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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자리공 다섯 뿌리, 흰 꿩 깃털 한 줌, 15mm 뱀뿔 두 개]
여기에 방금 결제한 생수 2L 6개 묶음 두 개까지.
도진은 핸드폰에 메모해 놓은 리스트를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화면을 껐다. 스승님이 심부름시킨 재료를 반나절 만에 전부 확보한 건 처음이었다. 흰 꿩 서식지인 두류산 산기슭에서 흑자리공을 발견했고, 깃털을 확보하고 하산하던 중에 뿔 달린 뱀과 마주쳤다. 운이 좋은 날이다.
이제 돌아가서 스승인 이리 선인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나면, 그리고 그 칭찬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라거나 뽀뽀를 해 주는 것이라면, 오늘이 바로 올해 가장 운수 좋은 날일 것이다. 아직 3월 5일밖에 안 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말이다.
이리 선인은 도진이 어렸을 때는 자주 이마나 볼에 뽀뽀해 줬는데, 최근 몇 년간은 이쪽에서 보채야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고 고운 입술을 내주고는 했다. 정말 야박하고 다정한 분이었다.
‘이번에는 꼭 뽀뽀해 달라고 해야지. 최소 쓰다듬이고 포옹도 받아 내겠어.’
도진은 사리사욕 가득한 다짐을 하며 2L 생수 6개짜리 두 묶음을 한 손에 들었다. 그 위에는 특수 보존 처리가 된 천 가방을 올렸다.
무거운 짐을 한 손에 가뿐히 들고 마트를 나서는 남자를 사람들이 신기한 눈길로 쳐다봤다가, 얼굴을 보고서는 감탄을 흘렸다. 체격도 좋은 사람이 외모까지 저리 잘생겨도 되는 걸까?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콧날은 유려하게 쭉 뻗어 있었다.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붉은 기가 도는 눈빛이 어쩐지 사납고 위압적이라 오래 쳐다보지는 못했다.
도진은 자신에게 와 닿았다가 흩어지는 시선들을 느끼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10분 정도 걷자 그의 목적지가 나타났다. 한적한 주택가 골목은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아직도 기와지붕을 고수 중인 단독주택이 하나 있었다.
까만 대문과 하얀 담벼락, 그 위로 가지를 뻗은 상수리나무. 도진은 까만 대문 옆에 걸린 현판을 읽었다.
「이리 만물 대여점」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현판이었다.
주택가에 위치한 이 대여점은 ‘위아’라는 이형의 존재들을 대상으로 ‘이물(異物)’이라는 신묘한 물건을 빌려주는 곳인데, 일종의 ‘위아 전용 종합서비스센터’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위아라는 것은 인간, 짐승과 초목, 사물을 제외한 모든 존재를 말한다. 흔히 인간이 귀신 혹은 요괴라고 부르는 존재들부터 장사, 도사, 영물, 신령, 도깨비… 저 높은 곳에 거주하는 선인들까지 모두 ‘위아’라고 칭한다.
대여점의 주인인 이리 선인 또한 위아였다.
김도진은 집에서 보낸 시간보다 이 대여점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지금까지는 미성년자였던지라 학교 끝나고 몇 시간 돕는 게 끝이었지만, 올해 생일이 지나자마자 정식 계약서를 쓰고 어엿한 정직원으로 취업했다. 이리 선인은 대여점에 정직원을 두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도진은 얼마나 많은 위아들이 대여점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어떤 실책도 잡히지 않도록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해도 고객들에게서 좋은 점수를 얻지는 못했다. 이유는 그의 고압적인 성격에 있었다.
대여점에 있는 721개의 이물들과 부속 재료들, 수천 종의 위아들을 암기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흰 눈을 뜨고 보는 위아 고객들에게 성질머리를 누르고 친절하게 대하는 건 더 힘들었다. 워낙 성격이 불같고 오만하며 예민했으므로…….
위아 고객을 앞에 두고 늘 ‘참자’, ‘나는 수행 중이다’, ‘화내지 말자’ 다짐해도 결국에는 성질이 뻗쳐 버리고 말았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상황도 그러했다.
도진은 대문을 열지 않고 뒤돌아섰다. 아까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사람이 도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히익, 하면서 골목에 주차된 차 뒤로 숨었다.
‘일단 인간 여성 형태인데. 둔갑인가?’
그 잠깐 사이에도 도진은 상대의 생김새를 파악했다. 하나로 묶은 갈색 머리에 레터링 면티와 청바지를 입은 인간 여성의 모습.
며칠 전부터 계속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대뜸 대문을 발로 차며 들어오는 위아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소심하게 주변을 배회하는 존재들도 있다. 도진의 성격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거기, 인간으로 둔갑하신 분? 아니, 혼령이신가. 아무튼 고객님?”
또다시 히익,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기 직원입니다. 겁내지 않으셔도 되세요.”
“…….”
“고객님?”
도진이 생수를 대문 앞에 내려놓고 천 가방만 어깨에 걸친 뒤 상대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인간 혼령인지, 인간으로 둔갑한 요괴인지 모를 그 사람은 주차된 차와 옆집 담벼락 사이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앉아 있었다. 놀란 얼굴이었는데 두려움이나 공포심보다는 호기심이 담겼다. 방금 숨어 버린 것 치고는 시선도 피하지 않았다.
“예약은 하셨습니까?”
“…….”
“안 했죠? 대여점은 인간 마을에 있기 때문에 이 앞에서 떠돌고 있으면 안 된다고 선인님께서 몇 번이나 공지를 때렸는데 계속 이따위로 나오면-.”
도진이 말을 멈췄다. 그의 눈길이 여자의 살구색 피부에 닿았다. 곧이어 초점이 잘 잡힌 눈동자와 붉은 입술에도.
일단 혼령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 둔갑이겠지? 인간으로 둔갑한 위아여야 하는데. 절대로 인간이 아니어야 하는데. 제발.
‘망했다.’
불길한 직감이 든 도진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이번엔 여자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저, 저기요!”
여자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인간 구역이라니요? 저 보고 혼령이라고 했죠, 방금? 대체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귀신 말하는 건가요? 그리고 저기 있는 생수 12개를 한 손으로 들고 온 거 맞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대체 당신은 누구고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도진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직감대로 역시 이 사람은 위아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
안개에 뒤덮인 골목은 평범한 인간이 다가오기 힘든데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다. 도진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도를 믿으십니까?”
“네…?”
“여기는 혼령과 영을 떠받드는 대지구 우주진리교의 예배당이 있는 곳이며 저는 대지구 우주진리교의 집사입니다. 당신은 대지구 우주진리교의 도를 믿으러 온 새 신도인가요?”
“대지구 우주진리교…?”
“우리 우주진리교에 입성한 것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영적 충만함을 이뤄 줄 영금서는 가지고 오셨습니까?”
“…영금서가 뭔데요?”
도진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구부렸다.
“돈.”
“…….”
“우리 우주진리교의 교주님께서는 신도님의 충만한 영금서를 밑바탕으로 더 충만한 영적 충만함을 충만하게 이뤄 내 주실 거라고 믿사옵니다. 어떻게, 얼마나 가지고 오셨지요?”
“아, 저기. 제가 착각한 것 같은데.”
“계속 이 근처에서 맴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신도님의 영혼은 저희 우주진리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저는 그쪽이 동영상에 나온 그분인 줄 알고.”
“저희 대지구 우주진리교의 부흥회 설교 영상을 보셨군요! 영광스럽게도 교단 끄트머리에 제가 자리하고 있었지요. 너무나 환영합니다. 얼른 들어오시지요. 그런데 영금서는 얼마를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재작년에 올라온 귀신 나오는 영상인데. 일명 ‘퇴마 영상’이라구요.”
“귀신이요? 귀신이 붙어서 고생 중이시군요. 충만한 영금서만 있다면 교주님께서는 분명히 신도님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자, 얼마를 가지고 오셨는지요.”
그렇게 엇갈리는 대화를 몇 번 하고 나자, 여자의 초롱초롱했던 눈빛은 점점 차갑게 식었고 나중에는 얼른 자리를 파하고 싶다는 불쾌감만 남았다.
“제가 깜박하고 그 영금서? 그걸 놓고 와 가지고요. 잠깐 갔다 올게요!”
“아, 저희 마당에 ATM기도 있고 무통장 입금으로도 받고 있습니다만.”
“아이고. 내가 그 돈을 왜 깜빡했지. 요즘 계속 이런다니까.”
여자가 난처하게 웃으며 뒤돌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도진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ATM기 소리만 반복해서 외쳤다. 안개 속에서 “뭐야. 사이비 종교였잖아.” 하는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비 종교 전법은 인간에게는 늘 통한다. 다행이긴 하지만…….
‘퇴마 영상이라.’
2년 전의 그 동영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와 함께 촬영한 퇴마 콘셉트 실시간 스트리밍.
한동안 잠잠하더니, 얼마 전 연예인이 TV에 나와 언급하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영상에 스쳐 지나가듯 도진의 얼굴이 한번 나오는 바람에, 가끔 이렇게 영상 속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는 이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길거리에서 컨택 당한 게 이번을 포함해 총 네 번째였다. 지금은 그 영상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승님께 말씀드려야겠지.’
도진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뽀뽀 못 받겠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리 만물 대여점은 선인이 운영하는 신묘한 곳답게 밖과 안이 달랐다.
밖에서 볼 때는 아담한 단독 2층 주택이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만 80평에 주택 공간도 60평에 달하는 넓은 부지가 등장한다.
1층은 업무 공간, 2층은 주거 공간으로 대여점의 주인인 이리 선인은 2층에 살았다. 도진의 경우는 근처 아파트에 집이 있으나, 요즘엔 별 핑계를 대면서 2층의 다른 방에서 함께 숙식하고 있었다.
커다란 상수리나무와 정자가 있는 정원을 지나면서 1층의 전면창을 확인했는데 작업 테이블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승님, 저 왔어요.”
도진은 준비물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2층으로 올라가려다가 계단 중간에서 멈췄다.
이리 선인의 조용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마 진현계에서 뭔가를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임금님’이 다스리고 있는 신성한 세계인 진현계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나오기도 어려운 곳이지만 이리 선인은 시간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세상에 몇 없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리 선인이었다.
‘미리 작업 준비해 놓자. 그러면 칭찬 받을 가능성이 올라갈 수도 있어.’
야망에 찬 도진이 작업 공간으로 돌아왔다.
준비해야 하는 것은 ‘깃털 피리’와 ‘주홍나비의 고막.’ 문 두 개를 지난 안쪽 공간에 이물 진열대가 있다. 이 진열대 또한 길이와 폭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신비한 물건이었다. 다만 이물은 아니고 ‘귀물’로 분류되었다. 도진은 아직 그 차이를 공부 중이었다.
진열 순서는 이물이 만들어진 날을 기준으로 위로 갈수록 최근 것인데, 선인의 말에 따르면 가장 최근 이물이 5년 전 것이라고 했다. 도진은 721개의 위치를 모두 외웠기 때문에 금방 이물을 찾았다.
주홍나비의 고막은 투명유리관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깃털 피리는 뚜껑 없이 접시 위에 놓여 있던 탓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였다. 도진은 우선 두 개를 작업대로 가져와 부드럽고 깨끗한 손수건으로 투명유리관을 닦았다. 깃털 피리는 먼지를 털어 낼까 하다가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손수건만 빨아 널었다. 어렸을 때 아무거나 만졌다가 손가락 두 개가 2개월이나 사라진 후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리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의뢰서와 상담기록서, 대여 내역을 정리하길 한참, 드디어 2층에서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진아. 왔어?”
새카만 머리칼에 흰 피부를 지닌 예쁘장한 청년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