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소문대로 악랄한 사람이었군용! 선인께서는 어째서 이런 나쁜 사람을 직원으로 두셨어용? 재고하길 부탁드려용!”
육각나무의 감정 상태에 따라 이파리 또한 파르르 떨리더니 새빨갛게 변해 갔다. 도진은 그저 황당한 표정만 지었다. 이리가 난처하게 웃으며 흥분한 육각나무를 다독였다.
“진정해. 그러다가 잎사귀 떨어지겠어. 도진이가 알고 그런 거 아니니까 용서해 주렴.”
“아니, 씨발, 내가 뭘.”
“도진아. 육각나무의 뿌리는 대추나무란다.”
“……모르면 실수할 수도 있죠. 하여튼 위아들은 까다로워 가지고. 쯧.”
“도진아.”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도진이 턱을 한껏 내밀며 불량스러운 태도로 사과했다. 육각나무는 하나뿐인 가지를 파르르 떨다가 이리가 차를 한잔 더 대접하겠다고 해서 겨우 진정했다.
도진은 이번엔 건성으로 차를 타 왔다. 모연실을 우린 차이기 때문에 아무리 대강 차를 타도 차 맛이 좋았다. 육각나무는 작은 벌레들까지 실컷 먹은 후에야 마음이 풀렸다.
“이제 가지를 좀 볼까?”
“보세용.”
육각나무가 테이블 위에서 뿌리를 움직여 이리 앞으로 기어와 앉았다. 이리가 잎사귀를 세 장만 매달고 더는 탄생시키지 않는 나뭇가지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주의 깊게 살폈다.
도진은 옆에서 조율을 끝낸 깃털 피리를 준비했다. 어제 음악가가 조율을 완성했다고 연락이 와서 도진이 가져온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악기라는데 아직 들어본 적 없어서 퍽 기대되었다.
“상태는 건강하네. 나뭇가지가 얼마나 높게 자랐으면 좋겠어?”
“많이 달고 있으면 무거워서용. 가지가 더 자랄 필요는 없고 잎사귀만 몇 장 더 나오게 해주세용. 주변에서 자꾸 탈모라고 놀려서 스트레스 받아용. 남이 탈모면 걱정을 해 줘야지 왜 놀린단 말이에용? 속상해서 요것도 떨어질랑말랑이에용.”
“그래. 알았으니까 건드리지 마.”
육각나무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제 나뭇잎을 뿌리로 톡톡 건드리자 여기서 대참사가 일어날까 봐 이리가 얼른 말렸다.
“그럼 시작할게.”
이리가 드디어 깃털 피리를 집어 들었다. 커다란 도진도, 자그마한 위아도 기대 어린 눈으로 이리를 바라봤다.
이리는 깃털 피리의 끝부분을 입에 물고 후 불었다. 그러자 도진의 귀에 들려온 것은.
이리의 노랫소리였다.
예전에 어느 달 밝은 가을밤, 이리와 골목길을 거닐며 산책을 한 적 있었다. 그때 도진은 일고여덟 살쯤이었으므로 이리가 아주 어른으로만 보였다. 어머니,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깍듯하게 대하는 아주 높고 어려운 사람. 다른 어른들보다 자그마한 체구인데도 그 누구보다 커다랗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사람.
그 커다랗고 자그마한 선인 또한 함께 산책하며 기분이 좋았는지 가을밤에 어울리는 대중가요의 한 소절을 나지막이 흥얼거렸다.
이리는 흥취를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그의 노래를 들은 게 그날이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으나 도진에게는 마치 처음과 마지막인 것처럼 남아 있는 풍경이었다. 달 밝은 밤….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청아한 노랫소리. 그 시간의 그 장소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 그 노랫소리가 지금 들려오는 것이다.
도진은 눈을 감은 채 감미로운 목소리를 감상했다.
이리가 피리 연주를 끝내자 노랫소리가 끊겼다.
도진이 눈을 뜨자 이리가 웃으며 도진을 보고 있었다.
“어떤 소리가 들렸어? 아주 좋아하던데.”
“스승님의 노랫소리요. 이건 그러니까, 본인이 살면서 들은 곡 중 가장 좋았던 곡을 듣게 하는 이물인 거군요.”
“그렇지.”
“스승님은 어떤 곡을 들으셨어요?”
“아주 옛날에 들었던 노래…….”
“아주 옛날,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 어디서, 누가 부른 노래?”
“말한다고 네가 알겠니. 그나저나 육각나무도 만족한 모양이구나.”
육각나무의 존재를 잠시 잊었던 도진이 그제야 작은 요물을 내려다보았다.
이쑤시개만큼 가늘었던 나뭇가지가 펜 정도로 두꺼워졌고, 더 길어졌으며 잎사귀도 여섯 장이나 매달고 있었다.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아주 튼튼해 보였다.
그런데 기뻐해야 할 육각나무가 눈물을 똑똑 떨구기 시작했다.
“이런. 몸 안의 수분이 빠져나가면 안 되지. 도진아, 가서 분무기에 물 담아 와.”
“그냥 수돗물이면 돼요?”
“응.”
도진이 얼른 분무기를 가지고 와 육각나무에게 뿌렸다. 육각나무가 액체를 흘리는 만큼 동시에 섭취하면서 애원했다.
“조금만 더 연주해 주세용. 이리 선인. 조금만 더용.”
“더는 어려워. 무슨 노래를 들었길래 그래?”
“200년 전의 노래를 들었어용…….”
200년 전이라니, 도진으로서는 조금 막연해지는 시간대였다. 어쩌면 이리가 떠올린 노래는 그보다 더 오래전일 수도 있었다.
“이 글자가 보이나용?”
육각나무는 훌쩍이며 몸을 틀었다. 나무 기둥 뒤편에 조그맣게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한글로, ‘내 친구’였다.
“예전에 인간 아이랑 친해진 적이 있었어용. 그때 저는 이르게 떨어진 대추 열매였어용. 아이가 주워 들자 엄마가 먹지 말고 버리라고 했는데, 아이는 저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놀았어용. 볼이 빨갛고 통통한 아이였죵.”
도진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고객들은 이렇게 이리에게 과거의 추억을 털어놓고는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도진이 판단하기에는 이 또한 진상이었다….
“저는 어딜 가나 아이와 함께였어용. 아이는 어느 정도 크고 나서 낡은 옷을 찢어 주머니를 만들어 저랑 구슬 두 개, 하얗고 예쁜 조약돌 하나를 넣고 다녔죵. 밥을 먹을 때도, 친구들과 놀 때도 잘 때도 그 주머니와 함께였어용.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아이는 주머니 속의 보물들을 머리맡에 늘여 놓고 노래를 부르고는 했는데…….”
그 추억을 회상하듯 육각나무가 말끝을 흐렸다. 초록색으로 싱그럽던 이파리는 그립고 슬픈 감정에 따라 점점 노란빛을 띠었다.
“어느 날 주머니에 구멍이 나더니 구멍이 점점 커지는 거예용. 손재주가 좋은 아이라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얼른 기우거나 새로 만들었을 텐데, 제가 주머니에서 데굴데굴 굴러떨어질 때까지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어용….”
“…….”
“저는 포근하고 아늑했던 주머니에서 벗어나 흙길에 떨어졌어용. 마침 비가 오는 바람에 물길을 타고 어디론가 떠내려갔죵. 나중에 집에 돌아갔던 아이가 절 찾으러 왔겠죵? 아이가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 날지 생각하면 어떻게든 멈추고 싶었어용. 하지만 죽은 대추 열매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물길을 거스르겠어용….”
“죽은 대추 열매에서 요물이 된 건 언젠데요?”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 라지만 어느샌가 몰입하고 있던 도진이 물었다.
“저는 그 후로 한 영물에게 주어져 요물로 재탄생할 수 있었어용. 다들 저를 보고 운이 좋다고 말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용. 그 후로 다시는 아이를 만날 수 없었으니까용.”
“요물이 된 후에 안 찾아갔습니까?”
“…인간은.”
“…….”
“인간은 너무 빨리 죽더라구용….”
육각나무의 서글픈 한탄에 도진은 입을 다물었다. 더 묻지 않아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이리가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맞아. 인간의 삶은 짧고 기억은 영원해…. 그렇기에 더 아름다운 거겠지.”
이리가 육각나무를 다정하게 위로했다. 도진이 이리를 힐끔 바라보니 평상시의 다정하고 맑은 얼굴이었고 어떤 어두움도 없었다. 육각나무처럼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한편, 이리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 * *
도진이 알기로 이리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살았다. 그 어떤 선인들보다도, 신수들보다도, 다른 천지신명들보다도 많은 시간을 살았다고 했다.
세상의 근본은 세 가지다. 인간, 초목과 짐승, 사물. 이 세 종을 ‘뿌리’라고 부른다.
인간 중 특별한 자들은 장사와 도사가 되며, 장사와 도사가 덕을 쌓고 수련하면 장군(장군신)과 선인이 된다.
초목과 짐승 중 특별한 것들은 요물이 되고, 요물이 덕을 쌓고 수련하면 영물과 요괴가 된다. 영물은 신수 혹은 신령이, 요괴는 악신이 된다.
사물 중 특별한 것들은 귀물이 되고, 귀물은 덕을 쌓으면 잡귀, 도깨비, 영물로 변하고. 잡귀는 요괴와 잡신, 영물은 신물과 신령으로. 그리고 요괴는 악신이 된다.
예를 들어 요괴나 신령이 되는 루트는 두 가지 이상 존재하나 선인이 되는 루트는 인간->도사->선인 외에는 없다. 실제로 현재 진현계의 선인들은 전부 본래 인간이었다.
다만 이리 선인만은 처음부터 선인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무한한 시간을 부여받은 유일한 존재.
태고의 선인이자, 스스로 태어난 천지신명.
그게 바로 이리 선인이었다.
‘천 년이 뭐야. 만 년도 넘게 사셨는데 당연히 나 이전에도 가깝게 지낸 인간들이 있었겠지.’
너무 당연한데 그 생각을 하면 뱃속이 살살 꼬였다.
도진에게 이리는 유일한 선인인데 이리에게 저는 유일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하지만 도진은 장차 도사가 되고, 또 선인이 되며, 마침내는 임금이 될 예정이다. 결국 이리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자는 이미 죽어 바스라졌거나 윤회 중일 인간 따위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최종 승리자는 나다!’
다혈질이고 화도 많지만 염세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은 잘 하지 않는 도진은 자화자찬하며 오동 화로의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