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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만물 대여점-22화 (2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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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정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노량의 그림자 속에서 도진은 무척 당황하고, 황당한 상태였다.

꿍꿍이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럴 거라고는…….

인간에게 사용할 거라고는!

인간의 이물 사용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노량의 노래 가사처럼 60대 아주머니가 갑자기 회춘하더니 손주의 손주가 손주를 낳는 모습을 볼 때까지 산다면 인간 사회는 난리가 날 것이다.

그 정도 일이라면 아무리 이리라도 임금님에게 문책 받게 될지도 모른다. 도진은 인간 사회가 혼란하든 말든 상관없었으나 이리가 혼란해지는 건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이건……. 도진은 결단했다. 이건 고속도로 무단횡단이나 마찬가지다!

“야!”

“으아아아이구맙소사!”

도진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자 이제 막 잠들 준비를 하던 노량이 놀라 까무러쳤다. 도진은 아주머니가 깨지 않도록 노량과 제 주위로 결계를 쳤다. 노량은 겁에 질린 채 거실 구석에 바짝 붙었다.

“대, 대여점의 무시무시 부리부리 아닌가?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느냐?”

“네가 음흉한 짓 할까 봐 따라왔지. 역시나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었군. 이물들은 내가 회수할 거고, 너는 씨발 영원히 고객 자격 박탈이야.”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선인께서 허가하셨는데 왜 달라고 하는 것이냐.”

“선인께서는 네가 이 이물을 사용하라고 허가하셨지. 저 인간을 살리라고 허가하신 게 아니거든.”

도진이 성큼성큼 침실로 향하자 복배바리가 으어어으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도진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제발 봐 줘라. 이번 한번만 눈감아 주면 내 덕을 모두 주겠다!”

“통할 사람한테 로비를 해라.”

“그대는 도사가 되기 위해 적덕 중이라고 들었는데 180년 어치의 덕이 탐나지 않느냐?”

“너 180년 어치 없는 거 다 알거든.”

“아, 아까 이물 값으로 선인님한테 좀 드리긴 했지만 아직 많이 남았다.”

“이 새끼,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아주. 원래부터 네 덕이 며칠치밖에 없어서 스승님이 일부러 조금만 받으신 거였어. 이제 보니 저 아주머니의 수명을 늘려 주느라 네 덕을 소모하고 있었던 거로군.”

노량이 히끅, 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정곡을 찔린 건지 거북이 목이 쏙 안으로 들어가 눈만 빼꼼 나와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도진은 혀를 찼다.

“나는 융통성이 넘치는 사람이거든? 준법정신이 그렇게 철저하지 못한 놈이란 말이야. 하지만 이물로 인간의 수명을 늘려서 사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건 눈감아 줄 수 없어. 발로 차 버리기 전에 비켜.”

위협적인 어조로 윽박지르자 노량은 흠칫 떨었다. 하지만 그렇게 겁먹은 와중에도 도진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다리를 부여잡고 매달렸다.

“제발. 제발 내 얘기를 듣고 결정해라! 너는 인간이 아니냐? 인간으로서 지숙이가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관심 없고. 진짜 확 차 버린다?”

“하지숙은 64살밖에 안 되었다! 너무 어린 나이다. 9살부터 일을 했다. 55년간 쉬지 않고 일하면서 홀로 자식을 세 명이나 키웠다. 세 명 다 결혼시키고 자기 인생 시작한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암이라는 병에 걸린 거다. 너무 가엽지 않느냐?”

“암에 걸린다고 바로 죽진 않아. 병원에서 치료 잘만 하면….”

“지숙이는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보다도 적게 남았다!”

“…뭐?”

도진이 노량의 목덜미를 잡아 대롱대롱 들어올렸다.

“너 또 거짓말이냐?”

“거짓말 아니다! 직접 확인해라.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되지 않느냐.”

노량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 복배바리는 현재 시각 03시 30분 기준으로 수명이 24시간 30분 남았다. 그런 노량보다 짧다면…….

도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은 복배바리를 대충 내동댕이치고 침실로 들어갔다. 이번엔 노량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지는 않았다.

지숙은 어디가 아픈 듯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노량은 먼저 석쇠 모래시계와 금물 금붕어를 잽싸게 챙겨 주머니에 쏙 넣은 다음 지숙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괜찮다. 지숙이 안 아프다. 아픈 거 싹 나았다.”

노량이 이마를 쓰다듬는 사이 정말 고통이 가신 듯 지숙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환자를 잠시 내려다보던 도진이 양 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친 뒤 비스듬히 틀었다. 그리고 손을 뗀 후 손바닥 사이에 만들어진 투명한 구체를 물을 끼얹듯 제 안면에 확 집어던졌다. 그러자 눈가가 따뜻해지면서 방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게 보였다.

[하지숙 – 22시간 27분]

“…….”

노량의 말이 맞았다. 지숙의 일생은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정확히는 02시 1분에 끝날 예정이다.

복배바리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도진을 올려다봤다. 도진은 아우, 씨. 머리를 벅벅 긁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날 60대 중반이면 너무 이른 죽음인 게 맞다. 마음은 안타깝지만 이렇게 안타까운 사람들이 한둘인가? 당장 병원에만 가도 수두룩한데. 그런 안타까운 사연들마다 다 이물의 힘을 빌려준다면 세상은 엉망진창 아포칼립스가 되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인간아. 이건 어떠냐? 당장 이물을 가져가지 말고 내일 하루만 함께 해 봐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느냐?”

그때 도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리가 남긴 말이었다.

‘노량의 수명은 앞으로 25시간 남았어. 25시간 동안 노량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면서 네가 판단했을 때 저 이물들을 허튼일에 사용하려고 하면 못하게 막아.’

그렇다. 이리는 25시간이라고 말했다. 바로 판단을 내리지 말고 25시간 동안 관찰하면서 판단하라고 했다.

이리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았어.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정말 다행이다. 고맙다. 그런데 난 이제 자야 한다…….”

“뭐 이 새끼야?”

“…….”

“야.”

“…….”

“야, 자냐? 지금 잠이 와?”

새벽에는 잠을 자야 하는 요괴인 복배바리는 도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조그마한 것이 그 와중에도 지숙을 지키겠다고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도진은 어처구니가 없이 둘을 지켜보다가 곧 노량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 * *

지숙은 아침 여섯 시에 기상했다. 지숙이 잠에서 깨서 일어나 앉자 노량도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노량은 도진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석쇠 모래시계와 금물 금붕어를 꺼냈다. 그러다가 제 그림자에서 “씁!” 하는 소리를 듣고 얼른 다시 집어넣었다.

지숙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아침을 차렸다. 행동이 느릿했고, 얼굴은 회색빛이었다. 슬픔에 잠긴 모습이었다.

“국이 너무 짜다, 지숙아. 오래 살려면 저염도 식단으로 먹어야 한다. 나물 반찬도 좋지만 점심에는 꼭 고기를 먹거라. 그래도 이제 밥은 꼭꼭 씹어 먹는구나. 나름 나으려는 노력은 기울이는 것 같아 좋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그렇게 말해도 안 듣더니 결국 병이나 얻고 이게 뭐냐. 그래도 지금은 잘 노력하고 있다. 그건 칭찬한다. 하지만 국 간은 좀 더 밍밍해야 한다.”

노량은 혼자 아침을 먹는 지숙의 맞은편에 앉아 엄청나게 잔소리를 했다.

지숙이 약을 먹을 때는, 물이 너무 차갑다며 몰래 미지근하게 데워 주고.

지숙이 아침 드라마를 볼 때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등장인물 욕지거리를 내뱉었으며.

지숙이 산책을 나갈 때는 따뜻하게 입으라고 잔소리를 퍼붓고는 쫄래쫄래 따라 나왔다.

지숙의 보호자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하고, 반려동물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지숙은 산책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통증에 급히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진통제를 삼킨 지숙은 약 봉투를 한참을 보고 있다가 거실에 던졌다. 그러고는 아아아, 비탄 어린 신음과 함께 거실에 주저앉았다.

지숙이 통곡하면서 가슴을 두드렸다.

노량이 가만히 쭈그려 앉았다.

“무시무시한 인간아…. 지숙이를 봐라. 가엽지 않느냐? 지숙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 죽었고, 아버지는 술중독자였다. 지숙이는 9살 때부터 일을 해야만 했다. 27살에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함께 자그마한 식당을 개업했다. 남편은 지숙이가 36살일 때 죽었다. 지숙이는 혼자서 세 자녀를 키웠다.”

무시무시한 인간은 남의 일생 따위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그냥 봐주기로 했다.

“휴일은 2주에 하루였고,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했다. 그러다가 저번 달에 막내딸을 마지막으로 세 자녀가 모두 결혼하고, 지숙이는 식당을 팔았다. 그때까지는 몸이 아프지도 않았다. 이제 실컷 늦잠 자고 여행을 다닐 거라며 단골손님들에게 자랑도 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통증을 느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병원에 갔다가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자식들에게는 걱정 말라고 말하면서 혼자 있을 때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는 한다. 지숙이는 억울한 거다. 이제야 제 삶을 살아 보려는데 아픈 병에 걸렸다는 게 너무 원통한 거다. 심지어 병원에서는 장기적인 싸움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잘 싸워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않느냐? 지숙이는 시간이 많지 않다.”

많지 않다 못해 바로 14시간 후면 죽을 예정이다.

“지숙이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열심히 싸워서 이겨 내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갑작스레 죽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원혼이 되겠지.

“분명히 원혼이 될 것이다. 지숙이는 원혼이 되기에는 너무 착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 일만 하느라 나쁜 짓 할 시간도 없었다. 64년을 성실하게 살았는데 말년에 억울한 일을 당해서 억울해하다가 원혼이 되어서 억울하게 지옥에 간다면 그것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

통곡하던 지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흩어진 약 봉투를 주섬주섬 주워서 식탁에 정리하고 욕실로 들어가서는 찬물로 세수했다. 거울 속 자신을 또렷하게 쳐다보며 “정신 차리자” 다짐하는 목소리는 정말로 장기전을 각오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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