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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이나 정성 들여 끓인 냄비를 조심히 들고 안에 들어오자 이리가 테이블에 작게 자른 종이들을 늘여 놓고 있었다. 흰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고, 노르스름한 색도 있었다.
“스승님, 물 끓여 왔어요. 그 종이들은 뭐예요?”
“부적으로 사용할 종이들이야.”
“네? 이건 아무리 봐도 괴황지(槐黃紙)가 아닌데요? 훨씬 두껍고 그냥 도화지 같은데.”
“오로지라는 종이야. 여기서부터 석영색, 오팔색, 연한금색, 크림색. 괴황지는 요즘엔 잘 안 써. 쉽게 찢어지고 잘 번지고 여러모로 불편하니까.”
“우리 퇴마 영상 찍을 때는 괴황지 썼잖아요.”
“그때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부적처럼 보여야 했으니까. 그 냄비 여기 둬.”
“네에.”
도진이 냄비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팔팔 끓고 있는 물은 흑색이었다. 이리는 직사각형으로 자른 작은 오로지를 한 장 집어 들어 냄비의 흑색 물에 넣었다.
“종이 전체에 흑수가 닿아야 해. 이렇게 완전히 담갔다가 몇 초 후에 빼내면 돼. 빼낼 땐 손가락으로 해도 되고.”
“안 뜨거워요?”
“우리한테는 안 뜨겁지.”
이리가 다시 건져 드니, 물 안에서는 까매졌던 종이가 물 밖에 나오자마자 본래의 오로지 색상으로 변했다. 세 번 더 예시를 보여준 후 도진에게 자리를 넘겼다.
바톤을 이어받은 도진이 오로지로 부적 만드는 작업을 이어 나갔다. 한참을 하다가 남은 양을 봤는데 시작하기 전보다 더 쌓여 있었다. 이리가 계속 종이를 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의 뒤편을 보니 종이 박스가 다섯 상자는 더 있었다.
“스승님. 대체 저 없을 땐 어떻게….”
“나도 혼자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이런 단순 반복 작업할 때는 일일 알바를 구하긴 했지.”
“그래요? 어떤 새끼…. 아. 보부상 형 말이군요.”
도진이 학교 끝나고 대여점에 오면, 피어싱을 덕지덕지한 빨간 머리 양아치가 앞치마를 매고서 껄렁껄렁하게 맞이할 때가 있었다. 처음 그 사람을 봤을 때는 이리가 저 말고 다른 인간을 곁에 둔 줄 알고 성질을 부렸는데, 알고 보니 그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보부상이라는 도사로 진현계 임금님의 유일한 직계 권속이었다. 배분은 이리보다 현저히 낮은 신령급인데, 이리와는 친구 관계로 있는 듯했다.
“그 형 말고 또 누가 일일 알바 했어요? 스승님의 신령들?”
“신령들도 그렇고, 가끔 고객들한테도 시켰어. 이물 훔치려고 몰래 숨어드는 위아들이 있었거든.”
“미친. 진상 새끼들이 도둑질까지 해요? 그런 새끼들 많았어요? 스승님한테 막 칼 들이대거나 위협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씨발, 이름 다 대요. 내가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되돌려 줄 테니까.”
“흥분하지 마. 그러다 종이 찢는다.”
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진이 종이를 부욱 찢어 버렸다. 도진은 이리의 눈치를 보며 찢어진 종이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미 저지른 일은 어쩔 수 없고. 도진은 계속 이리를 추궁했다.
“빨리 이름 대요. 도둑놈의 자식들이 뭐가 예쁘다고 숨겨 줍니까?”
“다들 어설퍼서 도둑질에 실패했고, 죗값도 치렀어. 여기서 아르바이트 시켰다고 했잖아.”
“대여점에서 알바 하면 영광이죠! 그 새끼들 분명 자기 동네 가서 나 이리 선인님이랑 하루 종일 같이 일했다며 자랑했을걸. 어쩌면 그걸 노리고 어설프게 도둑질을 시도한 건지도 몰라요.”
“도진아. 종이 또 찢겠어.”
“제가 그런 바보 같은 실수를 또 할 줄 아세요? 아무튼 늘 말하지만 여기 CCTV 좀 달아야 합니다. 요즘은 멀리 나가서도 핸드폰으로 CCTV 화면 볼 수 있는 거 아시죠? 누가 집에 침입하면 바로 알림도 오고. 위아뿐만 아니라 인간 도둑들도 경계를 해야 한다고요. 이 골목이 24시간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도둑놈들은 여기서 알바를 시킬 게 아니라 1년간 대여 금지를 하는 게 맞단 말이에요.”
제자는 잔소리를 쏟아 부으면서도 또다시 종이를 찢는 일은 없었다. 남은 종이를 다 작업할 때까지 찢어 버린 종이는 한 장뿐이었다. 확실히 유능하고 재능 넘치는 제자였다. 잔소리가 조금, 아주 조금 심하지만 말이다.
고객 둘을 더 받고, 요청받은 이물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요리이기가 내일 밤에 보자고 했다고?”
“네. ‘내일 밤’ 딱 세 글자로 답신이 왔어요. 진짜 화딱지가 난다니까요. 장소야 그렇다 쳐도 정확한 시간도 안 적고. 우리는 뭐 해 지면 내내 산에서 기다리라는 건지.”
“이거 진열대에 좀 정리해 주고 너는 집에 가.”
“이렇게 늦은 밤에 골목길 혼자 걷기 무서우니까 자고 갈게요.”
도진이 뻔뻔하게 말하며 이물을 쓸어 담고 일어났다.
이리가 피식 웃으며 1층 작업실 불을 끄는 때였다.
따르릉-. 핸드폰이 아니라 대여점의 전화가 울렸다. 창고에서 정리 중이던 도진이 “낮밤도 안 가리는 진상들!”이라며 또 울분을 터뜨렸다. 이리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이리입니다.”
-아, 선인님. 접니다.
앵앵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이리에게 인사했다. 아류개미였다. 이리는 뜨끔했다. 아류개미가 봄잠 식량 비축 의뢰를 한 지도 벌써 닷새가 지났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의뢰를 받았을 때 일주일 기한을 달라고 했으니 뜨끔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리는 괜히 미안했다.
-이러다 봄이 다 갈 것 같은데 어떻게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그럼. 내일 새벽이나 모레 아침에 오면 돼.”
-새벽은 제가 죄송하지요. 선인님은 잠을 꼬박꼬박 주무셔야 하는 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레 일출 시간에 맞춰서 가겠습니다.
“고마워. 졸릴 텐데 조금만 참고 모레에 보자.”
-네. 보중하십시오.
어느새 다가온 도진이 전화를 끊자마자 말했다.
“밤에 전화하길래 진상인 줄 알았는데 괜찮은 위아네요. 이런 고객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아.”
“좋긴 좋은데 미안하네. 지금 굉장히 졸린데 참고 있는 걸 거야. 아류개미는 1년 중 딱 봄에만 잠을 자거든.”
“다른 아류개미들이 식량 비축할 때 지는 혼자 뭐 했대요?”
“열심히 비축했어…. 그런데 식량을 등에 이고 봄잠 잘 장소를 찾아 물웅덩이를 건너던 중 길을 헤매는 달팽이 하나를 돕다가 모조리 잃어버렸대. 어떻게든 다시 모아 보려고 했지만 1년간 모은 식량을 어떻게 한 달 만에 모으겠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3월에 접어들고, 시일이 촉박해지니까 나한테 부탁한 거지.”
“차라리 처음부터 맡겼음 좋았을 텐데. 덕이 아까웠나 보네요.”
이리 만물 대여점은 위아의 의뢰를 들어주고 대신 ‘덕(德)’을 받는다. 아주 소량만 받고 있으므로 거저나 다름없지만, 다음 갈래로 진화할 욕심이 있는 위아들은 이 소량의 덕도 아까워서 대여점을 찾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물이 되고 싶은 요물이라거나, 요괴가 되고 싶은 잡귀 같은 위아들. 아류개미의 경우에는 영물을 꿈꾸는 요물이었다.
“이제 전화선 뽑아 놓고 자요, 스승님. 내일도 바쁘겠네요.”
“진짜 여기서 잘 거야?”
“넹.”
도진이 2층 계단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이리는 어떻게 할까 고민했으나 그냥 오늘까지만 재우기로 했다.
이 오늘까지만이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는 건 무의식 저편에 넣어 두었다.
* * *
다음 날, 또다시 새벽부터 일어나 바쁜 하루를 보낸 두 사람이 요리이기가 사는 청주 우암산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용마를 공용 주차장에 주차하고 내리는데 용마가 갑자기 시동을 켜더니 차체를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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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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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에 떠오른 문자를 보고 도진이 기막혀했다.
“이 녀석 왜 신이 났어요?”
“아무도 없는 밤이니까 본 모습으로 뛰어놀고 싶나 봐.”
이리가 보닛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최대한 몸체를 줄이렴.”
허락이 떨어지자 검은색 밴은 용맹하고 위풍당당하며 털에 윤기가 흐르는 흑마가 되었다. 단, 크기는 강아지 정도로 작았다.
히이잉!
크기는 작지만 어쨌든 간만에 말 모습을 한 용마가 기분이 좋은지, 이리와 도진의 다리에 주둥이를 문질렀다. 목부터는 용 대가리를 하고 있어서 부드러운 갈기 대신 긴 수염이 까슬까슬했다. 어렸을 때부터 용마랑 자주 놀고는 했던 도진이 용마를 끌어안아 주었다.
“CCTV가 사방에 있으니까 조심해서 뛰어놀아라.”
끼잉.
“이렇게 작아지면 꼭 강아지처럼 울더라. 귀여운 놈.”
이리는 ‘놈’이 아니라고 정정해 주려다가 말을 아꼈다. 도진이 용마가 암컷임을 언제쯤 눈치챌지는 이리의 소소한 재미였다.
용마가 신난 강아지처럼 어둠을 향해 뛰어가고, 이리와 도진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를 어느 정도 오르다가 산 중턱에 인간들이 ‘이곳은 길이 아닙니다’라는 뜻으로 쳐 놓은 철조망을 가볍게 넘어 덤불이 우거진 산으로 들어갔다. 음악가를 만나러 갈 때 그랬던 것처럼 우거진 수풀과 나뭇가지들은 이리의 앞에서 공손하게 길을 비켰다.
어두컴컴한 산을 달빛에만 의지해서 오름에도 둘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소리들과 바스락거리는 소리, 우웅우웅 어디선가 먹이를 찾으며 우는 야행성 동물의 울음소리도 둘에게는 그저 배경 음악일 뿐이었다.
“요리이기는 정말 식인 도깨비인가요?”
“식인을 했었어. 지금은 끊었지만.”
“그럼 저도 먹으려 들겠군요.”
“살아 있는 인간은 먹지 않지만 네가 건방지게 굴면 먹으려 들지도 모르지. 조심해.”
아무리 도깨비의 힘이라도 도진을 이기지 못함을 알기에 하는 가벼운 농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