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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의 스승이자 대여점의 주인인 이리 선인.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태고의 선인이나 누군가 본다면 영락없이 도진과 또래거나 더 어리게 볼 외양이었다.
“스승님, 진현계에 다녀오신 거죠?”
“응.”
“왜요? 제가 재료 다 구해 왔는데. 제자 못 믿어요?”
이리의 눈길이 작업대 위로 향했다. 도진은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한참 전에 와서 서류 정리까지 다 해 놨다구요. 스승님이 어려워하시는 노트북에도 제가 다 백업해 놨어요. 와서 확인하실래요?”
“훌륭하네. 잘했어.”
이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선인이 가진 기운은 매우 맑고 정순하여 근처에 있는 자들의 근심이나 불안을 한풀 꺾이게 만든다. 도진은 능글맞게 웃으며 이리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뽀뽀해 주세요.”
이리의 표정이 대번에 난처해졌다.
“뽀뽀는 안 돼.”
“아니, 키스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보드라운 입술 좀 문대 달라는 건데 그것도 싫냐구요.”
“도진아…. 나는 네 첫걸음마도 본 사람이야.”
“첫걸음마 본 김에 첫키스도 봐 주시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네 부모님을 볼 낯이 없다. 내가.”
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은 미성년자일 때부터 이리에게 연정을 품었다. 본래도 티를 팍팍 내는 편이었으나 성인이 된 후로는 한 층 더 저돌적으로 굴어서 스승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도진이 이럴 때마다 이리는 시선을 피하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괜히 가족 얘기를 꺼내거나 했다.
“알았어요. 입술에 해 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이마나 뺨이나 좀 해 줘 봐요. 제자가 이렇게 일을 잘해 놨는데 칭찬 스티커 하나 안 붙여 줘요?”
“적덕(積德)했다고 생각하렴.”
“하, 거 참. 야박하시네.”
도진은 이번에는 진짜로 해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으므로 내심 실망이 컸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리는 끝까지 입술을 내어 주지 않고 조용히 장갑을 착용할 뿐이었다. 도진은 툴툴거리며 잘록한 허리에 앞치마 끈을 매어 줬다.
이리가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도진은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며칠 전부터 주위에서 맴돌던 사람 있잖아요. 역시 고객은 아니더라고요. 그냥 우리가 올렸던 영상 보고 따라온 인간이었나 봐요. 제가 사이비 흉내 내서 내쫓았으니까 이제 볼 일 없어요.”
“글쎄. 아직 집 앞에 있는데.”
“네?”
도진이 얼른 노트북으로 대문 밖 CCTV를 살폈다. 정말로 아까 그 사람이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간판 옆에 있는 초인종은 누르지 않은 채 문틈을 기웃거리거나, 발돋움해서 담벼락 건너편을 보려 한다거나 남들이 수상하게 여길 만한 행동은 다 하고 있었다. 도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끈질긴 사람이네. 분명 인간처럼 보였는데 혹시 잡귀인가요?”
“네가 지금 노란 옷을 입고 있잖아.”
“아, 잡귀는 노란색을 싫어한다고 했죠…. 그럼 인간 맞는데 하. 진짜 내가 또 사이비 흉내를 내 줘야 하나.”
“그냥 둬. 만약 내일도 오면 그때 해결하자.”
“예엡.”
“깃털 피리에 먼지가 많이 들어갔네. 한참 위아가 찾질 않아서.”
이리가 깃털 피리 위의 수북한 먼지를 후, 후 불었다.
“제가 닦을까 했는데 위험할까 봐 안 닦았어요.”
“잘했어. 이제 닦아도 되는데 네가 할래?”
“맡겨 주세요.”
이리가 냉큼 도진에게 넘겼다. 도진은 마당으로 나가 먼지를 털고 꼼꼼하게 닦았다. 그동안 이리는 도진이 챙겨 놓은 접시에 흑자리공 다섯 뿌리를 잘게 잘라 넣고 생수를 부었다. 지름 20cm의 납작한 접시는 생수 12개를 부어서야 그나마 물 높이가 찰랑찰랑해졌다. 이리는 마당의 화로에 불을 피우고 접시를 올렸다. 흑자리공 다섯 뿌리가 말랑말랑해질 때쯤 뱀 뿔을 넣고 더 끓였다.
접시는 ‘은 접시’라는 이름의 이물이었고, 화로는 ‘오동 화로’라는 이름의 신물(神物)로, 대여점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재산이었다.
“스승님, 먼지 다 닦았어요.”
“물 넘치지 않게 잘 보고 있어.”
“네.”
깃털 피리의 생김새는 평범한 회색 새 깃털이었다. 이리는 깃털의 뿌리 부분을 입에 문 뒤 후, 불었다.
비-
소리가 엉망이었다.
“미친. 원래 그런 소리가 나는 건 아니죠?”
“아니지. 오랫동안 안 썼으니 조율부터 해야 해.”
“이게 조율이 되는구나…. 스승님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시네요.”
“나는 못 해.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도진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음악가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전화할게요.”
“전화하다가 또 열 내려고? 그냥 내가 할게.”
이리가 안으로 들어갔다. 도진은 따라가고 싶었으나 화로를 지켜봐야 해서 가지 못했다. 다행히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섯 뿌리가 완전히 녹았다. 검은색 물에 녹색 기운이 감돌았다. 도진이 접시를 조심히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의 핸드폰은 작업대 위에 있었고 대여점 전화기도 잘 놓여 있었다. 눈치 빠른 도진은 접시를 올려놓고 이물 방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이리가 이물 세 개를 품에 안고 진열대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음악가한테 부탁할 때 한꺼번에 부탁하려고 다른 악기류 찾는 거죠?”
“응. 혼자 찾아도 되는데.”
“같이 찾아요. 어차피 저 할 것도 없는데. 스승님은 오른쪽부터, 저는 왼쪽부터.”
“고마워.”
한 시간의 발굴 끝에 이리는 스무 개의 이물을, 도진은 다섯 개의 이물을 찾았다. 도진은 이리와의 개수 차이에 내가 불성실했나? 잠시 반성하는데, 자세히 보니 이리는 웬 이상한 연필과 커다란 조개껍질 같은 것도 들고 있었다. 악기 형태가 아닌 것을 보고 악기로 분류하는 것은 아직 도진의 경력으로는 부족했다.
“수고했어. 내가 다시 찾아볼 테니까 너는 잠깐 쉬고 있어.”
“수고는 무슨. 저 진짜 일 처리 개떡 같네요…….”
“아니야. 다섯 개나 찾고 많이 늘었네.”
이리가 거듭 칭찬했지만 도진은 이미 기가 죽었다.
잠시 후 이리는 도진이 찾았던 곳에서 조율이 필요한 이물 열 개를 더 찾아왔다. 그래서 도진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이리가 서랍 속 다섯 개의 핸드폰 중 흰색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눌렀다.
– 어, 이리 선인이 맞소?
“응, 나야.”
-한 달만이로군. 이번엔 무슨 일로 연락하셨소?
“조율을 좀 맡기려고.”
목소리만 들으면 상대는 노인이었고, 이리는 소년과 청년 그 사이였으나 자연스럽게 혼자 말을 놓았다.
“언제 시간 돼? 나야 빠를수록 좋지. 내일도 돼?”
통화 내용을 듣던 도진이 스케줄표를 보고선 고개를 저었다.
“내일 오전에 상담 있어요.”
이리는 괜찮다는 듯 손으로 O 표시를 만들었다.
“내일 갈게. 할 거 많아. 목록 바로 보내 줄게. 그럼 내일 봐.”
전화를 끊은 이리는 스케줄표에 적힌 ‘두눈큰입 3차 상담’이란 문장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오전 중으로 끝날 테니까 괜찮아. 점심 넘길 것 같으면 두눈큰입이 싫어하는 민들레향을 몰래 뿌려.”
“네. 음악가한테 지불은 또 말린 도토리고요?”
“응. 예전에 사 놓은 거 남았지?”
음악가는 작은 다람쥐가 요물과 영물의 진화 단계를 거쳐 신령이 된 케이스였다. 산에 사는 신령들은 대부분 도토리를 좋아해서 다른 신령들과 교류할 때 도토리를 화폐로 삼을 정도였다. 다람쥐 출신의 음악가 역시 도토리라면 사족을 못 썼다.
도진이 도토리 주머니를 서랍에서 꺼냈다.
“한 줌 남았는데 이 정도로 되나요?”
“음. 좀 부족한데 괜찮아. 여기에 줄광대 무형문화재 사인 폴라로이드도 얹어 주지 뭐.”
나중에 까먹지 않게 사진을 도토리 주머니에 넣어 놨다.
“요리이기는 화요일이나 수요일쯤 만나러 가면 되겠구나.”
“요리이기가 누군데요?”
“청주에 사는 도깨비. 아류개미의 봄잠 비축 식량 제작에 요리이기가 가진 대나무 새알이 필요해.”
이리가 메모지를 한 장 뜯어서 작업 일정을 쭉 써 내려갔다.
① 육각나무-싹이 나지 않는 나뭇가지 재생
필요-깃털피리
② 두눈큰입(상담)
③ 삼각록-귀 제작
필요-주홍나비 고막
④ 아류개미-봄잠 식량
필요-풀조미료
.
.
.
“어, 풀조미료는 대여 중이잖아요. 아직 한 달 남았는데 어떡하시게요?”
“직접 만들 생각이야.”
“이물을 만들 수도 있군요….”
“일회용만이니까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저 그런 탐욕스러운 사람 아니거든요. 제가 욕심내는 건 하나밖에 없어요. 바로 스승님의…….”
그때 지잉- 메시지가 왔다.
음악가
목록.준다며.아직오.지않앗소.
도진이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신령이란 게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도진아. 입조심.”
“…….”
도진은 턱에 호두를 만든 채 음악가에게 맡길 이물 리스트를 보냈다.
둘은 다시 이물 작업에 착수했다. 일이 워낙에 많아서 해가 지고도 작업이 이어졌다. 이리는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도진은 끼니를 제때 먹어 줘야 하기에 저녁 식사 시간을 가졌다.
도진은 후딱 비빔밥을 만들고 이리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저 없을 때는 어떻게 혼자 다 했어요? 그때는 의뢰, 상담, 회수, 판매, 대여, 수확 전부 스승님 혼자 하신 거잖아요. 지금은 판매도 없어지고, 둘이서 하는데도 이렇게 바쁜데 뭐 분신술이라도 썼어요?”
“나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그냥 하니까 되더라.”
“솔직히 지금 둘로도 힘들어요. 얼른 아무나 한 명 구해야 된다니까요.”
“구인글 올렸는데도 연락이 없잖아.”
그들은 직원을 더 구하기 위해 인터넷에 구인글도 올린 상태였다. 그러나 영감 있는 사람이 없는지 아무 연락도 없었다.
“한 번 더 올려 볼게요. 대한민국에 인구가 오천만 명이라는데 누군가는 읽겠지.”
도진은 밥을 후루룩 먹고는 인터넷에 다시 글을 게재했다.
이리만물대여점
경력성별나이무관1명
서류정리/연봉4000/9-6
연락처☞
연락처는 영감이 있거나 감식안을 가진 이들에게만 보이므로 일반인들은 이 업체는 왜 매번 연락처를 적지 않는지 답답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