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5화 (1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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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리가 이 사람을 도와 준 이유는 자녀가 미신에 빠진 데에 제 탓도 일부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재작년의 ‘퇴마 영상’ 이후로 영상을 본 사람에게든, 안 본 사람에게든 귀신 열풍이 불었다. 흉가체험, 위자보드, 굿. 심지어 나홀로 숨바꼭질 같은 근거 없는 심령 체험까지….

이리는 대여점을 운영하면서 인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만한 일들을 숱하게 해 왔다. 위아들의 의뢰를 들어주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할 때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는 그로 인해 왕세자가 바뀐 적도 있다.

그때와 비교하면 아주 약소한 일이긴 해도….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현대에 들어선 이후에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임은 맞기에 가까운 곳에서 영향 받은 이들이 보이면 이 조경업자의 딸처럼 도와주고는 했다.

“요즘 보니까 유명한 연예인도 그놈의 퇴마인지 뭔지에 빠졌더만. 방송에만 나오면 그 얘기를 하대.”

“이석진 말이군요.”

“그래. 이석진. 연기는 참 잘하는 사람인데 요즘 말하는 거 보면 좀 이상해. 귀신 말고 뭐냐 요괴인가. 요괴가 있다고 단정을 하더라. 새보름 연구회 같은 것도 들었다던데 이상한 사이비에 빠진 거 아냐?”

“미신이랑 사이비랑 한 끗 차이긴 하죠.”

“도진이 너도 막 심령 체험하겠다고 가출하진 않을 거지?”

“안 그래요. 그렇게까지 귀신이 보고 싶진 않아서.”

얼마 전에도 생령과 반나절을 함께 보낸 도진이 피식 웃었다.

이리는 조금 표정을 굳히고 최근 거듭 듣고 있는 이름을 되새겼다.

‘이석진, 새보름 혹은 새보르미 연구회.’

생령 민지연도 이석진과 연구회를 언급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각각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이름을 들었다. 두 번까지는 우연일 수 있으나 만약 한 번 더 누군가 그 이름을 언급한다면 그때는 그자에 대해 알아봐야 할 터였다.

“그려. 평범하게 살아. 평범하게. 그나저나 이 약과 진짜 맛있네. 어디서 샀어?”

이 약과는 얼마 전 화이트 데이 때 도진이 유명한 장인에게서 특별히 공수한 것이었다. 그 유명한 장인은 바로 청주의 요리이기로, 평범한 인간은 구할 수 없었다.

“친척이 줘서 몰라요. 좀 더 줘요?”

도진이 묻자 곽성훈이 많이 먹었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 가지들은 평소처럼 놓고 가면 되쥬?”

“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나야말로 20년째 고맙지. 앞으로도 잘 부탁혀.”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에.”

“아저씨, 잘 가요.”

“어엉. 잘 있으라.”

곽성훈이 대문을 열고 나갔다. 맑고 예쁜 청년과, 위압감 느낄 정도로 잘생긴 청년이 손을 흔들었다. 곽성훈도 마주 보고 흔들었다.

그리고 대문이 닫히자… 곽성훈의 눈이 잠시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보자. 다음 일정이 어디더라.”

곽성훈은 둘과의 모든 대화를 잊어 버렸다. 그리고 6월, 이 대문을 넘어오는 순간 다시 생각날 것이다. 이리의 도술이었다.

잔챙이 위아들이 가지치기한 나뭇가지와 나뭇잎, 벌레들을 나눠 가지며 대잔치를 한 후 희희낙락 대여점을 떠났다. 다시 업무로 돌아와 바쁘게 움직이던 중 대여점 전화가 울렸다. 가까이에 있던 이리가 받았다.

“네, 이리입니다.”

-거기가 이리 만물상이 맞는가?

목소리가 거칠고 투박한 데 비해 자연스러운 한국말이었다. 나이가 꽤 있는 위아인 듯했다.

“여기 만물상에서 대여점으로 바뀌었어. 우선 이름과 사는 곳, 용건부터 말해 줘.”

-석쇠 모래시계와 금물 금붕어를 사고 싶다.

“대여점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판매는 안 해. 그리고 석쇠 모래시계는 어차피 대여 금지 품목이고…. 금물 금붕어는 빌려줄 수는 있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래?”

-…나는 석쇠 모래시계가 필요하다. 대가는 얼마든지 치르겠노라.

“대여 금지 품목은 진현계의 임금님이 오셔도 못 드려.”

-전에는 잘만 팔지 않았나! 왜 갑자기 안 된다는 것이냐!

상대가 소리를 꽥 질렀다. 이리가 수화기를 뗐다가 다시 가져다 대었다.

종종 이런 경우가 있었다. 대여점으로 바뀐 지 100년이 되었는데도 얼마 전까지 잘만 판매하더니 왜 갑자기 바뀌었냐며 성질을 부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대여 금지 품목이라니 화가 날 만했다.

“석쇠 모래시계는 전에도 딱 한 번밖에 안 팔았어. 그게 500년은 된 것 같구나. 반드시 필요하다면 빌려줄 수는 있는데 일단 대여점에 내방해서 상담을 해 보고….”

-나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 덕을 모두 줄 테니 석쇠 모래시계를 다오!

이리는 조금 놀랐다. 덕을 모두 준다는 건 다음 생에서의 행복을 포기한다는 뜻과 같았다. 0부터 다시 적덕한다고 해도 한번 모든 걸 잃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 두 배로 힘들 일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거지? 말해 봐. 도와줄게.”

-날 돕고 싶으면 석쇠 모래시계를 줘. 직접 가지러 가겠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저 바꿔 주세요.”

마당에서 위아들이 챙겨 가지 않은 잔해들을 정리하고 있던 도진이 어느새 다가와 부리부리한 눈으로 손을 내밀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그는 통화 내용을 모두 들었을 터였다. 바꿔 주면 성질만 낼 게 뻔해서 이리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러자 도진은 아예 수화기를 확 낚아채 갔다.

“야, 이 진상 새끼야. 안 된다는 걸 자꾸 달라고 고집만 부리면 안 되는 게 되게 되냐? …아니, 씨발.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한국말 못 해? 딱 보니 나이도 어린 게…! 야!”

뚜우- 뚜우-

도진이 뚝 끊긴 수화기를 부여잡고 으아아악 포효했다. 이리는 도진이 던져 버린 수화기를 공중에서 잘 붙잡아 전화기에 얹었다.

“으아악! 열 받아!”

상대가 멋대로 전화를 끊으면 참을성 많은 사람도 화가 날 텐데, 다혈질 도진이니 더 할 것이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도진을 다독이려는데 다시 벨 소리가 울렸다.

“내가 받아요!”

이리가 흠칫 놀라는 사이 도진이 쏜살같이 달려와 수화기를 들었다.

“야, 이 새끼야. 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 개 같은 위아 새끼한테는 있어도 안-!”

도진이 우뚝 말을 멈췄다.

“……네. …옆에 계세요. 네. 바꿔 드릴게요.”

태연한 척하려고 하지만 무척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한 도진이 이리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스승님…. 나비 선인님이 스승님 찾으시는데요….”

* * *

나비 선인이 만나자고 한 장소는 서울 마곡에 있는 식물원으로 대여점과 가까운 곳이었다. 시간은 이리에게 정하라고 했는데, 저녁에는 줄줄이 고객들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어서 오후 3시를 택했다. 사람이 바글바글할까 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식물원은 월요일이라 문을 닫은 상태였다.

최첨단 경비 시스템을 갖춘 식물원이지만 이리를 앞에 두고는 마치 자동문처럼 문이 열렸다. 실내가 그리 어둡지 않아서 이리는 전등은 꺼진 상태로 두었다. 도진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비 선인님은 아직 안 왔나 보네요.”

“왔어. 지금 온실에 있네.”

“그래요?”

도진은 나비 선인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몇 번 들었으나 한 번도 실물로 본 적은 없었다. 진현계 주민으로 인간계에는 잘 내려오지 않는 선인이었으니까. 나이가 이천 살이 넘는다고 했다. 그래 봤자 이리보다는 어린 나이지만 일단은 이리와 친구 사이라고….

어떻게 생겼을지 혼자 상상해 보다가 식물원 온실을 내려다볼 수 있는 테이블 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포토존에서 사진 찍고 있네.”

“아….”

금발 여성이 서양 중세풍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온실 내 핑크빛 포토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사진사는 긴 꼬리를 가진 회색 털의 토끼였는데 인간처럼 두 발로 서 있었고, 서양 저택의 집사처럼 턱시도도 갖춰 입었다. 둘의 주위로는 오색찬란한 빛깔의 벌과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나비 선인님은 여성분이신가요? 저 토끼는 요괴?”

“진현계에서는 남성체인데 인간계에 내려올 때는 여성체를 취하더라고. 토끼는 장미토라는 이름의 영물로 나비의 권속이야.”

“권속….”

권속에 대해서라면 예전에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다.

인간, 초목과 짐승, 사물 등 위아가 아닌 존재를 강제로 위아로 만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여우 요괴의 경우 천 일간 여우 구슬을 상대에게 먹인다거나, 흡혈귀의 경우 천 일간 피를 상대에게 먹인다거나. 대개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인데 갈래의 끝에 다다른 존재들은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상대를 위아로 만들 수 있었다.

바로 ‘권속’이라는 권능을 사용하는 것이다.

상대의 동의 없이도 내가 저것을 권속으로 두겠다고 마음먹으면 상대는 위아가 되어 주인의 생명력을 이어받는다.

수하, 부하보다 좀 더 강한 결속력을 지닌 개념으로, 권속이 된 자는 주인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으며 주인은 권속이 어디에 있든 제 옆으로 소환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는 권속을 만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으니 예전에 권속이 되었겠지.’

이리 외의 다른 선인도, 주인과 권속이란 관계도 처음 접하는 도진이 신기한 눈빛으로 구경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나비 선인이 고개를 들었다. 뭔가 새침한 표정이었다. 도진이 일단 인사를 하려고 숙이는데 신형이 사라진다 싶더니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이 자가 새로운 임금이 될 사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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