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리 만물 대여점-14화 (14/203)

14

“…….”

“장사면서 도사고, 이리 선인을 후견인으로 뒀고, 선인으로 직행한 다음에는 진현계의 왕이 될 거고. 와, 미친. 이런 존재랑 연인이 되면 존나 끝내 줄 것 같다. 안 그래요, 스승님?”

“…….”

“스승님? 왜 갑자기 다른 데 쳐다보세요? 제 눈을 보세요.”

도진이 지그시 이리를 바라봤다. 욕망이 드글드글한 눈빛에 이리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저 사실은 옛날엔 이 괴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오히려 고마워요. 왜일 것 같아요?”

“글쎄…. 지금 시간이…….”

“스승님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

도진은 의자를 들어 이리 쪽으로 좀 더 붙어 앉았다. 당황한 이리는 찻잔이 동아줄이라도 되는지 꼭 붙잡고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이 괴력이 없었다면, 그리고 제가 뭔지 모를 뭔가 엄청난 존재가 아니었다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겠죠. 그러니까 뭐가 됐든 고마울 뿐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보다 지금 시간이…. 7시구나.”

“귀엽네요. 누누이 말하지만 언제까지 회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 잠깐. 지금 몇 시라고요?”

“7시.”

“…….”

일출 시간이 이미 지난 후였다. 느끼한 얼굴을 하던 도진이 순식간에 험상궂은 야차처럼 인상을 구겼다.

“설마 아류개미 이 새끼가…!”

따르릉.

때마침 대여점 전화가 울렸다. 도진이 받으려는 걸 이리가 도술까지 펼쳐 가며 막았다.

“네, 이리입니다. 아, 아류개미.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뭐? 식량을 찾았다고?”

으아악! 소리치려는 도진의 입을 이리가 손가락을 튕겨 막아 버렸다. 금언령이었다.

“아, 네가 구해 준 달팽이가 온 동네 달팽이들을 다 불러 모아서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찾아 줬다고. 그렇구나…. 고마운 일이네. …괜찮아. 걱정 말고 잘 자렴. 그래, 안녕.”

이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도진에게 건 도술을 풀었다. 도진이 으악! 악! 씨발! 악을 쓰면서 날뛰었다.

“이 진상 새끼들! 도깨비랑 씨름까지 해 가면서 구해 와 새벽 내내 식량을 만들었는데 뭐? 이제야 필요 없어? 이 개새끼들! 가만 안 두겠어. 스승님! 아류개미 어디 산다고 했죠? 받아야 할 덕 받아 내고 오겠습니다! 이 X새끼들!”

“말조심해. 덕 나간다.”

“나가라고 해요! 세 번 더 착한 일 하면 되잖아요!”

도진이 욕을 내뱉으면서 쌓아 놓은 덕을 열심히 날려 보냈다.

난감했던 분위기가 사라진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되면 아류개미와의 거래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어 버리고 만 셈이다. 정말 ‘노쇼 규칙’을 새로 만들어야 하나 싶은 이리 선인이었다.

3. 역병

인간은 모르는 하늘 위의 세계, 덕을 많이 쌓고 수행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곳. 진현계.

임금님이 다스리는 진현계에는 선인, 신수, 신령, 잡신 그리고 그들의 권속 등 많은 존재가 모여 살고 있다. 일정 이상의 덕이 있으면 집을 지을 수 있는데 대개 담백하고 평범하게 짓는 편이나 유독 눈에 띄는 화려한 궁이 하나 있다.

진현계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보다 더욱 화려한 곳. 오색 찬란한 비단으로 휘장을 만들고, 온갖 빛깔의 보석으로 장식해 놓은 궁의 소유자는 바로 나비 선인이었다.

나비 선인은 담백한 것보다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조용한 것보다는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해서 그의 궁은 항상 잔치 중인데, 오늘만은 달랐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대전에서 나비 선인이 화를 냈다.

“환장하겠네. 왜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도 얘기를 안 했던 거야?”

“…….”

“…….”

“입 다물고 있으면 해결될 일이야? 당장 대답 안 해?”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의 주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있던 나비들이 죄다 흩어졌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곧 다시 모여들었다. 나비 선인은 나비들이 귀찮은지 손을 휘휘 젓고는 다시 한번 재촉했다.

“왜 또다시 역병이 퍼진 걸 함구했냐고 묻잖아!”

“그것이….”

대전에 모인 열 명의 권속 중 가장 가까이 있던 권속 장미토(長尾兔)가 당장에 무릎 꿇고 읊조렸다.

“다들 가볍게 지나가는 병이라고만 생각한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무겁게 지나간 역병을 겪어 놓고 왜들 그렇게 방심했느냔 말이야.”

“저번 역병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다들 가벼운 감기 기운만 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열도 심하지 않고 재채기만 나는 정도였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죄다 죽어 버려서 모두 망연했었다고…. 저희도 연락을 받자마자 보고 드리는 겁니다.”

“연락 언제 받았어?”

“12분 전에 받자마자 알려드린 겁니다.”

10분 전, 다른 진현계 주민들과 잔치 중이던 나비 선인은 심각한 보고를 받고 잔치를 중단했으니, 장미토의 말이 사실이었다.

나비 선인이 이마를 꾸욱꾸욱 눌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가 찰랑거렸다. 보통은 하얀 빛깔의 우의(羽衣)도 오색찬란하게 염색했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번쩍번쩍 눈에 띌 지경이었다.

“지금 아래는 봄, 한창 꽃이 피고 벌꿀과 나비가 날아다닐 시기야. 이 시기에 역병이 두 번이나 퍼지는 건 문제가 있어. 그리고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손써 볼 시간도 없이 벌꿀과 나비 영물이 열 마리나 죽었어. 이건 심각… 아니. 심각 수준은 아니더라도 아무튼 이상한 일이야.”

“벌꿀이 아니라 꿀벌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나비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옆에 있던 다른 권속이 장미토를 팔꿈치로 툭 쳤다. 장미토는 더욱더 허리를 굽혔다.

기다랗게 다듬은 손톱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던 나비가 마침내 말했다.

“보고를 드려야겠다.”

“보고요…? 누구에게, 아. 임금님께요? 임금님께 보고드릴 정도로 중대 사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일은 임금님 소관이 아니야. 중간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맡은 분은 따로 있지.”

“아…….”

누구인지 짐작한 장미토가 나직이 탄식했다. 나비 선인이 비단으로 감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산 허락을 받고 올 테니 중간계로 갈 채비를 해라!”

* * *

이리 만물 대여점의 조경을 담당하는 상수리나무의 가지가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곽성훈이라는 이름의 조경업체 직원은 이곳에서 20년째 가지치기를 담당해 온 자로, 해가 갈수록 더 훌륭한 가지치기 능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성실하고 착실하면서도 친화력 있는 성격이라 이리는 앞으로도 계속 그에게 가지치기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는 보일러 수리기사와 함께 이리 만물 대여점에 가장 많이 방문하는 인간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이곳이 신묘한 가게라는 걸 몰랐다. 그저 상수리나무를 마당에서 키우는 조금 특이한 가정집이라고는 생각했고, 이 집이 대문 밖에서 볼 때보다 훨씬 넓으며 집주인인 이리라는 청년은 20년째 같은 청초하고 맑은 외양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와아아. 인간 대단하다. 아무렇게나 자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가지런하다.”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나무가 불쌍하지.”

“이리 선인아. 저 나무 어떻게 할 거냐. 나한테 줄 거냐?”

“다들 나눠 갖기로 했어! 뭘 너한테 줘?”

“그냥 물어본 건데 왜 소리 지르냐.”

“네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니까 그렇지!”

“뜬금없는 게 뭐냐?”

“에휴. 지능 낮은 것이랑은 말이 안 통해.”

조르르 앉아서 구경하던 어린 잔챙이 위아들이 자기들끼리 숙덕댔다. 그 대화를 들으며 이리가 빙그레 웃었다. 가지치기를 하는 날이면 근처에 사는 잔챙이 위아들을 불러서 잔해들을 나눠줬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다람쥐, 산토끼, 쇠박새 뿌리의 잔챙이들을 구경하는 건 그의 큰 즐거움이었다.

작업이 끝나고 가지치기 업체 직원이 정원의 피크닉 테이블에 앉아 도진이 가지고 온 차와 약과를 먹었다.

“그 꼬맹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이 집에 있으면 뭐든 다 크는 모양이여. 나무도 보통 나무들보다 몇 배는 빨리 자라고, 사람도 이렇게 훌쩍 커 버리고. 작은 건 집주인밖에 없구만.”

직원이 껄껄 웃었다. 도진이 워낙 어릴 때부터 대여점에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커 가는 과정을 모두 보아 온 곽성훈이었다. 그 쪼매났던 아이가 이렇게 커질 동안 집주인은 주름 하나 생기지 않았다는 건 인식하지 못하면서 잘도 놀리고 있었다.

“제가 좀 크긴 하죠. 아직도 성장기가 안 끝나서 더 클지도 몰라요.”

“이걸 어쩐담. 내가 가지치기해 줄 수도 없고.”

“인간 가지치기라니 끔찍한 소리를 하시네요.”

“인마, 그걸 상상하는 네가 더 끔찍해. 그런데 너는 대학 어디 들어갔냐. 이제 막 개강해서 한창 여자애들이랑 놀러 다닐 시기 아니냐?”

“저는 대학 안 갔어요. 우리 형이랑 노느라 바쁜데 학교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도진은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가족을 제외한 평범한 인간들 앞에서는 이리를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겉모습은 이리가 더 어려 보이는 탓에 많은 이가 괴리감을 느꼈다.

“아니, 왜 대학을 안 가? 공부도 제법 하지 않았냐. 언제 한번 전교 1등 했다고 이리 씨가 칭찬하는 거 들었는데.”

“제 맘입니다요.”

“요즘 애들 하여간 이상해. 재작년에는 우리 딸애도 이상한 미신에 빠져서 고등학교 진학 안 하겠다고 무당 하겠다고 가출하고 그랬잖아. 그때 이리 씨가 설득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밖에만 싸돌아다니고 있을걸.”

이리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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