔두었다.
“생긴 건 분명 부유한 동네인데 분위기는 꼭 귀신 마을 같아요. 역병이 돌아서 그런가?”
“농도 짙은 음기가 깔려서 그래. 저기 촌장이 오는구나.”
이리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인간 평균 키보다 살짝 작은 키에 뿔이 하나 달린 혹부리 영감이 “선인님”을 부르짖으며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약사가 으악, 비명을 질렀다.
“삭신에 걸린 놈이 그렇게 과격하게 움직이면 어떡해! 일부러 죽고 싶어서 명 재촉하는 거냐? 당장 멈춰!”
촌장이 우뚝 멈췄다. 실제로 촌장이 움직일 때마다 썩어 들어간 피부가 파스스 흩어지고 있었다. 특히 팔목은 뼈가 보일 지경이었고, 그 뼈마저도 썩고 있었다.
“아이고, 이리 선인님. 어서 오시옵….… 그게 뭡니까?”
“마스크.”
“그, 그렇군요. 아무튼 어서 오십시오.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입니까?”
“어쩐 일이라니? 지금 그렇게 온몸이 썩었으면서도 나한테 어쩐 일이냐고 묻는 거야?”
“아이고…. 저희 마을에 역병이 퍼졌다는 소문이 밖에까지 퍼졌습니까?”
“왜 얘기하지 않았어? 남해 신령이나 천왕산 신령 등 주변 신들에게 도움을 구했어야지.”
“이 병 삭신입니다. 삭신 치료법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아나, 미치겠네!”
약사가 떽 호통을 쳤다.
“이 답답한 위아들아. 그래서 삭신 약으로 치료가 되긴 되디?”
“…낫지 않더군.”
“그래! 안 됐지? 약이 안 들었지? 근데 그걸 ‘으음. 약으로 치료가 안 되넹. 이상하당. 계속 복용해 봐야겠당. 헤헷.’ 하고 아방하게 방치하고만 있었어? 적어도 마을에 다 전염이 되면 그때라도 밖에 손을 뻗었어야지! 촌장이란 녀석이 폐쇄적일 때와 개방적일 때 분간을 못 하면 어떡해?”
약사의 고함이 마을을 쩌렁쩌렁 울렸다. 촌장의 혹이 부우웅 커졌다가 부우웅 줄어들었다가 했다.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찾아왔을 때라도 문을 열었어야지! 약을 써도 병이 안 낫고 더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약사 신령을 거부하는 곳이 어디 있단 말이냐! 확 다 죽게 놔둘까 하다가 내가 우리 선인님 데리고 온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이리가 진정하라는 듯 약사의 등을 토닥였다.
“촌장, 약사의 말이 맞아. 촌장이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봤어야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일단 상태를 보러 가자.”
“예….”
촌장이 주눅 든 채 길을 안내했다.
약사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이리는 한숨을 내쉬며 따라가는데, 그 뒤로 도진 또한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걸었다. 이리가 이 녀석은 또 왜 화가 났나 하고 돌아보자 도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여 줄 줄 알았으면 제가 더 성질부릴걸 그랬어요.”
“…….”
“나 성질부리는 거 진짜 자신 있는데….”
다시 한번 이리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