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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모든 걸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무언가 특별한 꿈을 꾸었다는 것만은 알 것이다.
선명한 기억도 없는, 그저 느낌일 뿐이겠지만…….
흰 쥐 영혼을 가진 사람이 영안이 없다는 건 이리 또한 아쉬웠다. 훌륭한 직원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연과의 짧은 인연은 끝이 났고, 지연은 지연만이 걸을 수 있는 특별한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리는 이리의 일을 해야 했다. 오늘도 대여점에는 선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일이 많았다. 그게 자신에게 놓인 길이었다.
2. 도진의 갈래
“뭐라고요? 아니, 이제 와서 취소하겠다니요. 급하다고 지랄을 떨어서 제주도까지 직접 가서 힘들게 잘라 왔는데 이게 무슨 개 같은 말이에요? 취소 안 됩니다. 취소 못 해요. 당장 대여점으로-.”
“도진아.”
도진의 전화 내용을 듣던 이리가 작업 중이던 이물을 내려놓고 얼른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도진이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수화기를 넘겼다.
이리는 차분하게 통화를 이어 받았다.
“응. …그래. 필요하지 않게 됐다면 좋은 거지.… 괜찮아. 응.”
이리가 전화를 끊고 도진을 바라봤다. 무언의 힐난에 도진이 성질을 부렸다.
“아니, 제 말이 맞잖아요. 엿자리인지 뭔지 이름도 엿 같은 게 바빠 죽겠는데 꼭 필요하다고 해서 제주도까지 직접 가서 해광초를 채집해 왔는데 노쇼가 말이 돼요? 우리가 시간을 좀 달래도 꼭 오늘이어야만 한다고 지랄을 떨어서 갔다 왔는데 이제 와서 취소라니요! 스승님도 화를 좀 내세요.”
“아파서 필요했다가 이제는 나았다잖아. 더 좋은 거지.”
“그럼 좀 미리 전화 좀 하든가. 약속시간이 지나도 안 오길래 어디냐고 전화하니까 그제야 취소하는 게 맞아요? 이런 진상 손님은 인터넷에 올리면 다들 욕한다구요. 우리 대여점도 노쇼 손님은 다시는 못 오게 해야 돼요! 아니면 최소한 1년은 대여 금지하든가! 아니면 예약금으로 덕을 미리 받든가!”
“숨넘어가기 직전에 회복했으니 우리한테 연락할 정신이 없었겠지. 그리고 손님이 아니고 고객이야.”
“아무튼간에요. 이런 진상 고객은 혼을 좀 내라고요. 스승님은 맨날 고객 편만 들고 제 편은 절대 안 들어요.”
굳이 고객으로 정정하는 이유는 존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시손님, 호반손님 등 ‘손님’이라는 이름의 위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악한 존재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리는 어렸을 때부터 도진에게 손님이란 단어를 오용하지 않게끔 가르쳤다.
도진은 이리에게 서운한지 입을 댓 발 내밀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앞에는 엿자리에게 주려고 힘들게 달여 놓은 해광초 약물이 있었다.
엿자리는 인간 형태의 요괴인데 평소에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돌아다닌다. 그러다 왼팔이 병에 걸려 썩어 들어가는 바람에 이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치료를 위해서는 제주도 바닷속에서 특정 시간대에만 나오는 풀인 해광초가 필요한데, 이리는 일이 바빠 같이 가지 못 가고 도진만 야밤에 혼자 다녀왔다. 새벽부터 약을 달이고 정성스레 약물을 만들었는데, 약속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아 걱정되어서 전화했더니 다 나았으니 필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진 같은 불같은 성정이 아니더라도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만, 이리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스승님은 감정의 폭이 너무 좁아요.”
이리는 항상 잔잔한 호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나마 수면이 흔들릴 때는 도진의 저돌적인 수작질에 난감해할 때 정도.
이런 스승의 태연한 태도에 도진은 더 열이 뻗쳤다.
“스승님이 화를 잘 안 낸다는 걸 알아서 저 새끼들이 더 나대는 거라고요. 그동안 스승님이 혼자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면 내가 진짜…….”
“별로 고생 안 했어.”
“두고 보세요. 제가 임금이 되면 노쇼 고객은 1년간 대여 금지 룰을 만들어 버릴 거예요. 이제 위아들의 세상도 바뀔 때가 되었거든요.”
도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쇼를 당연히 여기는 진상 새끼들을 죄다 포도청에 투옥시켜 버리겠어.”
“무슨 규칙을 만들든 다 좋은데 일단 임금이 되려면 그런 험악한 단어부터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제가 무슨 험악한 단어를 썼는데요?”
“‘새끼들’이라고 했잖아.”
“몰라요. 그냥 욕 한 번 하고 덕 세 번 쌓을래요. 씨발.”
“…….”
“여섯 번 쌓으면 되잖아요!”
도진이 해광초 약병을 들고 일어나 진열대로 옮겨 놓으러 갔다. 쿵쿵쿵쿵, 심기를 숨기지 않는 발소리를 들으며 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젓는 게 아니었다. 안쓰러운 탓이었다.
도진이 화가 많고 다혈질 성격인 건 당연하다.
그는 괴력의 소유자로, 걸음마보다 먼저 힘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태어나자마자 간호사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온갖 사람들의 뼈를 부러뜨렸다. 장난감은 손만 대도 부서져서 쥐고 흔들며 놀지도 못한 아이였다.
평생을 참고 견디며 살고 있으니 속에 화가 쌓이는 게 당연했다.
거기에 이런 진상 고객이 많은 대여점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화가 쌓이고 쌓이면 화병이라는 게 나는 법이다.
화병이 한번 발병하면 완치하기가 어렵다.
이리는 슬슬 도진의 화와 스트레스를 풀어 줘야 할 때임을 알았다.
어떻게 풀어 줘야 할까, 고민하면서 습관적으로 메모를 훑었다.
① 육각나무-싹이 나지 않는 나뭇가지 재생
필요-깃털피리
② 아류개미-봄잠 식량
필요-풀조미료
③ 산간계 (상담)
④ 복기(腹飢)-봄잠 식량
필요-풀조미료
.
.
.
메모해 놓은 내용을 보니 풀조미료가 필요한 건만 두 건이었다. 이리는 좋은 생각이 났다. 핸드폰을 꺼내는데 마침 도진이 쿵쿵쿵 발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도진아. 집 무너지겠어.”
“안 무너지거든요. 전화는 또 왜요? 혹시 엿자리 혼내시게요?”
“아니…. 요리이기한테 연락을 좀 하려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요리이기는 핸드폰이 없네.”
“‘멀나’ 넣을까요?”
“그래야겠다.”
방금 돌아온 도진이 다시 방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가로세로 15cm의 네모난 오색 종이가 반 정도 들어 있는 투명 보관함이었다.
도진이 보관함에서 종이를 꺼내 이리에게 건넸다. 이 오색 종이가 바로 이물인 ‘멀리 나비’로, 이 시대에 아직도 핸드폰이 없는 위아들과 연락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나무 새알이 필요한데 오늘이랑 내일 중 언제쯤 갈까?
인사도 없이 용건만 적은 이리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를 포개어 도진에게 다시 건넸다.
“어, 제가 접으라고요?”
“응. 예쁘게 잘 접어 봐.”
도진이 자신 있게 맡겨 두세요, 하고는 신중히 종이를 접었다. 최종적으로 아주 잘 만든 나비가 탄생했다. 평생 힘 조절을 하다 보니까 이런 미세한 부분에도 도가 튼 것이다.
“나보다 잘 접네. 잘했어.”
“제가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하는 편이죠. 아니, 몸으로 하는 건 다. 언제든 맡겨만 주세요.”
“그래. 그럼 멀리 날려 줄래?”
“예엡.”
칭찬을 듣고 금방 기분이 좋아진 도진이 헤벌쭉 웃으며 마당에 나비를 날려 보냈다. 나비는 날개를 팔랑팔랑 움직이며 하늘 멀리 사라졌다. 이것도 어려운 도술인데 훌륭하게 잘 해냈다. 스스로도 뿌듯한지 얼른 칭찬해 달라는 얼굴로 이리의 옆에 앉았다.
“도진이. 날려 보내는 것도 잘하네. 이제 덕만 좀 더 쌓으면 선인 되겠어.”
“오랜만에 뽀뽀해 주실래요?”
“…우린 이어서 일하자.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아.”
“스승님은 어릴 때는 뽀뽀 그렇게 많이 해 주셨으면서. 이제 제 뺨이 말랑말랑하지 않아요?”
“지금이 몇 시지. 아, 11시. 깃털 피리부터 준비해 놓고…….”
“피하는 것도 지금만이에요. 임금님 되면 1일 12뽀뽀 규칙 만들어 버릴… 잠깐. 지금 몇 시라고요?”
“11시가 막 넘었구나.”
도진의 시선이 스케줄표로 향했다.
오전 11시) 육각나무-깃털 피리
아으아악. 다혈질 도진이 다시 금방 분노했다.
“육각나무 이 새끼 이름도 육갑 같은 게 지금 노쇼하는 거 아니에요? 계룡산까지 왔다 갔다 했는데 노쇼하면 진짜 가만 안 둡니다. 말리지 마세요!”
“안 말려. 그럴 일 없으니까.”
“아직도 안 왔잖아요!”
“왔어.”
“네?”
도진이 인상을 확 쓴 채 묻는 그때 딩동, 초인중이 울렸다. 이리 만물 대여점의 초인종을 누르는 이들은 99.999%가 고객이다. 다행히 육각나무는 정시에 온 모양이었다. 도진의 불같은 성질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도진은 ‘육각나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정원의 상수리나무 정도 되는 거대한 나무를 떠올렸다. 이름이 뭔가 각이 진 게 딱딱하고 커다란 나무 형태의 위아일 줄 알았다.
그러나 눈앞의 위아는 20cm 크기에 가지는 하나, 나뭇잎은 딱 세 장 달린 자그마한 나무였다. 본가에서 키우는 다육이보다도 작은 육각나무가 뿌리를 뻗어 찻잔을 쥐고 호로록 차를 마셨다.
“대여점의 차 맛이 그렇게 좋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적당히 미지근하고 쌉싸래한 게 진짜 괜찮네용.”
말투도 귀여웠다. 도진은 이런 위아라면 성질이 뻗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리도 간만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빙긋 웃었다.
“도진이가 탄 거야. 이미 인사는 나눴지?”
“나눴지용. 처음에 전화도 김도진 인간이 받았잖아용. 그때 어조가 무척 거칠어서 무서웠는데 실물은 더 무섭게 생겼네용. 그런데 차 맛은 좋네용. 선입견이었나 봐용.”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동네 위아들한테 소문 좀 퍼뜨려 주세요. 악명만큼 나빠 보이지 않는다고. 차도 잘 탄다고.”
“알겠어용. 어렵지 않지용.”
“감사합니다. 주전부리 좀 드릴까요? 대추 열매가 좀 있는데.”
“……!”
육각나무가 부들부들 떨더니 찻잔을 내팽개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