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면대 가득 찬물이 쏟아졌다. 멍하니 섰던 주완은 그 물에 두 손이 새빨개져서야 세수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질기게 들러붙었던 잠기운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얼굴에 비누 거품이 남지 않을 정도로 뽀득뽀득 씻고 후, 긴 날숨을 뱉었다.
혼절한 것처럼 푹 잤는데도 피곤했다. 수건에 얼굴을 닦는 미미한 움직임에도 밤새 뭉친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욕실 문을 열고 나오며 수건에 묻었던 얼굴을 막 들던 찰나였다. 새카맣고 거대한 형상이 불쑥 시야를 꽉 채우며 달려들었다.
“…앗.”
욕실 문 앞에 뭔가가 버티고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하마터면 뒤로 벌러덩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누군가가 주완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준 덕에 아침부터 엉덩방아 찧는 걸 면할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곧 시야에 저보다 더 당황한 사내의 모습이 가득 들어찼다. 그를 비롯한 다른 사내들도 잇따라 보였다. 그들은 모두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꾸벅했다.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 불찰입니다.”
사내와 그 곁의 다른 사내가 조심스럽게 주완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극진히 사과했다. 주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사내를 낯설게 바라보다가, 빼곡한 시선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지는 긴 통로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권수혁의 수하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의 일괄적인 외양과 하나같이 굳은 얼굴 때문에 공기가 사뭇 무거워진 듯했다.
권수혁의 수하임이 분명한 사내들도 약속한 것처럼 일제히 눈동자를 굴려 주완을 샅샅이 살폈다. 무시하려고 해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듯 눈길들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주완과 눈이 마주치면 아닌 척 정면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한동안 주완과 사내들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주완이 팽팽한 적막을 깨며 거실로 향할 즈음이었다. 그를 힐금거리던 사내들이 돌연 몸을 바로 하더니,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온 집 안에 그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안녕하십니까!”
그들 사이를 지나가던 주완은 움찔하며 멈춰 섰다. 그의 막막한 시선이 다시 올라올 줄 모르는 사내들의 뒤통수에 내려앉았다.
권수혁의 수하들을 만나는 건 권수혁이 크게 다쳤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들은 지금처럼 주완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지는 않았다. 그저 주완을 알게 모르게 힐긋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도 당황스럽고,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난감했다. 저가 뭐라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주완은 양옆으로 늘어선 사내들을 번갈아 보면서 연신 꾸벅꾸벅했다. 그러자 사내들이 더 고개를 조아렸다.
웃지 못할 촌극 속에 커다란 화환이 주완을 맞이했다. 주완은 색색의 꽃이 꽂힌 거대한 화환을 멍하니 바라봤다. 거기에 달린 리본에는 ‘축 쾌차’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제야 사내들이 아침부터 단체로 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들 나름대로 권수혁의 병문안을 온 모양이었다.
화환 바로 옆에 서 있던 사내가 흠흠 헛기침해서 주완의 시선을 끌었다. 주완의 눈길이 그에게 닿자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묵례했다. 그러곤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한약을 주완에게 건넸다. 얼결에 받아 들자 두 팔이 다 축 늘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밤새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네? 네, 편하게….”
“앞으로 필요한 게 생기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아… 고맙습니다?”
사내가 불쑥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주완은 영문도 모른 채 그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곳에는 ‘백무 상사 회계 팀’이라는 그의 소속이 적혀 있었다.
그즈음 주방에서 전미남이 나오지 않았다면 주완과 사내들 간에 또다시 기묘한 적막이 흘렀을 터였다. 사내들은 전미남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전미남은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응하지 않고 다만 주완에게 전했다.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네.”
주완은 재차 사내들에게 꾸벅하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어김없이 그의 등 뒤로 관심 어린 시선들이 꽂혔다.
머지않아 권수혁이 침실에서 나왔다. 통로에 서 있던 그의 수하들이 또다시 약속한 것처럼 우렁차게 인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대표님.”
그러나 그들을 보는 권수혁의 표정은 탐탁지 않았다. 마치 달콤한 휴식을 방해받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침부터 웬일들이야?”
“대표님께서 쾌차하셨다고 해서 병문안 겸 업무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전의 그 회계팀 소속의 사내가 대표로 대답했다. 전미남이 그 곁에서 변명 아닌 변명을 덧붙였다.
“대표님께 먼저 여쭤보겠다고 했는데, 다들 이렇게… 그동안 걱정을 많이 했나 봅니다.”
대화가 오가는 사이, 재규어도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러다 주방 근처에서 주완을 발견하곤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재규어가 제 주위를 느긋하게 돌자 주완이 옅게 웃으며 놈을 지켜봤다. 그러다 놈이 앞발을 나란히 모으고 앉자, 놈과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서 놈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재규어는 기분 좋은 듯 실눈을 뜨고 꼬리마저 느릿하게 흔들었다.
뜻밖의 광경에 권수혁의 수하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주인에 그 짐승이라고 저희끼리 공공연히 떠들었던 재규어가, 그 흉포한 짐승이 주완 앞에선 한낱 고양이처럼 행동하니 무리도 아니었다.
“먼저 먹어.”
권수혁은 다정한 어조로 주완에게 당부하고 거실로 향했다. 전미남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도 주완과 재규어를 넋 놓고 보던 사내 중 일부가 뒤늦게 두 사람을 쫓아갔다. 그러곤 가져온 서류를 건네며 업무 브리핑을 시작했다.
별수 없이 주완 홀로 식탁에 앉았다. 미역국과 돼지고기볶음에서 하얀 김이 폴폴 피어나고 있었다. 없던 식욕도 자극할 만큼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났다.
주완은 얼른 숟가락을 들고 국물부터 맛봤다. 짙은 풍미가 입 안 가득 맴돌면서 훈훈한 기운도 퍼져 나갔다. 입 속에 침이 고이면서 구미가 당겼다.
따끈따끈한 밥도 한 숟가락 떠 올리다가 멈칫했다. 옆에서 재규어의 빤한 주시가 느껴진 탓이었다. 먹이를 받지 못한 재규어는 샛노란 눈동자로 주완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거라도 먹어 볼래?”
주완은 돼지고기를 한 점 집어 재규어의 주둥이 근처에 내밀어 주었다. 강렬한 양념 냄새에 재규어가 슬쩍 고개를 뺐다. 그러다 곧 호기심이 생겼는지 슬그머니 혀를 내서 고기 겉면을 핥았다. 쩝쩝 입맛을 다시던 놈은 다시금 주둥이를 쭉 뻗어 고기를 낚아챘다.
단숨에 집어삼킨 고기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만큼 적은 양이어서인지, 아니면 역시 익힌 고기보다 생고기가 입맛에 잘 맞아서인지 재규어는 연신 입맛만 다시며 거실에 있는 전미남을 아쉬운 눈초리로 돌아봤다.
“잠깐만.”
결국, 주완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냉장고 앞으로 갔다. 그러곤 안에서 적당한 생고기 한 덩어리를 꺼내 재규어에게 주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재규어가 고기를 앞발로 턱 짚고 신경이 쓰이는 듯 주완을 올려다봤다.
“알았어. 천천히 맛있게 먹어.”
주완은 재규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고 놈이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거실로 나왔을 때, 권수혁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도록 한쪽에 물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도통 알아듣기 어려운 얘기였고, 권수혁의 일 자체에는 큰 관심도 없지만, 일하는 그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좋았다.
업무를 보는 권수혁은 주완 자신과 단둘이 지낼 때와는 사뭇 태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준비된 서류를 확인하는 눈빛은 예리하고, 보고하는 수하를 주시하는 눈빛은 고요하면서도 냉철했다.
“그럼 이 건은 설명한 대로 진행해.”
“물건은,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지. 문제 생기면 즉시 보고하고….”
지시를 내리던 권수혁이 불현듯 말을 멈추고 주완 쪽을 돌아봤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라고 손짓했지만, 굳이 일어나 주완에게 다가온다.
“왜, 먼저 먹으라니까.”
“수남이 먹이부터 챙겨 주느라. 조금 이따가 같이 먹어요. 가서 일 보세요.”
“다 끝났어.”
권수혁은 주완의 손목을 그러쥐며 수하들을 돌아봤다. 작지만 명백한 동작으로 현관문 쪽을 고갯짓하기도 했다. 수하들이 눈치껏 몸을 일으켰다.
“추가로 시키실 건….”
“없어.”
“그럼 뭐 필요하신 거라도….”
“없으니까 그만 가 봐.”
그거 가지고, 한다. 그즈음 권수혁의 시선은 휘황찬란한 화환에 닿아 있었다. 기민한 눈빛을 주고받던 사내 몇몇이 힘겹게 옮겼을 화환을 도로 가지고 나갔다.
권수혁은 주변 이목에 아랑곳없이 주완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뒤에서 그의 수하들이 어김없이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럼 대표님, 편히 쉬십시오.”
“편히 쉬십시오.”
닫힌 문 너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그 문에 바짝 밀어붙여진 주완은 태평하게도 때늦은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요?”
“덕분에.”
권수혁이 그런 주완의 손을 잡아 제 입술을 묻었다. 주완은 설핏 웃으면서 그 손을 맞잡고 가만가만 흔들었다.
“빨리 씻고 식사해야죠. 이러다 다 식겠어요.”
“지금은 이쪽이 더 당기는데.”
권수혁은 주완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슬며시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완이 스스럼없이 두 눈을 감고 고개까지 들었다. 권수혁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권수혁은 주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은 채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서서히 내리눌렀다. 권수혁이 입 벌릴 틈도 주지 않고 제 입술을 꾹 짜부라뜨리자 주완이 의아한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권수혁이 피식 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비틀어 주완의 입술에 제 입술을 완전히 맞물렸다. 그제야 자유를 되찾은 주완이 입술이 느릿하게 빠끔거리며 권수혁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그런 주완의 윗입술과 인중을 감미롭게 당겼다가 놓고, 다시금 빨아 당기던 권수혁이 이내 뜨겁게 주완의 입을 가르고 들어갔다.
권수혁의 혀가 뭉텅 밀려들어 오자 주완이 두 눈을 폭 감고서 온전히 그에게 저를 맡겼다. 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용맹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순애에 하루하루 피가 끓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단숨에 삼켜 버리고 싶었다.
아쉽게나마 입술을 떼어 낸 권수혁은 주완의 입가에도 연이어 입술을 눌렀다. 그러곤 다시 그의 손목을 잡아 그를 욕조로 이끌었다.
권수혁의 상처는 이제 완전히 아물었다. 하지만 권수혁은 그와 무관하게 종종 주완을 욕실로 데려가곤 했다. 주완에게 기대어 그의 손길을 받으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게 못내 좋았던 모양이었다.
주완으로서도 그런 요구가 권수혁의 응석 아닌 응석이라 그저 반가웠다. 이번에도 주완은 알아서 바지를 벗고 욕조에 걸터앉았다. 권수혁도 상의를 홱 벗어 던지고 익숙하게 주완의 다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샤워기의 물을 틀어 제 손에 먼저 떨어뜨리며 적당한 수온을 맞췄다. 이어서 권수혁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찬찬히 적셔 나갔다. 두 눈을 감은 권수혁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입가도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덩달아 주완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샴푸를 적당량 손에 덜었다. 제 손에 일차적으로 거품을 내고, 그것을 권수혁의 머리카락에 살살 문질렀다. 어느 정도 거품이 일어난 후에는 손끝에 힘을 줘서 두피 곳곳을 지압해 주었다. 권수혁에게서 절로 깊은 날숨이 새어 나왔다. 찰나나마 핏대가 섰던 이마도 곧 다시 누그러지고, 짙은 눈썹도 평소보다 편안하게 늘어졌다. 얼굴에는 전에 없던 혈색이 돌았다.
주완은 정성 들여 권수혁의 머리와 귓가를 마사지해 주면서 그동안 혼자 품었던 생각을 넌지시 꺼냈다.
“의논할 게 있는데요.”
“뭔데?”
“이제 슬슬 나도 할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할 일이라니?”
“병원에 있을 땐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곳을 탈출한 뒤에는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제는 생각해 봤고?”
“아뇨, 그건 아직.”
권수혁에게 보일 리 없는데도 주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샤워기의 물을 틀어 거품을 살살 씻어 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품이 가시자 권수혁이 눈을 떠서 주완을 올려다봤다. 좀 더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는 것 같았다.
주완은 권수혁의 귓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살살 머리카락을 쓸었다. 이어서 귓불을 부드럽게 문질러 가며 마사지해 주기도 했다.
“지금은 그냥 막연하게 일단 하던 공부나 마쳐 볼까 해요.”
“입시 공부를?”
“음, 입시라기보다는… 그냥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까 졸업이라는 결과를 내야 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무슨 일이든, 어떤 식으로든 종지부를 찍어야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잖아요. 인제 와서 새삼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싶다거나 대학에 가고 싶은 건 아니고요. 이왕 세상으로 다시 나왔으니까, 기껏 손에 넣은 자유를 헛되이 쓰고 싶진 않아서요.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수혁 씨한테 보여 주고 싶어요.”
주완의 표정은 자못 비장해 보였다. 멍하니 보던 권수혁의 입가에 픽 웃음이 번졌다. 근사한 미소였다.
“장하네.”
낮게 속삭인 권수혁이 긴 팔을 뻗어 주완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러곤 그대로 주완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서로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포근하게 맞물렸다가 금세 떨어졌다. 가까운 곳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서로를 어루만지는 눈빛이 더없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기대하지.”
그렇게 다독여 줄 때마다 귓속의 솜털이 살랑거리는 느낌이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재차 자신을 당기는 권수혁에게 기꺼이 쏟아져 내렸다. 서로의 입술을 애틋하게 빨다가 고개를 비틀어 키스하려던 찰나, 손의 구속에서 벗어난 샤워기가 사방으로 물살을 뿜어냈다. 피할 틈도 없이 흠뻑 젖고 말았다.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돼 버린 서로의 모습에 마냥 웃음이 터졌다.
그날 오후에는 권수혁의 수하 몇몇이 다시 찾아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상자들을 손에 든 채였다. 그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창고로 사용하던 작은 방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끄집어내고, 먼지 한 톨 없이 청소를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상자 안 부품을 꺼내 뭔가를 조립했다. 금세 책상 하나가 완성됐다.
소파에서 잠든 재규어의 꼬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완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곧장 권수혁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왜?”
“뭐라도 좀 도와줄 게 없나 해서요․”
권수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었다.
“네 손까지 빌려야 할 만큼 일손이 빠듯해 보여?”
“그건 아니지만…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잖아요.”
“넌 나나 도와.”
권수혁이 대뜸 주완을 제게 당겼다. 주완이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가 권수혁의 허벅지에 내려앉았다. 권수혁은 내내 보고 있던 노트북을 그의 무릎 위로 끌어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권수혁에게 안긴 꼴이 됐다.
전부터 계속 뭔가를 검색한다 싶더니, 모니터에는 웬 수강 패키지가 안내되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네가 단순히 졸업장을 따고 싶은 건지, 제대로 공부해 두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동영상 강의가 필수라니까, 어떤 게 좋겠는지 한번 봐.”
“아….”
주완은 어색한 손길로 노트북을 조작해 봤다. 너무 오랜만에 만져 보는지라 마우스 포인터를 옮기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권수혁이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천천히,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책장과 의자, 컴퓨터가 계속해서 옮겨졌다. 권수혁의 수하들은 환기까지 마친 방 안에 조립한 가구들을 하나하나 배치했다. 미리 준비해 온 각종 필기구와 노트, 참고서, 문제집 따위도 차곡차곡 책장에 넣었다. 베스트셀러를 쓸어 온 듯한 책들도 한쪽에 죽 꽂혔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현관에서 백도운의 목소리가 불거진 건 공부방 꾸미기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주완이 얼른 일어나 통로 쪽으로 나가봤다. 백도운이 손으로 공기 중의 먼지를 흩으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로 그를 데리러 갔던 전미남도 따라 들어왔다.
“선생님 오셨어요?”
“주완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밖에 나와 있는 쓰레기들은 다 뭐고.”
“그게….”
주완이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공부방 정리를 마친 권수혁의 수하들이 우르르 나와 인사했다.
“대표님, 지시하신 일 다 마쳤습니다.”
“그래. 그만 가 봐.”
“네. 필요하시면 또 불러 주십시오.”
사내들은 권수혁에게 일제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주완과 백도운의 곁을 지날 때도 깍듯이 묵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백도운은 요란하네, 하며 소파로 와서 털썩 앉았다. 그에 놀란 재규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새 전미남은 주방으로 가서 마실 걸 준비하고, 주완은 완성된 공부방을 살펴보러 갔다. 제 방인 걸 알면서도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서성인다. 그런 주완을 빤히 보던 백도운이 권수혁에게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불렀어? 어디 아픈 것 같지도 않은데.”
“조건을 말해.”
“조건? 뜬금없이 무슨 조건?”
“백도운, 네가 과외를 좀 해 줘야겠어.”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잠 덜 깼냐? 아니면 나 모르게 머리라도 다친 거야?”
“보다시피 멀쩡해.”
“멀쩡한 놈이 대뜸 나한테 과외를 해 달라고 한다고?”
“나 말고. 박주완을 가르치라고.”
“주완 씨를?”
그즈음 주완이 소파 자리로 돌아왔다. 전미남도 준비해 온 음료를 소파 테이블 위에 하나씩 내려놓았다.
자세한 설명을 권수혁에게 요구하느니 주완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주완 씨, 갑자기 왜요? 검정고시라도 보려고요? 아니면 대학이라도 가게요?”
“정확히 뭘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오래전에 멈췄던 시간을 보내고 싶어져서요. 고등학교 때 갑자기 입원하게 됐던 거니까, 일단 그거라도 마치려고요.”
“잘 생각했어요. 슬슬 주완 씨도 주완 씨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우리랑은 상관없이요. 아직 뭘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도 아니잖아요. 그러려면 주완 씨 의지가 가장 중요할 텐데, 언제쯤 마음을 먹으려나 내심 기다렸어요. 주완 씨한테 내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써먹어요. 나도 입시 공부한 지가 오래돼서 얼마나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권수혁은 백도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를 재촉했다.
“그럼 이제 조건을 말해.”
“조건이라면 딱 하나 있지.”
“뭔데?”
“일주일에 한 번으로 하자고.”
“학습 주기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아니. 네 발정 횟수.”
백도운의 대답에 전미남이 격하게 콜록거렸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지만, 한번 터진 기침은 멎지 않았다. 금세 전미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제대로 사레들린 듯했다.
“미남 씨, 괜찮아요?”
“아, 죄송합니… 콜록.”
주완이 얼른 티슈를 뽑아서 전미남에게 건넸다. 그의 얼굴에는 염려하는 표정이 걸렸을 뿐,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째 권수혁과 백도운의 적나라한 대화에 놀란 건 전미남뿐인 것 같았다. 전미남은 정체 모를,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시도 때도 없이 치근거리면 공부에 방해된다고. 게다가 어디 권수혁, 너뿐이야? 수남이까지 있는데.”
백도운은 팔짱까지 끼면서 권수혁의 수락을 종용했다. 그 순간만큼은 장난치려는 의도 없이 진지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권수혁과 재규어의 방해 속에 무사히 졸업장을 따내는 건 가당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권수혁은 오랜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잖아.”
“짐승도 아니고, 단칼에 불가능할 건 뭐야? 사람이면 참아 보기라도 해라, 좀.”
백도운이 어이없다는 듯 따지고 들었다. 권수혁도 순순히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때아닌 기 싸움 중에 주완이 슬쩍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제가 어느 쪽이든 열심히 해 볼게요.”
묘한 포부에 백도운도, 권수혁도, 전미남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다 전미남이 먼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왜인지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이어 백도운이 “아, 주완 씨.” 하고 탄식하면서 못 말린다는 듯 실실거렸다. 권수혁조차 작게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주완과 재규어만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을 따름이었다.
***
노트에 글씨를 써 내려갈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주완은 온 신경을 펜 끝에 집중한 채 오늘 공부한 개념들을 죽 정리해 나갔다. 한 페이지를 다 채웠을 즈음에는 못내 뿌듯한지 노트를 손에 들고 한참 들여다봤다.
권수혁은 그 옆쪽 소파에 앉아 그런 주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내내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주완이라고 공부하는 모습이 유별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냥 그렇게 지켜보는 게 지겹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재규어는 달랐다. 주완의 뒤에서 그를 내내 구경하던 놈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놈의 긴 수염이 주완의 귓바퀴에 닿았다. 주완은 손을 들어 간질간질한 귀를 만지작거리면서도 누 눈만은 여전히 노트에 고정해 뒀다. 전과 다른 반응에 재규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부터 아침마다 백도운이 나타난다. 그는 주완을 공부방으로 데리고 가며 재규어를 비롯한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안에서 문을 잠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격리돼서 기다려도 수확은 없었다. 백도운이 돌아간 후에도 주완은 지금처럼 그가 내준 숙제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권수혁만 아니면 온전히 제 차지가 됐던 주완이 반나절 이상 저를 본체만체하니, 재규어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에도 주완에게서 별반 반응이 없자, 재규어가 기어이 제 주둥이로 그의 뒤통수를 툭 건드렸다.
“하지 마, 수남아.”
그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재규어가 거푸 주완의 뒤통수를 쳤다. 그러다 금세 제풀에 지쳐 주완의 어깨에 고개를 툭 떨어뜨린다. 그제야 주완이 고개를 돌려 재규어를 바라봤다. 재규어는 그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움직여 주완을 응시했다. 꼭 커다란 강아지가 응석을 부리는 듯했다. 주완은 귀여워, 하며 재규어의 콧잔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금세 풀어져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두툼한 꼬리도 유연하게 흔들렸다.
“조금만 기다려. 거의 끝나 가니까, 얼른 하고 놀아 줄게.”
주완이 재규어를 달래 놓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말없이 그 모습을 관망하던 권수혁이 돌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완의 시선이 으레 그를 향했다. 재규어도 덩달아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요?”
“슬슬 씻으려고.”
“도와줘요?”
주완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였다. 권수혁이 픽 웃으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마저 해.”
뒤이어 일단, 이라는 조건을 덧붙인다. 다소 묘한 뉘앙스였지만, 권수혁은 별다른 부연 없이 욕실로 걸어갔다. 이윽고 욕실 문이 닫히는 기척과 샤워기의 물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주완은 다시 수학 문제에 집중했다. 백도운은 문제를 풀되, 그 과정을 노트에 빠짐없어 적어 두기를 요구했다. 숙제 검사를 할 때도 단순히 채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완에게 직접 그 풀이 과정까지 일일이 설명해 보게 했다. 그래야 제대로 개념을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거였다. 확실히 그렇게 하니까 헤매지도 않게 되고, 한번 인지한 내용은 술술 풀게 됐다. 그러다 보니 금세 공부에 재미가 붙었다.
현재는 고등학교 과정이 아니라 중학교 과정부터 다시 배우는 중이었다. 주요 교과인 수학과 영어의 기초 개념은 보통 중등 과정에서 익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허비했던 지난 10년은 그 모든 걸 잊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조급한 마음을 먹지는 않았다. 그냥 주완 자신은 제 속도대로 천천히 배우고, 하나하나 이뤄 가면 된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물론 백도운이라는 열혈 스승을 둔 덕에 온전히 제 페이스대로 할 순 없지만.
언제까지 백도운의 시간을 뺏을 수도 없으니 그저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배울 때 최대한 집중해서 확실히 익힐 수밖에.
하지만 재규어로 인해 그런 다짐이 무색해졌다. 주완은 또다시 제 뒤통수에 주둥이를 가져다 대는 놈을 돌아봤다. 놈은 샛노란 눈동자 가득 주완을 담아내다가 불현듯 고개를 들이밀어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심심한 모양이었다. 그렇더라도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안. 진짜 조금만 더 하면 되거든?”
재차 양해를 구하며 재규어의 볼을 주물럭거렸다. 곧 주완이 다시 등을 돌리고 앉자, 재규어가 눈매를 꿈틀거렸다. 이내 몸을 일으켜 세운 놈은 주완의 문제집을 덥석 낚아채 물고 소파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워낙 민첩해서 막아 볼 새도 없었다. 주완이 돌려 달라는 듯 손을 뻗자, 재규어는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약 올리듯 뒷걸음질 치는 재규어를 따라갔다.
“수남아, 장난치지 말고 그거 이리 줘.”
어린아이한테 하듯 얼러 보기도 했다. 소용없게도 재규어는 주방으로, 다시 거실로, 문 열린 공부방으로, 침실로 날쌔게 뛰어다니며 주완의 포위망을 피해 갔다. 퇴로를 차단하고 막아서면 주완을 넘어뜨리고 훌쩍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거기 서!”
집 안에서 난데없는 술래잡기가 시작됐다. 가벼운 장난이라도 상대가 재규어다 보니 금방 숨이 가빠 왔다.
한참 만에야 침대로 재규어를 모는 데 성공했다. 주완은 양팔을 넓게 벌린 채 조금씩 재규어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코너에 몰린 놈은 고개를 양쪽으로 마구 흔들어 댔다. 놈의 침에 젖었던 문제집이 삽시에 너덜너덜해졌다.
“안 돼. 하지 마, 수남아.”
다급해진 주완이 온몸으로 재규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재규어를 덮치기도 전에 놈이 먼저 침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주완을 훌쩍 뛰어넘은 놈은 바닥에 가뿐하게 착지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주완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도로 거실로 뛰어나가 버렸다.
주완은 나직이 한숨을 뱉고 얼른 놈을 따라갔다. 기껏 푼 문제집이 넝마가 되기 전에 사수해야 했다.
재규어는 어느새 소파 위에 거만하게 올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주둥이에는 문제집을 문 채였다. 주완은 놈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멀찌감치 멈춰 섰다. 그러자 놈이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척 다만 놈을 지켜봤다. 주완이 전혀 움직이지 않자, 재규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놈은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터벅터벅 주완에게 다가왔다. 몸을 납작하게 낮춘 건 언제라도 도망치기 위해서인 듯했다. 주완에게서 여전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주둥이를 들어 주완의 손을 툭 건드린다. 순간 주완이 두 팔을 뻗어 재규어의 목을 꼭 끌어안으면서 놈의 등 위로 올라타다시피 했다.
“잡았다!”
끝날 듯 끝나지 않던 술래잡기에 마침내 종지부가 찍혔다. 재규어는 주완이 문제집을 빼앗으려 들자 고개를 저으면서 반항했다. 끝내 문제집을 뺏겼을 땐 제 사지를 버둥거려 탈출을 꾀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며 주완이 놈 밑에 깔렸다. 재규어는 사냥 본능을 십분 드러내며 주완의 목덜미 대신 그의 상의 후드를 물고 거칠게 흔들어 댔다.
재규어의 거칠고 집요한 장난에 도무지 맥을 출 수가 없었다. 덩치로 보나, 체중으로 보나, 완력으로 보나 놈은 모든 면에서 주완을 압도했다. 놈에게 속수무책으로 휘둘리다 보니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한동안 재규어의 앞발에 눌려 바르작거리던 주완이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수남아, 그만해. 옷 늘어나잖아.”
그러나 재밌는 놀이에 심취한 재규어는 연신 주완의 모자를 찢을 기세로 물어뜯었다. 놈과 두 번만 더 본격적으로 장난을 쳤다간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압사나 질식사가 영 남의 얘기는 아니었다.
“그만! 수남아, 하지 마.”
아무리 만류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덩치만 컸지, 아직도 철없는 애나 다름없어서 신나는 놀이를 끝낼 줄 모른다.
재규어에 의해 주완의 후드가 상의에서 거의 뜯겨 나갔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온몸을 짓누르던 재규어의 체중이 확 가셨다.
주완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손으로 감쌌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곧 그의 시야에 재규어를 저만치 떨쳐 낸 권수혁의 모습이 가득 찼다.
“뭐 하는 거야?”
권수혁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이었다. 주완은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가쁜 숨만 몰아쉴 따름이었다. 힘이 다 빠져서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권수혁의 시선은 곧 잔뜩 흥분한 재규어에게 날아갔다. 고요히 노려보는 눈빛에 허공에 앞발을 휘저으며 재차 주완에게 달려들려던 놈이 주춤했다. 권수혁은 그러고도 한참 놈과 눈싸움을 벌였다. 기에 눌린 놈이 귀를 누그러뜨리며 얌전히 앞발을 바닥에 내렸다. 스리슬쩍 뒤쪽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너도 좀 적당히 받아 줘.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주완에게도 한마디 하던 권수혁이 차마 뒷말을 다 뱉지 못했다. 완전히 흐트러진 주완이 쌕쌕거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규어에 의해 엉망으로 늘어지고 찢긴 상의 틈새로 흰 목과 어깨, 복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고, 눈가와 뺨, 귓가에는 은근한 홍조가 감돌았다. 숨쉬기가 버거워선지 두 눈동자도 흐려진 상태였다. 권수혁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느릿하게 너울거렸다.
주완에게 성큼 다가간 권수혁은 주완의 팔을 붙잡아 그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주완을 근처 소파에 떠밀듯 놓아 주면서 그의 복부를 떠받치더니, 바지와 드로즈를 동시에 죽 끌어 내렸다. 권수혁이 갑작스럽게 발정하는 일은 비단 오늘만이 아니었지만, 주완은 드물게 당황하며 사지를 버둥거렸다.
“아, 잠깐만요…!”
새삼 재규어의 시선이 신경 쓰인 건 아니었다. 섹스에 응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 역시. 그저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문제집이 눈에 밟혔을 뿐이었다. 백도운에게 꼭 숙제를 다 해 놓겠다고 약속했는데.
권수혁은 주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손가락에 타액을 잔뜩 묻히더니, 그 손가락을 주완의 엉덩이 골로 가지고 갔다. 젖은 손가락이 구멍 주위에 와 닿자, 주완이 온몸을 바짝 굳히며 바르작거렸다. 그런 주완의 등 뒤에 제 가슴을 바짝 붙이고 그의 흰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면서 구멍의 주름을 어루만졌다. 최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섹스한 탓에 금방 주름이 반지르르 젖어 들면서 부드럽게 풀렸다. 연신 애타게 구멍만 만지작거리다가 손가락에 힘을 줘 그 안으로 꾹 밀어 넣었다.
“…읏, 아, 수혁 씨.”
주완이 진득이 고개를 저으면서 신음했다. 선명한 이질감에 상체를 지탱한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을 달래듯 그의 귓바퀴를 연신 머금었다가 놓으면서 완전히 삽입된 손가락을 한 바퀴 천천히 돌렸다. 쭈뼛 굳었던 주완의 몸이 재차 바르르 경련했다. 손가락에 차지게 감겨 오는 내벽의 감촉이 차지고 부드러웠다. 그곳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마구 들쑤시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힘겹게 숨을 억누르며 구멍에 박힌 손가락을 서서히 앞뒤로 움직여 구멍을 풀었다. 이따금 내벽 곳곳을 꾹꾹 짓눌러 다지기도 했다. 주완에게서 기어이 끙끙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에게 키스를 퍼붓던 권수혁은 제 새빨간 육욕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목덜미와 귀를 거푸 잘근거렸다.
“아으, 읏… 응….”
재규어는 앞발을 모으고 앉아 두 사람이 맞붙어 있는 광경을 구경했다. 중간중간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아으읏.”
권수혁은 손가락 두 개를 더 밀어 넣어 천천히 휘돌렸다. 그러자 주완이 반쯤 몸을 돌리고 권수혁을 주시해 왔다.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열 오른 그의 뺨에 쪽, 쪽 입을 맞추다가 좀 더 깊게 고개를 숙여서 입술을 맞물렸다. 주완도 그런 권수혁의 얼굴을 제게 바싹 끌어당기며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했다. 달뜬 숨결이 후덥지근하게 입 안에 퍼졌다.
달짝지근하게 느껴지는 입술과 혀를 얕게 머금었다가 놓고, 다시 감미롭게 빨아 당기면서 아래쪽을 낙차 크게 들쑤셨다. 주완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그의 복부를 힘주어 떠받치며 집요하게 키스도 이어 갔다. 손가락 세 개를 간신히 물었던 구멍이 점차 기분 좋게 감겨 왔다. 권수혁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권수혁은 주완의 구멍을 갉작이던 손가락을 빼낸 후 주완을 자신과 마주 보도록 돌려 눕혔다. 막막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주완과 눈을 맞추며 어깨에 걸쳤던 가운도 홱 벗어 젖혔다.
“하읏….”
혼자 일어선 주완의 성기를 완전히 감싸 쥐자, 주완의 허리가 움찔 튀었다. 엄지로 요도에 맺힌 쿠퍼액을 가만가만 매만져 늘어뜨렸다.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주완이 숨까지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권수혁은 가늘게 늘어진 쿠퍼액을 손으로 훑어 내리며 주완의 성기를 살살 쓸었다. 중심부에서 촉발된 저릿함에 주완이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비틀었다. 권수혁이 그 위로 상체를 무너뜨려 그의 뜨끈한 목에 콧날을 비벼 댔다. 코끝으로 말랑말랑한 귓불을 건드리다가 혀를 내어 목부터 귀밑까지 진득이 핥아 올렸다. 이어 입을 벌리더니 덥석 목을 물었다.
“…윽.”
주완이 숨을 삼키며 낮게 신음했다. 허리가 팔걸이에 걸쳐진 자세 때문에 자꾸 머리로 피가 몰렸다. 사타구니에서 발끈발끈 올라오는 쾌감까지 더해지면서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끙끙거리던 와중에 묵직한 권수혁의 성기게 젖은 구멍 위로 툭 떨어지자 움찔 어깨를 떨었다. 조마조마한 눈길이 권수혁에게 덮여 보이지도 않는 아래쪽을 향했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의 성기를 부드럽게 짓이기면서 예민해진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힘 빼.”
“…으읏.”
이어 권수혁의 성기가 그 존재감을 과시하며 구멍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입구에서부터 살갗이 뻑뻑하게 맞물리는 감각에 주완이 질끈 눈을 감았다. 권수혁에게서도 탁한 숨이 터졌다. 충분히 풀었는데도 내벽은 빠듯하기만 했다. 엉겨 오는 속살의 감촉을 만끽하며 부득부득 파고들었다. 마침내 철퍽 소리를 내며 권수혁의 탄탄한 복부가 주완의 볼기에 밀착됐다. 숨통까지 짓누르는 포만감에 주완의 온몸이 바싹 날을 세웠다.
“읏… 아으읏….”
“하아….”
한차례 날숨을 뱉은 권수혁은 주완의 배 위에 제 배를 꼭 맞붙인 채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유로우면서도 깊게 내벽을 퍼 올려 감미로운 점막에 울퉁불퉁한 성기를 비비적거렸다. 부들부들한 속살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다가 은근슬쩍 성기 겉면에 들러붙어 왔다. 최대한의 끈기를 발휘하며 주완의 몸을 천천히 열고 있지만, 그 감촉이 억눌린 욕망을 거듭 충동질했다. 당장이라도 마음껏 속살을 휘젓고, 남김없이 폭식하고 싶었다. 그럴수록 숨을 크게 들이켜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권수혁이 밑을 쑤석일 때마다 두 사람 복부 사이에 짜부라진 주완의 성기가 함께 뭉개지고 쓸리며 골반 전체를 저릿하게 울렸다. 절로 발가락이 구부러져 하얗게 질렸다. 헐렁하던 상의는 잇따른 삽입에 조금씩 밀려 올라갔다. 그러면서 며칠째 물고 빨려 얼룩덜룩해진 상체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권수혁은 주완의 옆구리에서부터 가슴골까지 죽 핥아 올랐다. 어김없이 주완의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살갗에도 잔소름이 돋아났다. 덩달아 긴장된 가슴을 서슴없이 함빡 머금었다. 하도 빨려서 예민해진 살점이 혀와 맞닿아 형체 없이 이지러졌다.
“앗… 으응, 읏, 아….”
주완이 흉부를 부풀리며 엉망으로 앓아 댔다. 간지러운 듯도 하고, 아린 듯도 한 느낌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권수혁은 발끈하는 주완의 손목을 어렵지 않게 잡아 누르곤 착실히 밑을 쑤시면서 유두를 힘주어 흡착했다. 연방 가로저어지던 주완의 고개가 완전히 젖혀졌다. 눈을 감으면 자극이 더 선명해지고, 눈을 뜨면 저를 관망 중인 재규어가 보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럴수록 내벽은 더 오그라들어 권수혁을 부추겼다. 나름대로 주완을 배려해 여유롭게 허리 짓을 하던 권수혁이 돌연 성기를 끝까지 빼내더니 일거에 뿌리 끝까지 처박았다. 그러곤 연거푸 같은 낙폭으로 주완의 구멍을 쑤석여 댔다. 내벽을 꽉 채웠던 성기가 마구잡이로 꽂히면서 성기 겉면의 요철이 점막을 있는 대로 할퀴어 댔다. 그때마다 내벽이 움찔움찔하면서 물린 성기를 쥐어짰다. 금세 권수혁의 매끈하던 이마에 핏대가 일어섰다.
마찰열로 인해 구멍부터 안쪽 깊은 곳까지 남김없이 데워졌다. 잠시 빠져나갔다가도 얼른 들어가 그 감미로운 열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하읏…!”
권수혁에게 깔려 그를 받기에 급급하던 주완이 어느 순간, 사지를 비틀면서 움찔 굳었다. 날을 세운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어느새 물기가 어린 눈동자도 더듬더듬 권수혁을 주시해 왔다. 약점을 들키기라도 한 듯 조마조마한 눈빛이었다.
다음 순간, 권수혁은 주완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제 성기를 푹푹 쑤셔 박았다. 돌 같은 그의 귀두에 특정 지점이 거푸 쓸리고 뭉개지며 형언하지 못할 쾌감을 선사했다. 주완의 온몸이 전기 오르듯 바르르 떨렸다. 주완의 입이 연신 달그락거리며 짙은 신음을 토해 냈다.
“윽… 아읏, 응, 하으읏, 으응, 윽, 하윽!”
“하아, 하아….”
격렬하게 주완을 들쑤시던 권수혁의 성기는 이따금 엉덩이 골로 미끄러져 회음을 건드리기도 하고 음낭에 처박히기도 했다. 그러다 곧 본래 궤도로 복귀해 다시 주완의 속살을 빻고 다져 댔다. 녹녹해진 구멍이 달게 그의 성기를 빨아 당기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점막도 촘촘하게 나붙어 열띤 살갗을 빨판처럼 흡착했다. 땀이 뚝뚝 떨어졌다. 시야가 노래지고, 머릿속에선 경광등이 울리는 것 같았다.
성기를 온전히 틀어박을 때마다 주완의 복부가 그 부피만큼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그의 성기를 손가락 사이에 걸치고 마른 복부를 누르면서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위아래에서 압박이 가해지자, 주완의 얼굴 전체가 새빨개졌다. 제 움직임에 하나하나 반응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겨 나갔다.
빠득 이를 갈며 주완의 배 속을 폭발적으로 드나들었다. 본능 앞에 민감해진 신경이 재규어를 경계하며 날을 세웠다. 정신없이 앓아 대는 주완에게 슬쩍 다가오려는 놈을 노려봤다. 그러자 놈이 멈칫하며 권수혁의 눈치를 살폈다. 놈이 움직이지 않도록 예의 주시하면서 밑을 퍽, 퍽 붙였다. 유치하게도 놈을 상대로 누가 우위인지, 마땅히 주완을 차지해도 되는 게 누구인지 인식시키는 꼴이 됐다.
한낱 짐승이라도 관찰자가 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빠르게 살덩이가 들끓었다. 지독한 요의가 몰리면서 복부의 근육이 더 깊게 파였다. 깊은 날숨을 뱉은 권수혁은 주저 없이 주완에게 추락했다. 철퍽 소리를 내며 그의 성기가 뿌리까지 들이박혔다.
“아윽, 으읏!”
대번에 뇌리까지 솟구치는 전율에 주완이 격렬하게 사지를 버둥거렸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을 꼭 끌어안고 그의 귓등에 입을 맞추면서 맞물린 밑을 거푸 짓뭉갰다. 한껏 자극된 구멍 주변에 음낭까지 진득이 문질러지면서 주완이 재게 고개를 저으며 비명 같은 신음을 뱉었다.
“하으, 아으읏!”
머지않아 권수혁의 성기가 폭발하며 배 속에 발끈 욕망의 잔재를 뿜어냈다. 권수혁의 손가락 사이에서 몸살 앓던 주완의 성기도 잇따라 사정했다.
“흐읏… 읏, 아읏!”
“…으윽!”
절정을 맛본 몸이 벌벌 떨렸다.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주완의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기어이 도르륵 흘렀다. 권수혁은 그 눈물을 핥아 주곤 쪽, 쪽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주완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팔을 들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한동안 귓가에는 서로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권수혁은 연신 주완의 뺨과 턱, 목 등지에 입술을 누르면서 그의 숨이 좀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 그를 번쩍 안아 들고 침실로 향했다.
내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재규어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권수혁은 놈의 코앞에서 침실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재규어가 앞발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수혁은 개의치 않고 묵묵히 침대로 가서 그 위에 주완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러곤 그의 상체에 애매하게 걸려 있던 티셔츠를 멋대로 벗겼다.
주완은 얼결에 고개를 들어 탈의를 돕고는 풀린 눈으로 권수혁을 올려다봤다. 곧 권수혁이 고개 숙여 주완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이어 베개를 끌어와 주완의 허리 아래에 잘 받쳐 주었다. 아무래도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권수혁은 주완의 다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얹었다. 맨다리에 입을 맞추면서 작은 볼기를 양손에 꽉 움켜쥐었다. 안을 채웠던 정액이 꿈질꿈질 새어 나왔다. 그것을 엄지로 훑어 도로 밀어 넣곤 살짝 부어오른 구멍에 제 성기를 가만가만 문질렀다. 사정 후에도 시들지 않은 살덩이는 금세 기력을 되찾으며 단단해졌다. 구멍이 쓸릴 때마다 올라오는 아릿한 감각에 주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숙제, 아직 다 안 했는데….”
그새 잠긴 목소리로 만류하던 주완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권수혁의 그의 몸을 반으로 접다시피 하며 제 성기를 부득불 밀어 넣은 탓이었다. 성기 겉면에 두드러진 핏대가 부은 구멍을 쓸고 지나가면서 주완의 하반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통감과 쾌감 사이의 미묘한 느낌을 견뎌 보려는 듯 쓰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어 봤지만, 별반 소용은 없었다. 붉어진 귀가 거푸 침대에 쓸려 뭉그러졌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모르는 척 물었다.
“응? 뭐라고?”
“숙제… 읏… 응, 하읏.”
“그쪽도, 이쪽도 잘하겠다며.”
주완의 턱을 잡아 고정하곤 차분하게 입술을 맞댔다. 그 과정에서 권수혁과 주완의 배가 맞붙고, 성기도 완전히 파묻혀 들어갔다. 지레 주완의 이가 꽉 물렸다. 권수혁은 그의 입술을 벌리려는 듯 연신 혀로 핥다가 여의치 않자 그의 볼을 눌러 입을 열었다. 그제야 애타게 입술 새를 핥던 혀가 뭉텅 미끄러져 들어갔다. 혀를 깊숙이 넣어 몸을 사리는 주완의 혀에 얽었다. 주완이 응, 하는 소리를 내며 권수혁의 혀를 다소 버겁게 머금었다.
권수혁은 제 혀에 그저 맞닿아 있기만 하던 주완의 혀를 가볍게 빨면서 서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에게 꿰어진 주완의 몸이 함께 흔들리면서 주완의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끙끙 앓는 소리도 잦아졌다.
주완이 그 페이스에 익숙해지려던 찰나, 매트리스가 다 출렁거릴 정도로 빠르고 깊게 밑을 붙였다. 그로 인해 간신히 유지되던 몸의 긴장이 여지없이 헝클어졌다. 이미 한차례 달궈졌던 속살은 전보다 빠르게 저릿해졌다.
“아… 아으윽….”
침대 시트를 말아 쥔 주완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권수혁의 제 손가락 자국이 남을 정도로 주완의 볼기를 꽉 움켜쥔 채 사정없이 몰아쳤다. 거듭 주완의 몸을 열고 속살을 폭식해도 들끓는 육욕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맛보면 맛볼수록 더 강렬한 식욕이 이는 듯했다. 꿀꺽 고이는 침을 삼키며 안을 휘저어 샅샅이 발라 먹었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통에 주완이 엉망으로 앓으며 자지러졌다.
“아응, 읏, 하읏, 읏, 응!”
“하아, 하….”
바위 같은 허벅지와 차진 엉덩이가 격하게 마찰하면서 철퍽철퍽 소리를 냈다. 한 번씩 맞닿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새빨개진 주완의 볼기가 자르르 경련했다. 배 속이 다 개먹을 것처럼 깊고 묵직한 삽입에 속이 급격히 더부룩해졌다. 열띤 살덩이가 탈착할 때마다 눈앞이 번쩍번쩍하며 쉼 없이 반전됐다. 뇌가 바글바글 끓다 못해 형체 없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주완의 내벽을 다 으깨 놓을 것처럼 들쑤셔 대던 권수혁이 별안간 귀두부만 남겨 놓고 성기를 쑥 빼냈다. 배 속이 허전해지자 주완이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떠서 권수혁을 올려다봤다.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배 속에서 두툼한 살덩이가 사라지면서 내벽이 꾸물꾸물했다. 미처 절정에 다다르지 못한 몸도 바르르 떨렸다. 뜨거워졌던 몸도, 온몸을 맹렬하게 굽이치던 피도 급격히 식는 느낌이었다. 여릿한 현기증마저 돌았다. 아직 부족했다. 조금 더 꽉 안아 줬으면 좋겠다.
주완은 초조한 눈빛으로 권수혁과 맞물린 밑을 번갈아 봤다. 가쁜 숨을 뱉느라 미약하게 달싹여지던 그의 입술이 파르르 경련했다.
“왜, 왜요… 왜….”
“재촉하지 마.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빨리….”
주완이 은근히 권수혁 쪽으로 제 하체를 붙였다. 그러면서 끝만 겨우 걸려 있던 성기가 아주 살짝 더 밀려 들어갔다. 겁 없는 도발에 권수혁에게 숫제 한숨이 터졌다.
“원망 좀 들으면 되지.”
권수혁은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주완의 팔을 당겨 제 목에 감았다. 그러곤 매달리듯 안겨 오는 그의 머리와 허리를 꼭 품고서 멈췄던 하반신을 팍팍 다시 치댔다. 조바심을 일거에 날려 버리는 쾌감에 주완에게서 탄성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그의 목 깊숙이 코를 묻고 짙어진 체취를 만끽하면서 몇 번이고 그의 안을 저었다.
꼭 배 속에 욕정 가득한 아귀가 깃든 듯했다. 놈을 만족시키려면 하룻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것만 같았다.
“그럼 그렇지.”
아침도 얻어먹을 겸, 주완의 공부를 봐주러 온 백도운은 재규어에게 갈기갈기 찢긴 문제집을 발견하곤 쯧쯧 혀를 찼다. 재규어는 심통이라도 난 것처럼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렸다.
애초에 이런 환경에서 주완을 학습시킨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놀아 달라고 보채는 네발짐승과 틈만 나면 들러붙고 보는 권수혁의 이중 공세에 잠이나마 푹 자면 다행일 판국이었다.
백도운은 굳게 닫힌 침실 문을 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주방으로 가서 식탁에 앉자 전미남이 그 몫의 밥과 국을 떠 주었다. 권수혁은 따가운 그의 눈총에도 아랑곳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어째 낯빛이 몰라보게 반질반질해진 것 같았다. 무표정인 건 변함없었지만, 기분도 꽤 좋아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못내 마뜩잖았다.
“이 짐승 새끼. 내가 차라리 수남이한테 고기를 맡기고 말지.”
“말했잖아, 불가능하다고.”
권수혁이 똑똑히 눈을 맞춰 오며 뻔뻔하게 응수했다. 그러곤 신문을 한 장 넘겨서 다시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빨리 회사로든 어디로든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즈음 재규어는 연신 닫힌 침실 문 앞을 서성거렸다. 아무래도 오전에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주완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주완이 방에서 나오면 놈은 주완에게 엉겨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들 게 분명했다.
양쪽에서 진을 뺀다고 할까.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생활을 하는데도 주완이 좀처럼 살찌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없을 듯했다.
백도운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크게 한숨 쉬었다. 조금도 협조적이지 않은 두 짐승 때문에 주완이 졸업장을 따는 건 먼 훗날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