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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도령은 고민을 하는 듯 말이 없었다. 덜덜 떨고 있던 저승사자들이 수군거렸다.
“월직차사님이 장사 출신 맞지?”
“맞아. 이제 저 인간은 죽었어. 자기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이제 알게 되겠지.”
그 대화를 들은 노량이 걱정스러운 듯 도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인간아. 정말 괜찮겠느냐…? 내가 대결을 해도 된다. 나는 이제 죽으니까 뼈가 부러져도 상관없다.”
“너는 저기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어.”
도진은 월직차사가 장사 출신 저승사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혀 겁나지 않았다.
‘장사의 본능’
장사는 상대가 나보다 강한지 약한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한다. 도진이 요리이기와 씨름을 할 때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본능 때문이었다.
산도깨비 요리이기를 이기고, 장사 출신 월직차사 이덕춘까지 이긴다면 스승님께서 날 다시 보시지 않을까. 더는 아이 취급하지 못하실 것이다.
욕심 어린 눈에 이글이글한 불길이 맴돌았다.
“덕춘아. 물러서라.”
그때 강림도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도, 도령님. 내가 상대하겠습니다. 도령님이 나설 일이 아닙니다.”
“보아하니 네가 나설 일도 아니다.”
“하지만 도령님은 씨름 같은 몸 쓰는 일은…. 그 뼈다귀 같은 팔로 어찌…….”
“…뒤에 가 있거라.”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선수는 그쪽이 알아서 정하는데. 저승 1.5인자 팔을 부러뜨렸다고 저 벌주면 안 됩니다?”
“씨름은 하지 않는다. 대신 도술 대결을 하지.”
“…도술이요?”
“그래. 당연히 도술을 펼칠 수 있겠지?”
물론 도진은 몇 가지 도술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도술을 펼칠 때는 사소한 거짓말을 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덕이 소모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주술만을 사용해 왔다.
게다가 장사의 본능까지 갈 것도 없이 강림도령과의 도술 대결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이성이 말해 왔다.
하지만…….
‘스승님은 내 도술 잠재력이 선인을 뛰어넘는댔어.’
들끓는 호승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 인간아. 내가… 내가 대결하겠다. 너는 피해 있거라.”
“아, 좀. 걸리적거리니까 닥치고 구석에 처박혀 있으라고.”
도진이 노량의 뒷덜미를 들어다 구석에 던지고 강림도령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강림도령의 매끈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눈빛에는 한 줄기 호기심이 엿보였다.
“선공은 제가 할까요? 보통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선공을 양보하고 그러던데.”
“앞으로 1분간 내가 공격을 할 테니 그것을 막아라. 1분간 막으면 네가 이긴 것으로 하겠다.”
“좋습니다. 결계 정도는 강림도령님이 만들어 주실 거죠?”
도진은 장막을 둘렀다. 푹신한 재질로 할지, 딱딱한 재질로 할지 고민하다가 딱딱하게 만들었다. 도술 대결이란 말에 눈에 띄게 안심한 월직차사는 두 차사들 옆에 앉아서 구경했다.
강림도령은 집안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결계를 만든 후, 허공에 팔을 저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 수십 개가 생성되었다. 칼날들이 장막에 쏟아져 내리고, 딱딱하고 단단한 장막과 부딪치자 채앵! 챙!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그러나 그 부서진 파편들 또한 날카로워 장막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도진은 이번엔 장막에 화염을 씌웠다. 칼날이 닿는 즉시 녹아서 검게 사라졌다. 강림도령은 손을 휘저어 거실 허공에 먹구름을 소환하고 장대비를 내리게 했다. 화염이 사그라들고 금이 갔던 틈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도진은 이번엔 장막을 얼게 만들었다. 쩌저적- 얼음이 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서린 기운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 노량과 월직차사, 저승사자들이 하얀 입김을 뿜었다. 얼음이 얼면서 틈 사이로 새는 물방울도 함께 얼어 도리어 단단해졌다.
강림도령은 눈부시게 환한 구체를 만들어 공중에 띄웠다. 그것은 태양빛이었다. 구경꾼들이 흐르는 땀을 닦았다. 찌는 듯한 열기에 장막이 빠르게 녹았다. 도진 또한 전신이 땀에 젖어 있었다. 마침내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이젠 어떡하지? 폭신하게 만들까? 몇 초 남았지? 아니, 20초밖에 안 지났어? 아, 씨발. 망한 것 같은데. 아니야. 포기하지 말자. 그래, 바위. 햇빛에 강한 바위를 만들어서….’
도진이 뭐라도 하려는 순간, 강림도령이 다시 수십 개의 칼날을 소환했다. 칼날은 녹은 장막을 쉽게 뚫고 도진에게 향했다.
“……!”
도진이 눈을 부릅뜨는 그때였다.
사아아- 바람 부는 소리와 함께 선득한 칼날 세례가 멈췄다. 도진은 시퍼런 칼날이 하얗고 붉은 꽃잎으로 변해 하늘하늘 흩날리는 풍경을 멍하니 구경했다.
“오랜만이구나. 강림.”
꽃잎 사이로 누군가 나타났다.
하얀 옷과 새카만 머리칼, 자그마한 체구.
“……이리 선인님.”
강림도령이 흠칫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이리는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림. 네가 상대하고 있던 인간은 내 제자란다.”
“죄송합니다.”
강림도령이 먼저 사과한 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저자가….”
“그래. 내가 등록한 왕 후보야.”
강림도령이 도진을 다시금 샅샅이 관찰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시선이었다.
도진은 괜히 옷을 탁탁 털고는 일어나 이리의 옆에 섰다.
“스승님. 안 도와 주셨어도 됐는데. 제가 이겼을 거라구요.”
“도진아. 그건 농담이 아니라 거짓말에 속해. 제발 말 좀 가려서 해.”
“아니, 농담도 아니고 완전 진심이었는데요? 참 나. 규율 융통성 없는 거 맞다니까요. 지가 뭘 알아. 본인이 제일 잘 알지. 내가 가능하다는데 왜 규율이 한계를 정해요. 저는 뭐든 할 수 있어요. 잠재력 무궁무진!”
“그래…. 일단 고생했고 노량 옆에서 좀 쉬고 있어.”
도진은 그 말이 왠지 아까 자신이 노량한테 했던 ‘걸리적거리니까 닥치고 구석에 처박혀 있으라고.’와 크게 다르지 않게 들렸다.
그는 물론 구석에 처박히지 않았다. 당당하고 뻔뻔하고 태연하게 어깨를 활짝 펴고 이리 옆에 붙박이처럼 섰다.
“천지신명을 뵙습니다.”
“천지신명을 뵙습니다.”
월직차사와 저승사자들이 이리에게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짐승과 초목, 사물 출신 위아들은 이리 선인처럼 까마득히 높은 분을 봐도 이렇게까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데, 역시 인간 출신들은 예의범절에 집착하는 종족이었다.
“이곳에서 이리 선인을 뵐 줄을 몰랐습니다. 하지숙이 선인과 연이 있는 인간이었습니까? 그렇다면 혼을 수거하지 않겠습니다.”
“나와는 딱히 연이 없어. 다만, 도진과 대결을 해서 이기는 쪽의 말을 듣기로 했지?”
“예.”
“도술 대결은 너의 승리야.”
“맞습니다.”
“하지만 씨름 대결은 도진이 이겼을 거야.”
“…….”
월직차사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으나 강림도령이 눈짓으로 그를 말렸다.
“그자는 장사였군요.”
“맞아.”
가만히 생각하던 강림이 담담히 명부를 꺼냈다.
“저자는 씨름 대결을 제안했으나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도술 대결로 바꿨습니다. 만약 씨름 대결을 했다면 그가 이겼을 테니 이번은 비긴 것으로 하는 게 옳습니다.”
강림은 지숙 이름 옆의 시간을 원래대로 고쳤다.
“원상 복구하니 이미 수거 기간이 지나 버렸군요. 어쩔 수 없지요. 저승의 대원칙에 따라 하지숙의 혼은 추후에 명부에 다시 이름이 오르면 그때 수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언제나 현명한 판단이야. 강림.”
“이리 선인께 칭찬을 들었으니 잘 간직했다가 자랑해야겠군요.”
강림도령이 명부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신종 전염병 건을 조사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어 갑니까? 며칠 전 약사 신령이 말한 자료는 잘 송부했습니다만.”
“아직 보고 받지 못했어. 앞으로도 요청이 오면 잘 협조해 줘.”
“물론입니다.”
“염라는 잘 지내지?”
“늘 그렇듯 잘 못 지내십니다. 오늘의 일을 얘기해 드리면 더 앓으시겠군요.”
“제1차사의 혼령은 어때? 수련 잘하고 있고? 경쟁자한테 귀띔 좀 해 줘.”
강림의 매끈한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그 혼령은 철도 없고 골칫덩이에 사고만 치고 다니는 왈가닥입니다. 저승에서 천 년을 일했지만 그렇게 뻔뻔한 혼령은 처음 겪습니다. 하지만 이리 선인의 제자도 꽤나 뻔뻔하군요.”
“도진이도 뻔뻔함으론 누구에게도 지지 않지.”
도진은 이쯤 끼어들어서 ‘뻔뻔대결이라도 할까요’ 농담하려다가 그만뒀다. 만약 도진이 끼어들었다면 강림은 ‘대결하지 않아도 승자가 나온 것 같군’이라고 받았을 터였다.
평화롭고 한가한 대화가 끝난 건 노량이 죽을 시간이 되어서였다.
“선인께서 원하신다면 노량의 혼도 거두지 않겠습니다.”
“그럴 순 없지. 나한테 빚을 만들어 두려는 속셈이잖아.”
“예. 그런 의도였습니다만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 저 혼은 제가 직접 거두겠습니다.”
강림도령이 명부를 펼쳤다. 노량은 죽음에 초연한 듯 보였으나 막상 눈앞에 닥치자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하지숙을 한 번만 보고 오면 안 되겠느냐?”
“보고 오거라.”
노량이 울면서 지숙의 방으로 들어갔다. 도진의 발이 움찔했으나 이리의 곁을 벗어나진 않았다.
약 잘 챙겨 먹고, 늘 꼭꼭 씹어 먹고, 운동도 열심히 알고, 너무 울지 말고…….
이제 물을 데워 줄 수가 없어서 걱정이다. 따뜻한 물을 마셔야 할 텐데…….
늦잠 실컷 자고 여행도 하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라. 지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