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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는 말없이 옅은 미소만 띠었는데, 운전석의 도진이 도리어 혀를 찼다. 그러자 지연이 도진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그동안 여기 맴돌면서 실례한 거 알아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그쪽 분들이 동영상에 나오는 분들이란 걸 알고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요. 늘 찾고 있었으니까…. 원하지 않으시면 동호회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게요. 맹세할 테니까 저도 여러분과 함께하면 안 될까요? 제발요. 뭐든 할게요. 잔심부름 저 시키세요. 저 일 잘해요. 빠릿빠릿해요.”
차라리 영감이라도 있었다면 직원으로 썼겠지만…. 도진은 이리가 당연히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위아들이 탐탁지 않아 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지연을 잠시간 보던 이리는 뜻밖의 말을 했다.
“도진아. 서류 가방 챙겼지?”
“네?”
“입의 문.”
“아, 네. 갖고 왔어요.”
“그럼 가자.”
“……데리고 가자고요?”
“응.”
“신령이 싫어할 텐데.”
“네가 언제부터 음악가의 심기를 챙겼니. 늦겠다. 출발하자.”
“네에. 전 뒷일 몰라요. 스승님이 알아서 하세요.”
도진이 뚱하게 대답하고는 핸들을 돌렸다.
누가 봐도 더 어려 보이는 쪽이 말을 놓는 광경을 지연이 선망과 호기심을 담고서 지켜봤다.
이동하면서 민지연이 어떻게 이곳에 다다랐는지를 들었다. 최근에 친구가 이 동네로 이사와 집들이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을 잃어 버려서 이 골목, 저 골목 걷다가 수상할 정도로 안개가 짙은 골목을 발견했어요.”
“하얀 안개요?”
“네. 너무 하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꿈을 꾸는 듯한 말투였다. 그때를 회상하며 새삼 감동에 젖은 것 같았다.
“비도 오고 있었거든요. 제가 본래 그런 스산한 광경을 그냥 못 지나쳐요. 흰 안개가 정말 뭔가 있을 것처럼 신비롭게 내려앉아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까 당신들이 사는 그 집이 있었어요.”
만약 ‘이리 만물 대여점’이라는 현판이 보였다면 집이 아니라 가게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분명히 영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좋은 단독 주택이구나 하고 돌아서려는 그때, 저 사람을 발견한 거죠.”
지연이 도진을 가리키며, 그때 피아노를 들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최소 300kg인 그랜드 피아노를 한 손으로…….
현재 퇴마 영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기억에 의존해서 출연자를 알아봐야 한다. 그런데 도진은 그때도 이미 190cm이 넘는 체격에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의 뇌리에 남아 버렸다. ‘새보름’ 동호회 사람들은 서로의 기억력을 바탕으로 출연자의 초상화를 그렸다. 어떻게든 잊지 않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단서 하나 찾지 못했는데 그렇게 우연히 발견할 줄은 몰랐어요.”
“그 초상화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민지연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줬다. 아주 똑같지는 않았으나 언뜻 비슷하긴 했다.
“퇴마 영상 출연자를 닮은 남자가 한 손으로 피아노를 들고 가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으니… 근처를 맴도는 것도 당연하네요.”
이리가 이해해 주자 지연의 표정이 화아아 밝아졌다. 반면 도진은 어두워졌다.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야. 너는 아무 잘못 없어. 이렇게 될 인연인 거지.”
“아. 스승님은 제가 인연론 싫어하는 거 아시면서.”
“사실인 걸 어쩌겠어. 해가 싫다고 해를 없다고 할 거야?”
“그거랑은 다르죠. 인연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럼 네 잘못인 걸로 할까.”
“…이렇게 될 인연이었군요. 완전 딱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민지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저도 두 분 성함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직업은 퇴마사시고…. 나이는 어떻게 되시는지.”
“저는 이리. 저쪽은 김도진이에요. 도진이는 지연 씨보다 어리고 저는… 아주 많아요.”
이리는 퇴마사가 아니란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어차피 현재로서는 믿지 않을 테니까.
“어쩐지 도진 님이 스승님이라고 불러서…. 높은 분 같은데 제게도 말을 놓으세요.”
“그래. 말 편하게 할게.”
“저기 혹시 이리 님은… 몇 살이세요?”
“아주 많아. 너는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
“네? 아 부모님 계시고, 외동이에요.”
“외동딸이구나. 부모님이 걱정이 많겠어.”
“그래도 저희 부모님은 오컬트를 나쁘게 생각하진 않아요. 이해해 주시는 편이고…. 연구회 멤버들 중엔 부모님과 절연한 사람도 꽤 되는데. 그건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흉가 체험하러 다녀서 그렇고요. 저는 제대로 일도 하고 있거든요.”
“장하네.”
이리가 빙긋 웃었다. 어여쁜 청년의 미소에 안 그래도 흥분 상태인 지연의 뺨이 붉어졌다.
어째서인지 부끄러웠다.
이리의 맑은 시선이 지연을 부끄럽게 했다. 그의 눈은 지연이 보아 온 어떤 것보다 까맸다. 우주에 별이 없다면 이런 색일까? 지연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가 슬며시 다시 보았다.
검고 맑은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돌렸다가, 또 다시 슬금슬금 그를 마주 보게 되었다.
정말 이상하지만, 이리라는 신비한 청년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이상은 시선을 피하고 싶더라도 그를 쳐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그때였다.
덜컹.
장해물이라도 있었는지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씨발, 운전 중에 거슬리게 하네.”
도진이 거칠게 말했다. 지연은 잠깐 운전석을 바라봤다가 다시 이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리의 시선은 이미 도진에게로 향해 있었다. 지연은 다행스러우면서도 아쉬웠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 * *
그들이 탄 차는 산으로 향했다. 지연이 ‘이런 데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구나’하고 놀랄 정도로 깊은 곳까지 들어온 후 차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지연도 산을 자주 다녔는데 3월 초에 이렇게 초록이 무성한 산은 처음 봤다. 혹시 인간계가 아니라 신선계 같은 곳이 아닐까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물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충남 계룡산이야.”
“충남이요……. 어?”
실망하던 지연이 눈을 부릅떴다. 서둘러 핸드폰 시간을 확인하니 서울에서 출발한 지 30분이 막 지난 참이었다.
“충남이요? 진짜 충남이에요? 대한민국 충청남도에 30분 만에 왔다구요?”
“그래. 서울에서 충남까지 30분 만에 오지 못하면 용마라고 할 수 없지. 속도에 익숙하지 않은 탑승객이 있어서 좀 천천히 달린 편이야.”
지연이 우와아아 감탄사를 연발했다. 연신 핸드폰을 만지는 게 사진을 찍거나 동호회 사람들에게 연락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은 꿋꿋하게 참았다.
“아, 저기.”
그때 도진이 차 트렁크에서 박스 두 개를 꺼내는 걸 보고 얼른 다가갔다.
“도와드릴게요. 박스 하나 주세요.”
“됐습니다.”
도진이 차갑게 거절했다. 그는 커다란 박스 두 개를 왼팔에 끼우고, 오른손으로는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들었다.
이리는 당연한 듯 아무 짐도 들지 않고 길을 앞장서 걸었다. 조금 더 걷자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길이 나왔다. 수풀이 너무 우거져 지나갈 틈도 없어 보이는 길로 이리가 들어갔다. 지연은 당황했으나 곧 일어난 일을 보고 더욱 당황했다.
이리가 발을 내딛자 수풀이 길을 비켰다.
도진은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작은 등 뒤를 따라갔다. 지연도 재빨리 뒤따르며 뒤를 돌아보니 수풀이 자동문처럼 다시 닫히고 있었다.
정말이지 동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앞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 무엇을 보든 놀란 티도 내지 말고. 우리가 만날 위아는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무척 크거든.”
“네. 조용히 잘 있을게요.”
지연은 위아라는 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위아라는 단어는 퇴마 영상에서 한번 등장했다.
‘사실 귀신은 아니고 ***라는 존재인데-’
위우아, 위우야, 위아, 위야, 우야, 우아 등. 여러 추론이 많았는데 그중에 위아가 옳았다. 위아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이석진이 떠올랐다. 그에게 알려준다면 정말 기뻐할 것이다. 함구하기로 맹세한 게 점점 후회되었다.
10분 정도를 더 걷자 조선시대에서 튀어나온 듯한 초가집이 나타났다. 벽과 지붕이 무너져 가고 있는 초가집이었다. 거의 초가집의 흔적이라고 봐도 무방한,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음악가 님, 저희 왔습니다.”
도진이 인사하며 땅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1분쯤 기다렸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안 나오네요. 외출한 거 아니에요?”
“음……. 네 생각엔 외출한 것 같아?”
도진은 이리가 자신을 테스트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주위에 기운을 퍼뜨렸다. 나름 수년을 수행 중인 도진은 금방 미약하게 숨겨진 기운을 발견했다.
“안에 있군요.”
“맞아. 잘했어. 낯선 기운 때문에 모습을 안 드러내는 것 같은데 굳이 얼굴을 볼 필요는 없지. 깃털 피리 좀 꺼내 줘.”
“네.”
칭찬받은 도진은 속으로 오두방정을 떨며 춤을 췄지만, 겉으로는 점잖게 깃털 피리를 꺼내 이리에게 건넸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라는 말을 들어서 잠자코 있던 지연이 잽싸게 다가가 박스 안쪽을 살펴봤다. 이상한 모양의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는데 이게 다 신묘한 물건들이라 생각하니 당장 핸드폰을 들이밀고 싶었다. 혹시라도 유혹에 넘어갈까 봐 핸드폰을 주머니 깊숙이 쏙 넣어 버렸다.
도진은 지연의 행동이 신경 쓰였으나 이리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그는 피리를 상자 위에 두었다.
“음악가. 이것부터 해결해 줘. 조율하고 연락 주면 바로 와서 가져갈게. 수고비는 60%만 박스에 넣어 뒀어. 그럼 이따 봐.”
이리가 돌아서는 그때 바람이 휭 불었다. 도진이 재빨리 이리의 어깨를 감쌌다. 지연은 혹시 뭔가 나타나려나 싶어서 세찬 바람 속에서도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음악가 님.”
아니, 나타난 모양이었다. 도진이 허공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