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이 또 어수선해졌다. 아직 동도 트지 않았는데, 벌써 ‘곰’이 온 모양이다. 그동안 익히 봐 왔던 곰들은 늘어져 있기를 좋아했다. 놈처럼 쓸데없이 성실하지 않았다.
무시하려고 해도 ‘곰’의 기척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귀를 팔랑거려 봐도 소용이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고 누웠다. 간지러운 뭔가가 수염을 가늘게 흔들었다. 쌕쌕거리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걸 보면 그것의 정체는 인간의 숨결인 듯했다. 조금 몸을 꿈틀거렸다.
“응? 수남아… 벌써 일어났어?”
어느새 눈을 뜬 ‘그것’이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손을 뻗더니 내 머리를 가만가만 매만졌다. 그 느낌이 별로 싫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 뒀다. 그러자 점점 더 손을 멀리 뻗어 등줄기 전체를 쓰다듬는다. 이번에도 나쁘지 않았다. 슬쩍 턱을 치켜들었을 땐 알아서 턱 밑을 슬슬 긁어 주었다. 제법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나를 괴상한 소리로 불러 댄다는 것만 빼면 썩 마음에 들었다.
밖에서 ‘곰’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것’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곧 이불 밖으로 조심조심 기어 나갔다. 얼마 못 가 멈칫한 건 ‘수컷’이 ‘그것’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 허리에 둘린 ‘수컷’의 팔을 천천히 풀어냈다. 제 딴에는 ‘수컷’을 깨우지 않으려고 그러는 듯한데, 예민한 ‘수컷’은 금세 두 눈을 떴다.
“아, 일어났어요?”
‘그것’이 또 뭐라고 중얼거린다. ‘수컷’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짖을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소리 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문득 ‘수컷’과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난다. 놈은 나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거나 다른 어떤 위협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게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내가 지칠 때까지, 그래서 더는 저를 경계하지 않을 때까지 계속. 강한 놈은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줄 안다. ‘수컷’이 그랬다.
‘수컷’이 갑자기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눈빛을 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냥 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수컷’을 보니, 어느새 ‘그것’을 끌어당겨 주둥이를 맞비비고 있었다.
저 행동이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저렇게 주둥이를 맞대면 약간 간질간질하면서 기분이 조금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웠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할까?
슬쩍 내 주둥이도 내밀어 봤다. 그런데 ‘그것’에게 닿기도 전에 ‘수컷’이 손을 들어 나를 턱 막았다. 감고 있던 눈을 떠서 나를 고요히 내려다보기도 했다.
뭐지? 경계하는 건가? 왜? ‘그것’은 먹이도 아니고, 내가 주둥이를 댄다고 녹아 없어질 리도 없는데.
처음 ‘그것’이 내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난 ‘그것’이 내 사냥감인 줄 알았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가 배가 고파지면 잡아먹어도 될 거라고 여겼다.
물론 ‘수컷’이 이제까지 내게 조공했던 여타 먹이들과 비교해 살아만 있을 뿐,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살집이라곤 거의 없이 뼈만 앙상한 상태였고, 도망칠 기력도 없는 듯했다. 그래서 다른 놈이 먹다가 버렸을 거라 지레짐작했다. 몇 번을 확인해 봐도 수컷임이 분명한데, 정작 나나 ‘수컷’을 경계하지도 않고, 단 한 번도 같잖은 싸움을 걸어오지도 않아서 병들었나 싶었다. 가끔은 한 번씩 툭툭 건드려 죽었는지 살펴보곤 했는데, 움직이기는 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여태 ‘그것’이 다른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은 게 신기했다. 힘도 세지 않은 주제에 발까지 느리면 어쩌자는 건지. 꼭 먹히려고 작정하고 태어난 생명체 같았다.
내 영역에 들어온 이후, ‘그것’은 서서히 내게 관심을 뒀다. 내가 감시할 때마다 겁도 없이 날 빤히 쳐다봤다. 내가 움직일 때도, 먹이를 먹을 때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주객전도가 따로 없었지만, 적의는 없는 듯해서 내버려 뒀다. 오히려 날 경외하는 것도 같았다. 놈이 날 부를 때마다 공기가 살랑살랑 부드럽게 움직였으니까.
언젠가 한 번 ‘그것’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꼴사납게 작은 뼛조각 하나가 목구멍에 걸리는 바람에. 갑갑해서 캑캑거리고 있는데, 대뜸 ‘그것’이 다가왔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나 싶어서 이를 세우고 으르렁거렸지만, ‘그것’은 도망가지 않았다. 되레 내 주둥이를 쩍 벌리더니 다짜고짜 제 손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곤 내내 날 괴롭히던 뼛조각을 빼냈다.
덕분에 금세 목 안이 가뿐해졌다. 내가 입을 다물었다간 ‘그것’이 뼈도 못 추릴 게 분명해서 최대한 버텼다. 그런데도 놈의 약하디약한 피부가 찢겨 피가 줄줄 흘렀다. 놈은 그런 꼴로도 안도한 표정이었다.
‘그것’과는 그때부터 공생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다시 또 목에 뼈가 걸리면 곤란하니까. 약하면서 겁 없는 하룻강아지처럼 구니 이 몸이 곁에서 보살펴 줄 수밖에.
가만 보면 ‘그것’은 편식이 심한 것 같다. ‘곰’이 챙겨 주는 먹이는 곧잘 먹는데, 내가 모처럼 잡아다 준 토끼는 몇 날 며칠 먹지도 않고 방치 중이다. 그 탓에 그 ‘한 입 거리’는 겁도 없이 내 앞에 나타나 총총히 활보하곤 한다. 혹시 그 ‘한 입 거리’가 입맛에 안 맞는 건가 싶어서 족제비를 잡아다 준 적도 있다. 실망스럽게도 ‘그것’은 족제비에게조차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수컷’과 주둥이를 비벼 대던 ‘그것’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보내기 불안해서 슬렁슬렁 그 뒤를 따라갔다. ‘그것’이 ‘곰’을 향해 뭐라고 중얼거리자, ‘곰’이 뒤를 돌아보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다시 먹이를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곰’이 매일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건 제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수컷’과 ‘그것’을 거둬 먹이려는 것일 뿐. 곰이라는 족속은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넓고 동료애가 강한 건가? 내심 궁금해졌다.
‘그것’은 곧바로 몸을 씻으러 갔다. 이어서 ‘수컷’이 밖으로 나왔다. ‘수컷’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는데, ‘곰’이 어떻게 알아챘는지 바로 돌아서서 꾸벅했다. ‘수컷’은 고개만 까딱하곤 푹신푹신한 자리로 가서 앉았다.
놈은 평소처럼 새카만 종이를 펼쳐 보지도 않고 나를 빤히 주시했다. 뭐지? 싸움을 걸려는 걸까? 나는 놈과 싸울 생각이 없는데. 요즘 들어 놈은 그렇게 나를 경계하듯 바라보는 횟수가 잦아졌다. 발정기가 가까워지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면, 내가 제게 도전해서 우두머리 자리를 넘볼까 걱정되기 시작했나.
그즈음 귀가 저절로 팔랑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누군가가 내 영역으로 멋대로 침입하려 했다. 얼른 소파 아래로 뛰어내려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를 내다봤다.
머지않아 문이 열리더니, ‘성가신 놈’이 들어왔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샐쭉 입술을 늘어뜨리고 웃는다. 놈은 함부로 내 영역을 침범하며 한달음에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수남아, 좋은 아침.”
‘성가신 놈’은 늘 그렇듯 내 얼굴을 멋대로 잡고 흔들어 댔다. 이를 드러내며 위협해 봤지만, 이상하게 이놈에겐 안 통한다. 대체 이놈은 정체가 뭘까? 하이에나나 갈기만 그럴싸한 사자의 느낌이 물씬 드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미남 씨도 좋은 아침.”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밥 얻어먹으러 왔죠.”
‘성가신 놈’은 곧장 ‘곰’에게 다가가 시끄럽게 떠들더니 한참 만에야 ‘수컷’이 머무는 폭신한 자리로 옮겨 왔다. ‘수컷’은 탐탁잖은 눈빛으로 ‘성가신 놈’을 바라봤다. ‘성가신 놈’은 그런 ‘수컷’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어쩔 땐 천적 같고, 또 어쩔 땐 공생 관계 같은 게 묘한 놈들이다.
성격만 놓고 보면 상극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서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예전부터 그랬다. 번번이 누가 우위를 점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좀 볼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곰’이 끼어들어 말리기 때문이었다.
곧 ‘곰’이 내게 다가와 먹이를 던져 주었다. 난 빠르고, 사냥 능력도 출중해서 굳이 놈이 나까지 챙겨 줄 필요는 없다. 그래도 사양하지 않는 건 ‘곰’이 주는 먹잇감은 늘 질이 좋아서다. 매일 어디에서 그런 고기들을 사냥해 오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막 한입 하려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의식하고 보니, ‘성가신 놈’이 대놓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콧등을 일그러뜨리며 짜증을 내 봤지만, 놈은 실실 웃는 게 고작이었다. 기어이 송곳니까지 드러낸 뒤에야 고개를 돌린다. 번번이 그렇게 심기를 건드리는 이유가 뭘까. 도통 알 수가 없다, 놈의 속내는.
“아, 선생님 오셨어요?”
목욕을 마친 ‘그것’이 신선한 과일과 꽃, 나무 냄새를 폴폴 풍기며 거실로 걸어왔다. 그러자 ‘성가신 놈’이 이제껏 지은 적 없던 환한 얼굴로 살랑거렸다. 어째 놈에게서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모든 짐승은 강자에게 굴복하고 복종하기 마련이다. 아첨하는 것도 자신보다 강한 놈에게 한해서다. 그래서 이상했다. ‘성가신 놈’이 유독 ‘그것’에게 살랑거리는 까닭을. 놈뿐 아니라, ‘수컷’이나 ‘곰’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유별나다. 놈들의 서열은 이해하려다가도 그럴 수가 없었다.
‘수컷’의 시선이 ‘그것’에게 고정된다. 언제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을지 때를 엿보는 모양새였다. 하긴. ‘그것’의 흰 목덜미를 보고 있으면 나도 종종 군침이 돌곤 한다. 털이라곤 없어서 먹기도 편할 것 같고.
그래도 난 ‘그것’을 잡아먹지 않을 작정이다. ‘곰’이 내게 바치는 먹이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른 데다 ‘그것’이 지금처럼 내 털을 골라 주는 게 싫지 않으니까.
그런데 요즘 ‘그것’이 종종 낯설게 느껴진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에게서 드문드문 ‘그것’의 것이 아닌 ‘수컷’의 체취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것’에게서 ‘수컷’의 체취가 나기 시작한 건 ‘그것’이 어느 졸개에게 물려 갔다가 다시 내 영역으로 돌아온 이후부터였다. ‘수컷’이 다시 ‘그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그것’에게 마킹이라도 해 둔 걸까? 어째서인지 그 이후로 ‘그것’에게선 더 강한 페로몬이 뿜어져 나온다. ‘그것’이 수컷만 아니었다면 발정기라고 오인할 뻔했다.
그 때문에 난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그것’을 잘 보살피겠다는 의지를 위협받는다. 특별히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그것’이 자꾸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고, 나만 보면 살랑거리니 수컷 주제에 새끼라도 배고 싶나 의아해지기 일쑤였다.
‘수컷’도 이런 내 심리를 눈치챈 걸까? 그래서 자꾸 날 그렇게 경계하듯 보는 걸까?
흥, 좀 나눠 먹으면 어때서.
“자아, 수남아. 이리 와.”
‘그것’이 자신의 다리를 탁탁 치며 나를 불렀다. 이 몸을 젖도 못 뗀 새끼 취급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슬슬 털을 관리할 때가 돼서 잠자코 놈의 요구에 따랐다. ‘그것’에게 다가가 놈의 무릎에 턱을 얹었다. ‘그것’이 대견하다는 듯이 내 등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곰’은 언제나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목욕을 준비했다. 놈이 크고 두툼한 손으로 털 사이사이를 긁듯이 문질러 주면 몸이 금세 개운해졌다. ‘곰’이 이 몸에 멋대로 손을 대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순전히 그 때문이다.
‘곰’은 익숙하게 내 털을 주물럭거리며 풍성하게 거품을 냈다. 부들부들하고 몽실몽실한 감촉에 은은한 향까지 제법 상쾌했다. 눈을 감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것’의 손이 불쑥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내 목 안의 뼛조각을 제거해 주다가 다친 이후로 그렇게 늘 알아서 조심하게 됐다. 조금 성가시긴 하지만, ‘그것’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으니까 참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내 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닦아 나갔다. 악어 놈과 공생하는 악어새조차 그보다 깔끔하지는 못할 듯했다. 입 안이 어색할 만큼 개운해졌다.
그러는 동안 ‘곰’은 묵묵히 내 등과 네 다리, 그리고 꼬리까지 차분하게 쓸어내리며 마사지해 주었다. 내 혀가 닿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용케 알아내서 섬세하게 닦아 준다. 기분이 들떴다. 목욕 전에 배를 든든히 채운 덕일까? 살짝 나른해지면서 눈이 가물가물했다. 쩍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더니, ‘그것’이 멍한 얼굴로 나를 봤다.
“피곤해, 수남아?”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그것’은 내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 쉼 없이 종알거리길 좋아했다. ‘수컷’과 단출하게 둘이 지낼 땐 그저 고요하기만 했었는데. ‘그것’이 온 뒤로 많은 게 달라졌다. 내 영역 전체에 감도는 공기부터가.
때때로 나는 ‘그것’이 나무의 일종은 아닐까 의심한다. 맑은 산소를 아낌없이 뿜어내는 푸른 식물. ‘그것’의 걸음이 느린 건 그 때문일 수도 있다.
“다 됐다.”
‘그것’이 내 엉덩이를 재차 토닥거렸다. 글쎄, 강아지가 아니래도. ‘곰’은 아무 소리 없이 뒷정리만 할 따름이었다. ‘그것’이 문을 열자마자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것’이 얼른 큰 수건을 꺼내서 뒤따라왔다. 그러곤 뒤에서부터 내 몸을 수건으로 감싸 털에 남은 물기를 살살 문질러 제거했다.
하여간 느려 터졌다니까. 한 번이면 될 걸, 여러모로 성가시게 군다.
“앗, 수남아! 기다려!”
‘그것’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털에 붙어 있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묵직하게 까라지던 몸도 거짓말처럼 가뿐해졌다. 아, 이제야 좀 산뜻하네.
“아….”
서둘러 날 따라온 ‘그것’과 ‘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워할 만큼 직접 이 몸의 털을 골라 주고 싶었나? 이상한 놈들이다.
폭신한 자리로 가는 길에 ‘한 입 거리’가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전에는 날 마주치기만 해도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더니, 이제는 보란 듯이 내 영역을 활보하고 다닌다. 꿀꺽 집어삼켜도 간에 기별조차 안 갈 만큼 작은 주제에. 맹렬하게 달려오다가 날 발견한 놈이 급격히 제동을 걸었다. 소용없이 놈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 앞발에 툭 부딪혔다. 그제야 몸을 둥글게 말고 사린다.
어이없어서 놈을 앞발로 툭 쳤다.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던 놈이 재차 톡 쳐서 굴리자, 동그랗게 말고 있던 사지를 쫙 펼쳤다. 통통한 몸에서 긴 귀와 뒷다리가 볼록 솟아 나오더니 부리나케 도망을 친다. 한달음에 놈을 앞질러 가 길을 막았다. 그러곤 재차 앞발로 놈을 건드렸다. 어김없이 놈의 몸이 둥글게 말렸다. 이게 뭐라고 재밌지? 은근히 중독성이 있었다.
“수남이, 너? 토돌이 괴롭히지 말라니까?”
한창 잘 놀고 있는데, ‘성가신 놈’이 나타나 방해했다. 내게 듣기 싫은 소리를 쏟아 내며 ‘한 입 거리’를 제 품으로 데리고 가 버린다. 그렇게 미운 짓만 골라 하니 당최 곱게 봐 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성가신 놈’은 슬슬 돌아갈 작정인지, ‘한 입 거리’를 제 옷 속에 쏙 집어넣었다. 그러곤 한참 만에야 청소를 끝낸 ‘곰’을 향해 씩 웃는다.
‘곰’은 말없이 ‘수컷’을 바라봤다. ‘수컷’이 고개를 끄덕였을 땐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음에 보자, 수남아.”
‘성가신 놈’이 내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더니 드디어 내 영역을 벗어났다. 그를 따라서, ‘곰’도 문밖으로 사라졌다. 북적북적하고 소란스럽게 들떴던 공기가 이제야 좀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내 영역에는 ‘수컷’과 ‘그것’, 그리고 이 몸만 남았다. 평화로웠다.
평소처럼 폭신한 자리로 가서 나른한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배도 부르고, 몸도 개운한 김에 잠이나 잘까 싶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날 쫓아와서 슬쩍 내 옆에 걸터앉았다. 좀 좁은 감이 있지만, 구태여 놈을 밀어 내지는 않았다.
‘수컷’이 까만 종이를 ‘그것’에게 건넸다. ‘그것’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그 종이 뭉치를 들여다봤다. 저게 재밌나? 날이면 날마다 그러는데, 당최 무슨 행동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들었던 고개를 앞발에 툭 떨어뜨렸다. 너울너울 잠기운이 몰려왔다.
눈을 떴다. 코가 간질간질하더라니, ‘그것’의 머리통이 코앞에 드리워졌다. 뭘 하나 했는데, 여전히 바닥에 앉아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힐금 ‘그것’의 어깨를 넘겨다 봤지만, 역시 그게 뭔지 모르겠다.
주둥이로 ‘그것’의 뒤통수를 톡 건드려 봤다. 내가 잠꼬대라도 하는 줄 아는 건지 놈은 제 뒤통수만 살살 긁적이다가 말았다. 다시 툭 쳐도 마찬가지였다. 혀를 내밀어 놈의 머리카락을 핥자, 그제야 뭐라고 중얼거린다.
“기다려, 수남아.”
아무리 괴롭혀도 낑낑거리는 게 고작인 ‘그것’의 어깨에 머리를 괴었다. 그제야 ‘그것’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더니, 내 털을 슬슬 긁어 준다. 진작 그럴 것이지. 요즘 ‘그것’은 나를 애태우는 재미에 흠뻑 빠진 것 같다.
그즈음 갑자기 ‘수컷’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것’의 눈길이 ‘수컷’을 향했다. 나도 슬쩍 고개를 돌리고 놈을 바라봤다. ‘수컷’은 ‘그것’과 나를 말없이 주시하더니 어디론가 훌쩍 걸어가 버렸다. 질기게 ‘수컷’을 쫓던 것도 잠시, ‘그것’의 시선은 다시금 까만 종이 뭉치에 꽂혔다. ‘수컷’이 사라진 쪽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놈도 나처럼 단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수남아. 잠깐만.”
자꾸 딴짓만 하는 ‘그것’의 손에서 까만 종이 뭉치를 낚아챘다. 그러곤 그것의 몸 위로 훌쩍 뛰어올라 바닥에 착지했다. 그제야 ‘그것’이 절실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이게 뭐라고 돌려 달라는 것처럼 손을 내밀며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그것’의 손길을 피해 이쪽저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것’도 계속 나를 부르며 쫓아왔다. 뭐지, 이건? 은근히 재밌다.
다시 넓은 거실로 뛰어나갔다. 어김없이 ‘그것’ 나를 따라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근처에서 알짱거려도, 부러 코앞까지 다가가도 그랬다. 굳어 버린 건가? 한참 기다려도 보고, 앞발을 휙휙 휘저어도 봤지만, ‘그것’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불안해서 ‘그것’에게 다가가 ‘그것’의 다리를 툭 쳤다. 순간 ‘그것’이 제 팔을 확 뻗어서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잡았다.”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것’이 내가 물고 있던 물건을 빼 가는 게 한 박자 더 빨랐다. 그러고도 ‘그것’은 날 꽉 안고 놔주지 않았다. 장난을 치려는 건지, 이참에 서열 정리를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에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 단숨에 ‘그것’을 내 밑에 깔고 올라갔다. 놈의 어깨를 앞발로 꾹 짓누르자, ‘그것’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항복 선언인가.
자고로 상대를 굴복시킬 땐 목덜미를 물어야 한다. ‘그것’에게는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알아서 살랑거렸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놈의 흰 목덜미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침이 넘어갔다.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딱 한 입 정도는.
입을 쩍 벌려 ‘그것’의 목덜미를 물었다. 정확하게는 놈의 거죽을. 탄성 좋은 거죽이 뒤로 쭉 늘어지자 놈이 힐금 뒤를 봤다. 놈은 내가 제 거죽을 잘근잘근 씹어 대는 모습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이 몸이 장난이라도 치는 거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수남아, 하지 마. 옷 늘어나잖아.”
‘그것’에게서 참을 수 없이 맛있는 냄새가 났다. 군침이 도는 살냄새. 버둥거리는 놈의 등을 꾹 짓누르며 입에 문 거죽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갈증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덩달아 아랫도리가 간질간질했다. 왜인지 몸까지 후끈거렸다. 어디에든 비비적거리고 싶었다.
‘그것’의 목덜미를 핥으며 배를 살살 문질러 봤다. 짜증스러운 간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이게 아닌가?
“수남아, 왜 이래.”
‘그것’이 덜컥 내 얼굴을 붙들고 종알거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 놈의 손을 떨쳐 냈다. 그러곤 놈의 가슴을 재차 앞발로 압박했다. 이상하다. 내 밑에서 바르작거리는 ‘그것’을 보고 있자니 자꾸 흥분됐다. ‘그것’은 틀림없는 수컷인데.
나도 모르게 침을 뚝, 뚝 흘리다 ‘그것’에게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뜬금없이 뒤로 홱 끌려갔다. 목덜미를 잡혀 그대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스로 네 다리로 땅을 딛고 섰다. 눈앞에는 어느새 ‘수컷’이 서 있었다. 조금 전 내 목덜미를 잡은 것도 놈일 터였다.
‘수컷’은 아침에 그랬듯 나를 고요하게 응시했다. 또다시 놈에게서 경계심이 팽배해진다. ‘수컷’은 넘어져 있던 ‘그것’을 제 팔에 걸치듯 일으켜 세우더니, 너덜너덜해진 ‘그것’의 거죽을 마구 벗기기 시작했다.
“앗, 수혁 씨! 잠깐만요…!”
깜짝 놀란 ‘그것’이 사지를 버둥거렸다. 그러나 ‘수컷’은 가차 없었다. 금세 ‘그것’을 알몸으로 만든 놈은 제 손가락을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수컷’은 침을 잔뜩 묻힌 손가락을 ‘그것’의 가랑이 사이로 가지고 갔다. 시선만은 내게 똑똑히 고정한 채였다. 두 팔로 푹신한 소파를 짚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그것’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숨도 가빠졌다.
머지않아 ‘수컷’이 ‘그것’의 엉덩이를 붙잡고 제 아랫도리를 ‘그것’에게 완전히 밀착시켰다. 소파를 짚고 있던 ‘그것’의 팔이 크게 휘청거렸다. ‘수컷’이 달려들 때마다 ‘그것’의 몸은 맥없이 함께 들썩였다.
‘수컷’은 낮게 으르렁거리고 이를 갈면서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방해할까 봐 그러는 걸까. 겨우 버티던 ‘그것’의 몸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쉼 없이 입을 달싹거리면서 미약한 울음소리를 냈다.
“앗… 아아….”
‘그것’이 괴로워하고 있다. 하지만 ‘수컷’은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놈의 눈길도 내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왜 내게 보란 듯이 ‘그것’을 못살게 구는 걸까. 놈도 내가 ‘그것’에게 애착을 뒀다는 걸 아는 걸까? 그래서 ‘그것’을 괴롭혀서 날 응징하려는 건가? 내가 거슬리게 해서? 도무지 모르겠다. 돌연 ‘수컷’이 발정한 이유를.
“응, 앗… 아으읏!”
“…으윽!”
내내 울부짖던 ‘그것’이 자지러지더니, 잇따라 ‘수컷’도 쭈뼛 몸을 굳히며 포효했다. 거짓말처럼 ‘수컷’의 체취가 강렬해졌다. ‘수컷’이 또다시 ‘그것’에게 영역 표시를 한 건가? 저게 말로만 듣던 마운팅인가?
‘수컷’은 축 늘어진 ‘그것’을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그러곤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슬쩍 따라가려는데,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앞발로 툭 쳐 봤지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두 귀가 저절로 팔랑거렸다. 닫힌 문 안쪽에서 ‘그것’이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괜히 ‘그것’을 넘봤나 보다. 평소에는 내게 한없이 자애롭던 ‘수컷’이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행여 ‘수컷’이 홧김에 ‘그것’을 짜부라뜨리거나 콱 물어 죽일까 초조했다. 굳게 닫힌 문이 너무나 야속하다.
문 열리는 기척에 벌떡 고개를 들었다. 밖으로 나온 건 다름 아닌 ‘수컷’이었다. 놈의 온몸이 땀에 젖어 반질반질했다. 낯빛도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불안해졌다. 혹시 ‘그것’을 집어삼켜서 기력을 회복한 걸까? 얼른 ‘그것’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문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의 비릿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공간을 꽉 채운 ‘수컷’의 페로몬에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침대 위에 ‘그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죽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단박에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곤 미동 없는 ‘그것’을 가볍게 쳤다. 그것이 눈꺼풀을 가물가물 힘겹게 들어 올렸다. 사그라질 듯한 목소리로 수남아, 하던 ‘그것’이 도로 스르륵 눈을 감았다. 놈을 재차 툭 건드렸지만, ‘그것’은 쌕쌕거리며 잠들어 버렸을 따름이었다.
그것의 가슴에는 ‘수컷’의 잇자국이 가득했다. 그 얼룩덜룩한 가슴이 미세하게나마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숨은 잘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수컷’은 먹잇감의 모양은 유지하면서 배를 채우는 방법을 잘 아는 듯했다.
‘수컷’은 문가에 서서 나를 고요히 주시하고 있었다. 쳇, 안 먹는다고. ‘수컷’에게서 홱 고개를 돌리고 엎드렸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의 주둥이가 바싹 말라 있었다. 주둥이뿐 아니라 온몸의 수분을 쪽 빨리기라도 한 것처럼 피골상접한 모양새였다.
새삼 ‘그것’이 측은해졌다. 앞으로는 ‘그것’을 더 알뜰살뜰하게 보살펴 줘야겠다.
“아무리 너라도 용납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수컷’이 나를 향해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놈의 눈빛이나 반감 가득한 기류로 추측건대, 제 먹이에 침 바르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수컷’은 그렇게 단단히 선전포고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사이 나는 슬그머니 ‘그것’의 허리에 꼬리를 감았다.
금세 다시 돌아온 ‘수컷’의 손에는 수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수컷’은 가까이 다가와 걸터앉았다. ‘수컷’이 든 수건에 주둥이를 대 보니 축축하면서도 뜨끈뜨끈했다. ‘수컷’은 그것으로 ‘그것’의 몸을 샅샅이 닦기 시작했다. 정성이 부족하다. 제 혀로 구석구석 샅샅이 핥아 주질 않고.
나는 ‘수컷’이 ‘그것’의 팔, 다리를 닦을 동안 ‘그것’의 얼굴을 사근사근 핥아 줬다. 그랬더니 ‘수컷’의 시선이 곧장 내게 꽂혀 왔다. 또 제멋대로 내가 ‘그것’을 맛본다고 착각한 듯했다. 별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앞발에 툭 떨어뜨렸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수컷’은 좀 치사해졌다.
“…하아, 젠장.”
‘그것’의 다리 사이를 가만가만 닦아 내던 ‘수컷’이 갑자기 이를 갈았다. 뭔가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건지 미간도 왈칵 구겼다. 아니, 화가 난 게 아니라 흥분한 건가?
의아한 눈빛으로 ‘수컷’을 보는데, 놈이 난데없이 내게 손을 뻗어 왔다. 그러곤 다짜고짜 나를 침대 아래로 끌어 내렸다.
‘수컷’은 그 길로 나를 다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대뜸 내 몫의 고깃덩어리를 찾아와 내게 홱 던져 주었다. ‘수컷’의 낌새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순순히 고깃덩어리를 뜯어 먹었다.
‘수컷’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러더니 불시에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문을 닫았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먹이를 다 먹어 치운 후였다. 시원하게 트림까지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다.
귀를 세워 안쪽의 소리에 집중했다. 이런. 또 ‘그것’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수컷’은 아직도 배가 고픈가 보다.
그날 밤 내내 다시 문이 열리지 않아서 폭신한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그것’이 내 영역으로 들어온 이후, 그렇게 홀로 지새우는 날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나야 늠름한 성체라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부들부들한 이불이 더 좋은데.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문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이어 누군가가 저벅저벅 내가 있는 곳으로 접근해 왔다. 경계하지 않았던 건 그 발걸음 소리나 체취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슬쩍 고개만 들고 내다봤더니, 예상대로 ‘곰’이 걸어왔다. 놈은 혼자 누운 나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이나 ‘성가신 놈’처럼 살갑게 인사를 건네거나 쓰다듬으려 들지도 않았다. 나도 그런 놈을 멀뚱히 마주해 주었다.
머지않아 ‘곰’이 놈만의 사냥터로 들어가 끼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매일, 매일 해가 뜰 즈음이면 반복되는 일과였다.
잠시 더 늘어져 있으려니 드디어 닫혔던 문이 열렸다. 혹시나 하며 고개를 벌떡 들었지만, 밖으로 나오는 건 ‘그것’이 아닌 ‘수컷’이었다. 놈은 마치 허기를 채운 흡족한 짐승처럼 여유롭고 평온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컷’은 한동안 고요히 날 응시했다. ‘그것’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놈이 문을 닫는 바람에 안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 먹이를 먹을 때가 되자, 어김없이 ‘성가신 놈’이 찾아왔다. 놈은 집을 죽 둘러보더니 ‘수컷’에게 뭐라고 떠들어 댔다. ‘수컷’은 못 들은 것처럼 제 몫의 먹이만 먹었다. ‘성가신 놈’은 거푸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자리에 앉았다.
금세 배를 채운 놈은 대뜸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볼일인가 했더니, 내가 이갈이에 썼던 물건을 들이대며 으르렁거린다.
“수남이 너? 아무거나 물어뜯지 말랬잖아. 책이 이게 뭐야. 이걸 어떻게 보냐고.”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그래서 그냥 놈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바로 흘려버렸다.
두 번째 먹이를 먹을 때가 돼서야 닫혔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온 건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다행히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곰’에게 뭐라고 한마디 전하더니, 내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수컷’의 시선이 또다시 집요하게 ‘그것’을 쫓기 시작했다. 대체 놈의 배 속에는 뭐가 든 건지, 매번 ‘그것’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내게 다가오던 ‘그것’은 중간에 힘이 풀렸는지, 무릎을 꺾고 풀썩 주저앉았다. 얼른 소파 아래로 내려가 맥이 풀린 ‘그것’에게 내 등을 빌려줬다. ‘그것’이 살며시 웃더니 제 몸을 내게 완전히 기댔다. 착각인지, 어제보다 놈이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제 좀 살이 오르나 싶었는데, 그새 또 말라 갔다. ‘수컷’에게 샅샅이 발라 먹힌 탓일까? 내게 제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그것’의 낯빛이 딱할 정도로 파리했다.
더불어 ‘그것’에게선 어제보다 더 짙어진 ‘수컷’의 체취가 풍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놈은 범을 피하려다가 그보다 더한 ‘수컷’의 소굴로 잘못 굴러들어 온 듯하다.
불쌍한 놈. 밥은 먹고 다니냐?
<‘잇 미 올(Eat Me All)’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