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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26화 (26/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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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끝낸 노량이 타박타박 걸어왔다. 강림도령은 손을 뻗어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노량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순간 몸이 무너져 내리고 혼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노량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반투명한 혼령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도진에게 다가왔다.

“인간아. 고마웠다. 이물은 내 주머니에 있으니 가져가거라.”

“…난 진짜 모르겠다. 저 아주머니는 네가 평생 옆에 있었다는 것도, 자기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도 영원히 모를 텐데 억울하지도 않냐?”

“그런 건 상관없다. 나는 지숙이가 날 알아줬으면 하는 게 아니라 마음 놓고 늦잠을 자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모르겠다는 거야. 아무튼 저승사자들 잘 따라가. 괜히 가는 도중에 억울하고 원통하다며 원혼이 되지나 말고.”

“괜한 걱정을 한다. 강림도령에게 수거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느냐.”

잘 있어라, 인간아. 노량이 마지막 인사를 하는 그때였다.

“야, 곶감 좋아한다며. 남은 곶감이나 가져가서 처먹든가.”

도진이 잔칫상의 남은 곶감들 다섯 개를 죄다 노량에게 던졌다. 곶감들은 노량의 혼백을 통과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아, 곶감 주워 와.”

“네….”

아직 도술이 완전하지 못한 제자를 대신해 이리가 곶감 다섯 개에서 하나하나 영체를 꺼내 노량에게 건넸다. 노량이 곶감들을 한 아름 안고서 헤헤 웃었다. 25시간 동안 도진이 보아 온 모습 중 가장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 개천일에 뵙지요.”

“그 전에 만나게 될 거야.”

“예?”

“그런 게 있어. 잘 가. 월직차사랑 너희들도.”

“예.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저승사자들이 돌아가고 이제 집안에는 자고 있는 인간 하나와 선인 하나, 장사 하나만 남았다.

도진은 우선 이물을 수집하고는 귀엽게 헤실거리며 이리에게 치댔다.

“스승님, 화 안 내시네요. 제가 크게 일 벌였다고 나무라진 않으실까 했는데.”

“네 판단을 믿겠다고 했잖아.”

“어디까지 예상하셨어요? 아무리 그래도 강림도령이 등장할 줄은 몰랐죠?”

“제1차사보다는 강림이 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

“아…. 하긴….”

소문으로는 제1차사는 어딜 가든 그 왕 후보 혼령과 항상 같이 다닌다고 했다. 여기서 마주쳤다면 서로 난감했을 것이다.

“이 일로 스승님이 곤욕을 치르게 되지는 않겠죠? 이리 만물 대여점의 직원이 저승의 행사를 방해했다고 염라대왕이 막 꼬투리 잡는다거나…….”

“그것보다는… 애들 싸움에 끼어들었다고 놀릴 것 같네.”

이리는 진심으로 민망해했다. 도진은 다른 부분에 발끈했다.

“애들 싸움? 방금 애들 싸움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수준 높은 애들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저 도술 꽤 잘 펼쳤다구요. 그리고 강림도령은 도술 대결 경력이 천 년일 텐데 저는 이번이 처음이었잖아요. 그 점 감안하면 그냥 제가 이긴 거라고 봐도 무방해요. 제 안에선 솔직히 제가 이겼어요.”

“강림도령이 많이 봐줬어. 상대가 살아 있는 인간이고 쌓은 덕이 제법 되어 보이니 손속에 사정을 둔 거지.”

“…그게 사정을 둔 거면 본래는 대체. 아, 아니. 뭐 결국엔 스승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잖아요. 그 칼날 세례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꽃잎 세례로 바뀌는데… 강림도령도 맥이 풀렸을걸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구나 싶어서.”

“도진아.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다섯 살 아이와 팔씨름에서 이긴 어른에게 칭찬하는 격이니까 그만하렴.”

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 정도라고요…? 그래도 강림도령이 천 년이나 산 사람인데요.”

“나는 아직 졸려서 자야겠어. 다 치우면 깨워. 용마를 타고 왔으니 같이 돌아가자.”

이리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도진은 조금 뜬금없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리가 잔다기에 일단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꼼꼼하게 덮어 줬다. 그러고는 주위를 훑었다.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고 있자니 이리가 뜬금없이, 급하게 잠을 청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먹다 남은 잔칫상과 구겨진 옷과 신발들의 수습은 당연히 도진의 몫이었다.

‘노량 새끼, 죽기 전에 청소나 시키고 보낼걸!’

이제와 후회하는 도진이었다.

5. 통영 도깨비 마을

오늘도 이리 만물 대여점의 아침은 여느 때와 같았다.

도진은 아침 일찍 일어나 고객 맞을 준비를 마치고, 이리가 가장 좋아하는 차를 내렸다. 딱 온도가 따뜻해졌을 때쯤 이리가 계단을 내려왔다. 두 사람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정원이 보이는 작업대 앞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셨다.

상수리나무에는 듬성듬성 꽃이 피어 있었다. 다른 나무들과는 성장 속도가 달라 두어 달에 한 번씩 꽃이 만개했다. 이제 열매가 맺히고 나면 잔챙이 위아들을 불러서 대량 식량 나눔을 할 예정이었다. 가지치기할 때도 그렇고, 열매가 맺힐 때도 그렇고 이리는 항상 잔챙이 위아들을 불러 잔치를 열기 때문에 대여점 근처의 작은 산에는 항상 잔챙이들이 드글드글했다.

“스승님, 그거 아세요? 여기 산에 천연기념물 새들이 자꾸 발견돼서 학자들이 엄청 주시하고 있대요. 혹시 위아 녀석들이 둔갑한 걸까요?”

“아닐 거야. 초목과 짐승에 뿌리를 둔 위아들은 기본적으로 환경 오염을 정화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거든. 산이 깨끗해지니까 동물들도 자연스럽게 저 산에 모여드는 거지.”

“잔챙이들도 쓸모가 있네요. 그럼 사물에 뿌리를 둔 위아들은 오염 정화 못 해요?”

“환경 오염 정화는 못 하지만 근처의 한과 원념, 사기 등 그릇된 기운을 흡수해서 그곳을 깨끗하게 만들어 준단다. 그래서 도깨비 마을 중에는 가는 길은 어쩜 이럴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운데, 정작 마을 안에는 원념과 사기가 가득한 경우도 있어.”

대한민국에 도깨비 마을은 여러 군데가 있다. 지리산 청학동, 단양 영춘면 석굴, 횡성 태기산, 통영 미륵산 등. 도진은 산도깨비, 한도깨비, 흥도깨비 등 마을을 이루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도깨비들은 만나 봤지만, 도깨비 마을에는 아직까지 어디에도 간 적이 없었다.

“꼭 한번 가 보고 싶네요. 이번 여름에 저 좀 관광 좀 시켜 주세요. 완전 납량특집에 시원할 것 같아요.”

“관광지가 아니야…. 그리고 도깨비 마을에 방문할 일이 생긴다는 건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뜻이라 최대한 갈 일이 없는 편이 좋아.”

“왜요? 도깨비들은 평상시엔 방문을 막고 있어요?”

“방문을 요청하면 거부하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폐쇄적이라 웬만한 사고는 자기들끼리 해결하거든. 외부에 도움을 청하는 일은 거의 없지. 최근에는… 아파트가 들어서서 터전을 몽땅 잃고 난 후에야 어디 가서 살아야 하냐며 도움을 청했었어.”

인간들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터전을 잃는 위아들은 꾸준히 발생해 왔다. 보통 그런 경우 위아들은 제 영역에 인간들이 들락날락하는 초기부터 바로 대여점이나 복지관에 달려가는데, 도깨비들은 마을이 없어지고 아파트가 끝까지 올라오고 인간들까지 다 입주하고도 한참 후에야 이리에게 살 곳이 없다며 도움을 구했다.

좋은 말로 하면 독립심이 강하고, 나쁜 말로 하면….

“미련하고 멍청하네요.”

“…도진아.”

이리가 도진을 그윽하게 바라봤다. 혼내려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욕을 안 하려고 노력은 하는구나.”

평소라면 ‘병X’이라고 했을 도진이 멍청하다는 표현으로 끝내자 오히려 칭찬을 하는 이리였다. 거기에 대고 도진은 당연하다는 듯 콧구멍이 보일 만큼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고객의 예약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만 마시면서 초인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는데, 그 대신 이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약사]

발신자 이름을 보고 도진이 얼른 손을 뻗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선인님.

“응, 약사.”

약사는 다소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럽겠지만 통영 도깨비 마을에 가 보셔야겠습니다. 최대한 빨리요.

‘최대한 빨리’라고 해도 가게 여는 사람이 당장 문 닫고 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리는 도진에게 대여점을 맡겨 두고 혼자 갈까 했지만 도진이 아직 홀로 가게를 지킬 수준은 되지 않아서 일단 급한 일만 처리하고 ‘통로’를 통해 함께 내려왔다.

약속 장소인 미륵산 초입에서 약사 신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보다 약간 큰 키에 피부는 희멀건했고, 긴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남성 모습이었다. 겉보기로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약사.”

“선인님. 오셨어요. 도진이, 많이 컸구나. 안녕.”

“안녕하세요.”

“일단 마을로 가면서 얘기하죠.”

셋은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선인님의 명으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종 역병을 조사하던 중, 역병이 생각보다 자주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사가 조사한 바 이 역병은 작년 12월에 처음 발생해 많게는 세 자릿수, 적게는 한 자릿수의 희생자를 만들어 내며 한반도 전역에 퍼졌다. 희생 대상은 대부분 요물로, 나비 선인의 요물급 지렁이 321마리가 가장 많이 희생된 수였는데, 이 세계에서 321마리의 떼죽음은 사실 그렇게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다. 인간 사회로 비유하자면 ‘버려진 폐교에 있던 거미 321마리가 떼죽음을 당했어요.’ 정도였다. 특이한 일이긴 하나 결코 정부가 나서서 수사할 정도로 중대한 일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워낙 작은 규모로 짧은 기간에 요물들만 죽이고는 사라지기 때문에 근처의 산신령들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근 나비 선인의 영물 10마리가 죽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리는 이 일을 보고받지 못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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