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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경이로운 능력이군. 내가 지금까지 선인을 셋 봤는데 다른 둘은 그대에 비하면 선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싶네.”
“그 말 다른 선인 앞에서는 하지 말아 줘….”
“나비 선인에게는 저번에 대결할 때 이미 했네. 그자도 인정하던걸. 오히려 이리와 비교를 하면 그 누가 자격이 있겠냐며 성질을 냈지.”
이리가 이마를 짚었다. 이 와중에도 제자가 꼭 끌어안고 있어서 팔을 톡톡 쳐서 품을 빠져나와야 했다.
“나비 선인이라면 내 스승님의 친구분이죠? 무슨 대결을 했고 누가 이겼습니까?”
“둔갑 대결을 했고 내가 이겼다.”
“…저한테도 둔갑 대결을 하자고 했으면 제가 졌을 텐데.”
“자네가 인간인 줄 알고 씨름을 선택했지. 나는 인간과는 항상 씨름을 하니까.”
요리이기가 눈알을 굴려 도진을 샅샅이 훑었다.
“이제야 알겠군.”
“…….”
“그대는 ‘장사(壯士)’였어.”
도진이 씨익 웃었다. 정답이라는 뜻이었다.
세상에는 가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존재가 태어난다. 유달리 냄새를 잘 맡는 짐승이라든가, 유달리 커다랗게 자라는 초목이라든가.
혹은 유달리 힘이 센 어린아이라든가.
인간 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심상치 않은 괴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를 예로부터 장사 혹은 장수라고 칭했다. 장사는 인간이기도 하고 위아이기도 한 존재였다.
장사를 소재로 한 민담은 여러 개가 있다. 한량처럼 지내던 장사가 전쟁 때 괴력을 발휘해 농민을 구해 준 일화. 도술을 부리는 오만한 승려의 콧대를 눌러 준 일화. 많은 사람을 고통 받게 한 요괴를 일격에 해치운 일화.
그러나 이런 호쾌한 민담보다는 비극으로 끝나는 민담이 대부분이다.
장사의 탄생은 유전자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는 아주 희귀한 일이고, 그 아기가 크게 자라 살아남는 건 더더욱 희귀했기 때문이다. 괴력을 발휘하는 아기라는 건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인 존재이므로 장성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일명 ‘아기장수 설화’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평민에 대한 수탈과 착취가 심한 시절, 가난한 평민의 집에 괴력을 지닌 아기장수가 태어나 혁명을 꿈꾸었으나 권력의 위협을 두려워한 이들에게 일찌감치 살해당한다는 이야기.
도깨비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일그러졌던 인상도 어느샌가 활짝 펴져 있었다.
“내가 정말 장사와 씨름 대결을 한 것인가? 이거 승패와는 상관없이 널리 자랑하고 다녀야겠군.”
“부디 그래 주세요. 다혈질이라는 나쁜 소문 대신 장사라는 좋은 소문이 좀 퍼지게.”
“그렇지. 장사라는 것들은 언제나 자네처럼 건방졌지. 천성이 오만한 이들이었어. 자네는 구운문이라는 자를 아는가? 그자도 장수였는데.”
“제주도에 살았다던 분 말이죠.”
“알고 있군! 정말이지 오만불손하고 천하태평한 작자였지. 나는 운문과 친구였네. 귀찮은 게 싫다고 벼슬을 마다하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평생 장사로서 인간계에 머물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장군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더군. 그게 이백 년 전인가. 삼백 년 전인가. 그 후로 장사를 보는 건 처음이네.”
“네에.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사인이라도 해 드려요?”
하하하, 도깨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도진이 장사라는 걸 알고 나자 이런 건방진 말투도 귀엽고 그립게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리 선인은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장성한 장사를 만난 건가?”
“커서 안 게 아니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어.”
“스승님이 절 장성하게 만든 겁니다.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전 신생아 때 죽었겠죠. 수많은 아기장수들처럼.”
“하긴 그렇겠군. 선인 정도는 되어야 작금의 악신들로부터 아기장수를 보호할 수 있지…. 아!”
요리이기는 무언가 깨달은 듯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이자는 새 임금 후보이기도 했지? 정말 왕위에 오른다면 수많은 아기장수들의 염원이 이제야 이뤄지는 거로구만!”
“지금이라도 종이랑 펜 주세요. 사인해 드릴 테니까.”
“하하하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리이기. 이제 슬슬 가야겠어. 더 잡담하고 싶으면 언제든 대여점에 오고, 우선 대나무 새알을 줘.”
“알겠네.”
요리이기가 손을 뻗자 육중한 도깨비방망이가 흔들렸다. 마치 볏짚을 털듯이 좌우로 흔들자 퐁, 퐁퐁 하고 타조알 크기의 오색 새알들이 허공에 생겨났다.
알 상태로 부유 중인 그것들을 도진이 서류 가방 안에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그러면 자네의 다음 갈래는 장군이겠군.”
“먼저 도사가 된 후 선인이 될 거예요. 지금 열심히 적덕하고 있습니다.”
“……뭐?”
요리이기가 고개를 기울였다.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장사는 도사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장사와 도사로 나뉘고, 장사는 장군, 도사는 선인이 되지. 이리 선인, 그대의 제자가 기본적인 상식을 모르는군.”
“미안한데 진짜 가야겠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알겠네. 이리 선인도 참 불편한 생활을 하는구만.”
이리와 도진은 요리이기와 헤어지고 올라올 때보다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이미 용마가 와 있었다. 꼬리를 흔들며 기다리고 있던 흑마가 검은 벤으로 변했다. 도진이 얼른 차 문을 열었다.
“최대한 빨리 가자. 네 주인 이러다 오늘 밤 꼴딱 새우게 생겼다.”
[ヾ(⌐■_■)ノ]
용마가 맡겨만 달라는 듯 든든한 표정을 짓고는 시동을 걸었다.
대여점에 돌아온 둘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도진은 오동 화로에 불을 피우고, 이리는 대나무 새알의 중량을 쟀다. 적당한 중량의 새알 다섯 개를 깨뜨린 후 흑자리공 뿌리와 뱀뿔을 넣어 만든 반죽에 넣어 섞었다. 물 양은 이리가 조절했고 반죽을 주무르는 담당은 도진이었다.
반죽이 찰지게 잘 되었을 때쯤 이리가 새로운 이물을 꺼내 왔다. ‘신화지’라는 이름의 이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스케치북 모양이었다.
이리는 새하얗게 비어 있는 한 장을 찢고 안에 반죽을 넣은 뒤 구깃구깃 구겼다. 동그랗게 구겼다가 다시 펼치자 먹색의 반죽은 온데간데없고 흰 가루만 남았다.
“이 흰 가루가 풀조미료인가요?”
“맞아. 음식에 넣으면 어느 환경에서도 상하지 않아. 일종의 방부제 역할을 하지.”
“인간도 먹을 수 있어요?”
“물론. 왜, 먹어 보고 싶어?”
“제가 아무리 그래도 개미 식량까지 빼앗아 먹지는 않습니다.”
도진이 냉장실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식량을 꺼냈다. 양수 냄비에 가득 들어가는 꽤 넉넉한 양의 흰 쌀밥에 흰 가루를 솔솔 뿌리고 뚜껑을 덮었다.
“이제 끝이야. 아침에 아류개미가 오면 주면 돼.”
“수고했어요, 스승님. 얼른 씻고 주무세요. 전 1층에서 씻을게요.”
“응.”
도진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3시가 지나고 있었다.
힘들게 비축해 놓은 식량을 잃어버리고 홀로 애쓰다가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한 아류개미에게 식량을 전해 줄 생각을 하니 뿌듯하기도 했지만, 연약한 이리가 며칠째 새벽에 취침 중인 건 꽤 걱정스러웠다.
물론 이리는 선인이기에 잠 좀 적게 잔다고 쓰러지는 몸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도진 기준의 연약함이었다.
다음 날, 도진은 일출 시간이 되기 전에 먼저 기상해서 대여점을 열었다. 환한 낮에도 항상 켜 놓는 간판 불을 켜고, 컴퓨터와 작업실 전등까지 켜고 보일러 온도를 높였다. 어제 다 하지 못한 뒷정리까지 마치고 차를 내릴 때쯤 이리가 내려왔다.
“벌써 일어났어? 부지런하네.”
“더 주무시죠. 아류개미한테는 제가 잘 전달할게요.”
“아니야. 일어날 때가 됐지.”
“차 한 잔 드릴까요?”
“응. 고마워.”
이리가 도진의 옆에 앉았다. 거실에 편한 소파가 있는데, 둘은 소파보다는 마당의 전경이 바로 내다보이는 작업대 앞에 나란히 앉아 차 마시기를 즐겼다. 정확히는 이리의 습관이 그러했고, 어렸을 때부터 대여점을 드나들던 도진도 이리를 따라 하다 보니 같은 습관이 생겼다.
“나무 가지치기할 때가 됐네요.”
“다음 주가 정기적으로 하는 날짜야.”
“제가 직접 할까요? 저도 할 수 있는데.”
“알아. 그런데 그 사람이 여기서 가지치기한 지 20년이 넘어간단 말이야. 이제는 그만 오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어.”
“하긴, 저도 그 아저씨를 실직시키고 싶진 않네요.”
도진은 창에 비치는 이리를 힐끔거렸다. 그는 적당히 침묵을 뒀다가 태연히 물었다.
“스승님. 어제 요리이기가 한 말 중에 ‘장사는 도사가 될 수 없다’ 이 말 말이에요. 저는 해당이 안 되는 거 맞죠?”
이리가 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호로록 마시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제는 안 물어보더니…. 역시 물어봐야겠다 싶었구나.”
“어제는 스승님 빨리 주무시라고 일부러 참았던 거거든요.”
“고마워.”
이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장사는 도사가 될 수 없는 게 맞아. 둘은 갈래가 완전히 다르니까. 코끼리가 성장해서 새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지. 하지만 선인은 될 수 있어.”
“바로 선인으로 직행할 수가 있다고요?”
“그래. 바로 그 방법이 선인의 제자가 되는 거야. 선인의 제자는 진현계에서 도사로 인정해 주니까. 아주 드문 경우이기 때문에 요리이기 같은 어린 도깨비는 그 사실을 몰라.”
500살인 요리이기를 서슴없이 어리다고 하는 이리였다.
“너는 이미 장사와 도사의 중간에 있어. 단지 공식적인 절차를 밟지만 않았을 뿐. 둘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지.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저는….”
도진이 부들부들 떨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는 진짜 엄청난 사람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