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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이리도 인사를 건넸다. 지연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음악가라는 요괴인지 귀신인지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 현실이 속상하고 슬펐다.
“잠깐만.”
이리가 누군가에게 말하고는 지연에게 다가왔다.
“잠깐 열어 줄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리가 속삭이고 지연의 어깨를 툭, 건드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눈앞의 초가집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지붕은 온데간데없고, 억새와 갈대를 촘촘하게 엮은 초가지붕에 누런 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무너져 가던 토벽 또한 방금 막 쌓은 듯한 깔끔한 외관으로 변했고, 멍석이나 갈대 따위가 매달려 있었으며 심지어는 작은 나무 마루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연은 마당 한쪽에 쌓인 장작더미와 그 주위를 두르고 있는 튼튼한 담장을 보며 입을 벌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도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였다. 도깨비나 요괴를 상상했지만, 그 존재는 한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회색 저고리와 다리통이 넓은 바지에 하얀색 학창의를 완전히 여미지 않은 채 걸쳤다. 기다란 곰방대를 물고 있는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까맣게 탄 모습이 전형적인 농가의 어른이었다.
“저 낭자는 누구인데 여까지 데려왔소? 또 직원을 뽑으셨소?”
“그런 건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인간이 둘인데 어찌 신경을 안 쓰겠나. 쯧. 인간도 그 많은 인간을 두고 이런 부리부리한 자를 뽑으니 원.”
음악가는 도진이 대답하자 바로 혀를 찼다. 도진을 탐탁지 않아 하는 마음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음악가 님, 부리부리하다 뜻이 뭔지 압니까? 시원스럽고도 무섭도록 크다 뭐 이런 뜻인데 내가 시원스럽게 잘생겼고, 좀 무서운가 봐요?”
“어찌 인간 아해가 이리 오만방자한가. 이리 선인, 대체 이런 자는 왜 옆에 두는 것이오? 위아들이 모두 무서워하질 않소.”
“본인이 먼저 자극해 놓고 나보고 오만방자하대. 스승님, 저는 억울해요. 제가 먼저 시비 걸지는 않았잖아요.”
이리는 옅게 웃으며 둘 사이에 섰다.
“둘 다 그만해. 도진아, 음악가는 너한테 장난치는 거야. 그리고 음악가도. 도진이 열 받게 하면 나도 못 말린다.”
“이리 선인이 못 말리면 천지간에 말릴 수 있는 이가 없겠구려. 임금님이나 찰마 공주 정도는 될까. 그렇게 싸고도니 더 오만방자해지는 것 아니겠소?”
이리가 제자 편을 든다며 혀를 차던 음악가가 혼잣말하듯이 덧붙였다.
“이런 자를 왕 후보로 두고 있으니 대체 선인의 취향은 알 수가 없구만.”
‘왕 후보?’
지연은 호기심이 들었으나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렇게 도진이 도발하지 말랬지. 아무튼 조율은 며칠 걸릴까?”
“양이 꽤 많구려. 사나흘 걸릴 듯하오.”
“완성하면 바로 연락 줘.”
“오케이.”
신선 같은 노인의 입에서 ‘OK’가 나왔다. 지연이 가장 소리를 낼 뻔한 순간이었다.
이리의 지시로 도진이 박스를 초가집의 방 안으로 옮겨 주었다. 지연은 열린 창호문 사이로 최신 일체형 컴퓨터를 발견하고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연예인, 그것도 요즘 가장 인기 많은 남자 아이돌 포스터도 보인 것 같았다.
“문 닫아 드려요?”
도진이 아니꼽게 물었다. 지연은 이해 못했지만 ‘이 공간을 원상 복귀시킬까’라는 뜻이었다.
“되었네. 올 이도 없으니.”
이리와 도진이 짧게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지연은 노인과 대화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둘과 함께한다면 언젠가는…. 희망을 품고 얼른 둘을 따라갔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희한한 것들은 다 뭔가요? 음악가 님은 산신령이신가요? 제가 그분을 어떻게 볼 수 있었던 건가요? 앞으로도 계속 보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차에 타자마자 지연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리가 맑은 웃음을 지었다.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희한한 것들은 이물이라고 하고, 음악가는 산신령이 맞아. 내가 잠깐 네 영안을 트게 해 주었지만, 일회성이라 계속 보게 해 줄 수는 없어.”
지연은 진짜로 산신령이 존재했고, 산신령을 직접 봤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하고 환희에 젖었다가 뒤이은 말에 다시 좌절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확실하게 인사를 해야만 했다.
“이런 경험을 하는 게 꿈만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고마워요.”
지연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문제는 이리의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손을 함부로 붙잡았다는 인식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이리는 잡힌 손이 난처했으나 이 자가 귀여워서 가만히 놔두었다. 도진의 운전이 점점 거칠어졌다.
“도진아. 돌아가기 전에 병원에 들르자.”
“네.”
이리가 병원 이름을 일러주자 도진이 내비게이션에 찍고 엑셀을 밟았다.
가는 동안 지연은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 신령님이 임금님이랑 찰마 공주를 언급했는데 그분들은 어떤 분들이에요?”
“임금님은 진현계의…. 그러니까 신선들이 사는 곳을 다스리고, 찰마 공주는 하계를 다스리는 왕이야.”
“신령님이 도진 님을 보고 왕 후보라고 하셨는데.”
“이제 곧 진현계의 임금님이 왕위에서 내려오시거든. 세 명의 후보 중 한 명이 임금이 되는데 도진도 후보 중 하나야.”
“우와아아….”
지연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도진을 쳐다봤다. 도진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세 후보 중 현재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말씀해 주시죠.”
“그렇지.”
“우와아아아…. 정말 대단한 분이셨구나.”
도진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정말 대단한 분은 그쪽 옆의 이리 선인님입니다. 내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후견인 덕분인데, 그 후견이 바로 그분입니다. 임금님도 함부로 못 하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시죠.”
“세상의 유일한 존재…….”
“만물의 주인, 삼라만상의 그림자, 마지막 태고의 선인, 가장 앞선 천지신명. 그게 바로 내 스승님입니다.”
“와아아아…….”
이번엔 지연이 이리를 초롱초롱하게 쳐다봤다. 이리는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사실 도진도 저 칭호가 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만나는 위아마다 이리를 우러러보고 저렇게 표현하기에 그냥 뭔가 엄청나고 위대한 별칭이구나 했다.
지연의 호기심이 채 다 풀어지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지연은 활기차게 문을 열고 내렸다.
병원에선 죽는 사람이 많으니까 이번엔 귀신을 보는 건가, 퇴마를 접하는 건가 기대하고 있었다.
“도진아, 가방.”
“네.”
도진이 이리 앞에서 계속 챙기고 다니던 서류 가방을 두 팔에 받쳐 들었다. 이리가 비밀번호를 맞추고 가방을 열자 온통 검은 공간이 나왔다.
이 서류 가방은 ‘입의 문’이라고 하는 이물로, 부피와 크기, 개수 제한 없이 물건들을 수납할 수 있다. 단, 무게는 고스란히 증가하기 때문에 도진 정도의 괴력 소유자가 아닌 이상 들지 못했다. 지금도 200kg이 넘으므로 이 가방을 얇은 선반 따위에 올려 두면 선반이 기울거나 무너지기도 했다.
이리가 검은 공간에 팔을 쏙 집어넣고 뒤적이며 투덜거렸다.
“우리 여기 정리 좀 해야겠다. 뭐가 이렇게 많아?”
눈으로 보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창고처럼 변했다. …라기보다 이미 창고처럼 쓰이고 있었다. 힘 좋은 도진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다지 사용 빈도가 높지 않았고, 도진이 들어온 후에는 그에게 맡겨 놓고 이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실제로 도진은 단 한 번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손을 집어넣고 ‘무엇을 가져가야지’ 생각하면 저절로 잡히기 때문에.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깔끔하게 정리할게요.”
“같이 하자.”
같이 하자면서 이리는 이미 이 짧은 시간에 뒤적뒤적 정리하고 있었다. 도진은 그 모습이 몹시 귀여워서 말리지 않았다.
이리가 꺼낸 것은 수묵화가 그려진 하얀 부채였다. 이리가 부채를 접어 버려서 지연은 무엇을 그린 수묵화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자.”
이리가 병원으로 앞서 걷자 도진도 얼른 옆에서 발을 맞췄다. 지연은 뒤따라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햇살 좋은 오전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무도 이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도진이나 이리나 눈길을 끄는 외모인데 아무도 집중하지 않다니, 또 요상한 주술을 부린 걸까 싶어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쪽이야. 도진아, 너도 보이지?”
“흐릿하게요.”
“네가 길 안내할래?”
도진이 코웃음을 치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 내 스승님 또 테스트하시네. 그러죠. 가 봐요. 병원에서 미아 되지는 않겠지.”
“저기, 무엇이 보인다는 건가요?”
지연이 용기 내서 묻자 이리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하얀 흐름 같은 게 여기… 이렇게 길게 이어져 있어.”
이리가 손으로 선을 주욱 그었는데 병원 위쪽부터 시작해서… 지연의 앞에서 멎었다.
지연이 웃는 듯 우는 듯, 겁나는 듯 신나는 듯 복잡한 얼굴을 했다.
“저한테 귀신이 붙은 건가요? 어떤 귀신인가요? 이 병원에서 죽은 귀신인가요? 저도 볼 수 있을까요? 아까 산신령님을 본 것처럼.”
“지금 보러 갈 참이란다. 도진아, 출발하자.”
“예에.”
도진이 성큼성큼 걸었다. 지연은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귀신을 본다니 신은 나는데, 그 귀신이 퇴마 영상 속의 섬뜩한 존재처럼 생겼다면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 영상 속 귀신은 정말 공포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끔찍하고 섬뜩한 것을 보게 되든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이 자신을 더 데리고 다니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기억도 잊게 하는 요상한 도술을 쓴다거나…. 그렇게 오늘의 일이 백일몽처럼 남게 될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 내린 도진은 1인실 병실 앞에서 멈췄다. 이리가 지연에게 들어가 보라고 고갯짓했다. 지연이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돌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예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침대 옆의 의자에 지연의 어머니와 동생이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온 세 명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노란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는 지연이 잘 아는 얼굴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마주하는 아주 익숙한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