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23화 (23/203)

23

지숙은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잤고, 노량과 도진은 거실에 남았다.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도진이 노량이 대접한 차를 마셨다. 노량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좀 더 수행을 하고 덕을 쌓았다면 이런 인간의 병쯤은 낫게 해 주었을 텐데…….”

아픈 가족이 있는 이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노량도 결국 자조로 끝이 났다.

노량은 지금까지 여러 사소한 방식으로 지숙을 도왔을 터였다. 그러나 이 일은 물을 따뜻하게 데우는 것 이상을 요구하는 일로, 한낱 늙은 복배바리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지숙과 64년을 살았다. 아기는 가끔 눈이 트여서 우리를 볼 때가 있지 않느냐? 딱 한 번… 지숙이가 내 손가락을 쥔 적이 있었다. 이렇게 손가락을 꼭 쥔 채 눈을 마주치고서는 꺄르르 하고 웃었다.”

“그만 좀 말해.”

“나는 그 집에서 100년을 넘게 살았는데 지숙이가 나올 때 같이 나왔다. 지숙이가 이 아파트에 터를 잡은 건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지숙이는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한다. 마음에 들어 하는 터전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무시무시한 인간아. 한번만 눈감아 주면 안 되겠느냐? 제발 부탁이다. 부탁한다. 인간아….”

노량이 호소했다. 도진은 골치가 아플 만큼 고민했다.

저승의 명부를 속이는 일을 무단횡단이라고 비유했지만, 사실 정확한 비유는 아니다. 무단횡단이란 남에게 필연적으로 민폐를 끼치는 행위인데, 이 일은 저승사자들 말고는 민폐를 끼치지 않으니까. 흔한 민담에서처럼, 죽어야 하는 존재가 죽음을 피하면 다른 무고한 희생자가 생긴다든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네가 판단했을 때 허튼 일에 사용하려고 하면 못하게 막아.’

‘제가 판단했을 때 허튼 일이 아니면요?’

‘허튼 일이 아니라면 협조해야지.’

스승님은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한 걸까? 그렇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할 줄 알고 나를 보낸 걸까.

‘에라이, 씨발. 저승 쪽이랑은 껄끄러운데.’

저승이랑 얽히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도진은 정말로 저승과는 껄끄러운 관계였다.

세상에는 다섯의 천지신명이 있다. 이 천지신명은 진현계의 임금님, 하계의 찰마 공주와 같은 배분으로 취급한다. 임금님의 규율을 따르나 결코 임금님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섯의 천지신명은 다음과 같다.

중간계의 이리 선인, 저승의 염라대왕, 극락의 옥황상제, 하늘꽃밭의 마고할미, 천지천해의 사방위신.

임금님이 하야를 선언하고, 차기 왕 후보 등록 기간이 되었을 때 이리가 가장 먼저 도진을 등록했다. 그 다음으로 사신방 중 현무가 왕 후보로 어떤 어린 신수를 등록했고, 불과 한 달 전… 후보 등록 기간 마지막 날 저승사자인 49차사 중 우두머리격인 제1차사가 왕 후보로 어느 혼령을 등록했다.

천지신명 중 세 세력이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저승은 대선 라이벌이란 말이지. 함부로 해서는 안 돼.’

도진은 위아들의 대선이 어떻게 치러지는지 모른다. 이리가 나중에 알려 줄 거라면서 아직은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네거티브가 난무하고 서로 끌어내리기만 반복하는 인간들의 대선 과정에 비추어 봤을 때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절대로 책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

한참 고심하던 도진이 입을 열었다.

“역시 이물을 사용하는 건 안 되겠어.”

“인간아…….”

“대신.”

도진이 단호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내가 하라는 대로 준비해. 지금 당장.”

* * *

캄캄한 밤.

지숙이 약을 마시고 잠들었다. 침대 그림자에서 스르르 나타난 도진이 도술로 결계를 만들자 노량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지숙이 이제 안 깨나?”

“귀에 대고 손뼉을 쳐도 못 들을 테니까 얼른 가서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알았다!”

노량이 거실에 나가서 도진이 사비를 털어서 사 온 넓은 식탁을 펼쳤다. 그리고 역시 도진이 사비를 털어서 산 고깃국과 흰쌀밥, 김치, 육전, 잡채, 도토리묵, 각종 나물무침 등 수십여 가지의 반찬. 후식으로 먹을 수정과와 한과까지 그야말로 잔칫상을 차렸다. 식탁 앞에는 비단 방석을 깔고 옆에 깔끔한 두루마기와 가죽신도 두 세트 세팅했다.

“부리부리한 인간아. 곶감 먹어라. 곶감 맛있다. 우리 복배바리들은 하루에 곶감을 열 개씩 먹는다.”

“너나 처드세요. 나 바쁘니까 말 걸지 말고.”

노량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도진은 손바닥만 한 짚신 인형을 현관문 안쪽에 두고, 아파트 단지의 원념과 사기(邪氣) 등 음기(陰氣)를 흡수하는 주술을 걸었다.

다음 차례에는 하지숙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불에 태운 후 그 재를 안방과 작은 방, 주방, 욕실, 베란다까지 집안 곳곳에 뿌렸다.

마지막으로 잔칫상 위에 도술로 장막을 둘러 보이지 않게 했다.

“다 됐어. 이제 불 끄고 닥치고 기다려.”

“그냥 여기 숨어 있으면 되느냐?”

“멍충아. 은신을 해야지.”

“나는 은신을 못 한다.”

도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노량에게도 은신술을 걸어 주었다.

두 사람은 거실 불을 끄고 어둠에 숨어 새벽 2시를 기다렸다. 일분일초가 흐르면서 노량은 점점 초조해지는 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 지숙이 옆에 있으면 안 되느냐?”

“지숙이 얼굴 한번 보고 싶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

“긴장돼서 토할 것 같노라.”

그런 칭얼거림이 이어지자 도진이 확 짜증을 냈다.

“아, 좀 그만 좀! 안 닥치면 안 도와준다?”

“아, 알았다. 닥치겠다.”

노량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어.’

현재 시각 새벽 1시 48분, 도진은 오랜만에 느끼는 긴장감에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요리이기를 힘으로 이겼으니 이번에 저승사자를 주술로 이긴다면 성취감이 엄청날 터다.

‘‘저승사자 속이기 대작전’이라고 이름 지어야지.’

제 판단이 틀리면 어떡하나 걱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이리에게 제 업적을 떠벌릴 생각이 신이 나는 도진이었다.

어쨌든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도진은 저승사자를 속이는 세 가지 방법을 알고 있는데, 바꿔 말하면 도진이 알 정도로 세간에 널리 퍼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저승사자들도 덫이라는 걸 눈치챌지도 몰랐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 새벽 1시 59분이 되었을 때 노량이 슬그머니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다른 복배바리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면 안 되느냐? 다들 자기 일처럼 도와줄 거다.”

“쓰읍. 이건 다른 새끼들한테는 철저히 비밀이라고 했지? 이 일을 알면 다들 자기네 가족도 도와 달라고 할 거란 말이야.”

“좀 다 같이 돕고 살면 안 되느냐? 인간 몇 명 수명 늘어나는 게 무슨 큰 문제라고….”

“이 아파트 사람들 수명만 늘어나면 잘도 문제 안 되겠다. 지는 곧 인간계 떠난다고 존나 쉽게 말하네. 그리고 2시 됐으니까 닥쳐.”

“…….”

노량이 끙, 하며 입을 다물었다. 도진은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구웅-

잠시 후 기묘한 울림이 울리더니 현관문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좀 더 집중하자 방문자들의 대화가 들렸다.

“40차사, 시간 됐어. 들어가자.”

“어…. 잠깐만. 38차사, 안쪽에서 뭔가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뭐? 무슨 기운…. 아니, 이게 무슨 어마어마한 음기야?”

두 명의 저승사자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현관 바닥에 있는 사람 모양을 한 지푸라기 인형이 근처의 음기를 죄다 빨아들였으니 바깥에 있는 사자들로서는 놀라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이 무시무시한 사기의 주인에 대해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더니 결론을 내렸다.

“강림도령께서 오신 거구나!”

“강림도령께서 이런 일개 인간의 혼을 거두고 다니시기도 하네.”

“그럴 수 있지. 명부에 중복해서 올라가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하여튼 일을 왜 이딴 식으로 하는 거람. 우리는 이만 가자.”

“구경하고 싶은데.”

“그랬다가 왜 일 안 하고 여기서 딴짓이냐며 불호령이 떨어질 수도 있어. 얼른 가자.”

“응.”

도진은 입을 틀어막고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노량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진의 신호를 기다렸다.

도진은 마침내 모든 기척이 사라진 후에야 말해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통했다! 이제 지숙이는 살았다! 지숙이는 손주의 손주의 손주를 볼 때까지 살아갈 거다!”

“아직 기뻐하기에는 일러. 30분 후면 다른 차사들이 또 올 테니까.”

“왜 오는 것이냐? 동료의 일 처리를 못 믿는 것이냐?”

“스승님 말로는 현대에 접어들면서 저승사자들이 명부에서 빠지는 혼이 없는지 크로스체크를 하고 있댔어.”

“…쓸데없이 일을 열심히 하는도다.”

둘은 30분을 더 기다렸다.

시간이 되었을 때 또다시 현관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21차사, 아직 체크가 안 된 곳이 이곳 맞아?”

“맞는데 음, 이 어마어마한 음기는 뭐지?”

“진짜 어마무시한데. 강림도령님이 안에 계신 건가?”

“강림도령이 직접 나서셨다면 30분 지연 중인 게 말이 안 되는데. 17차사, 일단 들어가서 확인하자.”

두 번째로 온 저승사자들은 첫 번째 녀석들과는 달리 속지 않았다.

똑똑똑. 문을 세 번 두드리고, “하지숙.”, “하지숙.”, “하지숙.” 이름을 세 번 부르자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동시에 도진은 전신에 오한이 들었다. 강건한 도진조차 섬뜩한 한기에 뼈까지 시릴 정도니 늙은 복배바리는 얼굴이 파래져서 깨꼬닥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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