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우는 객실 전용 엘리베이터 근처를 서성였다. 가까스로 주완 일행의 택시를 따라잡았지만, 전미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관광객들 틈에 몸을 숨겼더니 그새 주완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객실 수만 1,500여 개에 달하는 호텔에서 주완을 찾기가 녹록지 않을 듯했다.
주완이 감금된 상태가 아니라면 한 번쯤은 식사하러 내려오지 않을까. 물론 그렇더라도 다른 일행들을 따돌려야 하지만, 그건 차후에 생각할 일이었다. 장진우는 연신 엘리베이터와 식당가 인근의 통로를 오가며 주완을 찾아낼 방법을 고민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제 집념에 새삼 놀랐다. 주완을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에게 밑도 끝도 없는 욕정을 느꼈고, 여태 그만큼 자신을 격정으로 몰고 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지뢰밭에 발을 들이려는 장진우 자신이 낯설었다. 평생 결과가 불확실한 모험을 즐기지도, 위험할 게 뻔한 일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김제국이 주완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처음 인지했을 땐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에는 제 은밀한 취미가 까발려져서 혼란한 줄 알았다. 그러다 차츰 그 불쾌한 감정이 제 물건을 돌연 날치기당했을 때의 심정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주완과의 관계를 정리할 마음은 없었다. 무반응인 주완을 안는 게 자위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었지만, 장진우 자신의 몸은 착실하게 그에게만 동했기 때문에. 평생 그를 그늘 속에 감춰 놓고 몰래몰래 취할지언정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주완과 함께 있으면 대단한 존재라도 된 것 같았다. 기실 한때는 장진우 자신이 그의 세상이었고, 신이었고, 유일무이한 구원자였다. 점점 메마르고 시들어 가면서도 주완은 이따금 저를 향한 열망을 드러냈다. 그 절박한 눈빛이 좋았다.
돌이켜보면 부모에게조차 철저히 감춰 왔던 본체를 드러낸 게 주완에게뿐이었다. 그 앞에선 모든 속박과 멍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그런 만큼 제게만 맹목적이던 그의 눈길이 다른 데로 이탈하는 건 원치 않았다. 장진우 자신의 본모습을 아는 게 그뿐이듯, 그의 가치를 아는 것도 저뿐이길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장진우는 곧 다른 출입구 근처의 엘리베이터 앞으로 이동했다. 순전히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해당 엘리베이터는 VIP 전용인지 이용객도 거의 없었고, 주변도 조용했다. 일단 다른 층으로 이동해서 조용히 주완에게 접근할 수단을 마련해 볼 작정이었다.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모두 27층에 머물러 있었다. 탑승 버튼을 누르고 잠시 대기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서지 않고 곧장 로비까지 내려왔다.
나직한 기계음을 내며 문이 열렸다. 곧장 탑승하려던 장진우는 하마터면 밖으로 나오던 이와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가까스로 충돌을 모면한 후, 습관적으로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무심코 한국어를 구사했는데, 상대도 한국어로 대꾸했다. 얼떨떨한 표정이 된 장진우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그대로 굳은 장진우를 슬쩍 피해 나가며 실례할게요, 했다.
장진우는 유유히 걸어가는 남자를 유심히 봤다. 그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닫히더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남자의 뒤꽁무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틀림없었다. 광장에서부터 죽 주완과 동행한 일행 중 한 사람이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위압적인 덩치의 사내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던 그 남자가 맞았다.
남자가 타고 내려왔던 엘리베이터는 27층에서 한 번 멈췄고, 남자 외에는 탑승자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주완이 머무는 객실이 27층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장진우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주완은 유독 넓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L’을 향해 빠르게 떨어지는 숫자만 빤히 봤다. 엘리베이터가 바로 도착한 덕에 백도운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1초, 2초,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종의 위화감과 유사했다. 가슴까지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 원인을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금 주완 자신은 오롯이 혼자였다. 전미남이나 백도운의 보호 없이, 권수혁과 재규어의 감시마저 벗어나서. 아니, 이 순간만은 세상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저 홀로 서 있었다.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완벽한 자유. 절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찰나나마 허락된 셈이었다.
그러나 신기하리만치 아무런 욕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토록 절실히 꿈꿨던 게 허망할 만큼 속은 차분하기만 했다. 오히려 느닷없이 찾아온 자유가 어색하고, 어째야 할지 몰라 부담스러웠다. 딱히 돌아가고 싶은 곳도, 돌아갈 곳도 없기 때문일까. 재규어와 권수혁, 전미남, 백도운. 그들이 아니면 이 세상에 주완 자신을 반겨 줄 존재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함부로 의지하거나 기대하면 안 되는데. 이제 저도 어른이니까 제 삶 정도는 스스로 꾸려야 한다. 우선 권수혁에게 맡은바 본분을 다한 뒤에, 반드시. 물론 아직은 멀고 막연하기만 한 일이었다.
나직이 한숨 쉬며 백도운의 지갑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즈음 돌연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생각지 못했던 제동에 미약한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고개를 들고 층수를 확인했다. 역시나 엘리베이터는 로비가 아닌 7층에 멈춰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 탑승 버튼을 누른 듯했다.
주완은 곧 탑승할 이를 위해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 직후, 엘리베이터 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하, 하아….”
내처 백도운의 지갑만 보고 있다가 거친 숨소리에 퍼뜩 눈을 들었다. 뜬금없는 상황 때문이기도 했지만, 금세 풍겨온 익숙한 향기에 더 놀랐다.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까지 터트렸다.
“…아.”
양손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잡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는 다름 아닌 권수혁이었다. 그는 넓은 어깨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면서 거푸 가쁜 날숨을 토했다. 날이 선 시선만은 놀란 주완에게 완전히 고정한 채였다.
주완으로선 어째서 권수혁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그가 어떻게 자신이 탄 엘리베이터를 붙잡은 건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우연이라면 너무 절묘해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렇게라도 권수혁을 만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마카오까지 온 건 순전히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순간 주완을 노려보던 권수혁의 두 눈이 의외로운 빛을 품고 크게 벌어졌다. 폐부의 통증에 괴롭게 찌푸려졌던 표정마저 흐트러졌다.
주완은 갑자기 제게 확 달려드는 손을 보고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소용없게도 금세 권수혁에게 팔을 붙들렸다. 그대로 무지막지한 완력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갔다. 시야가 홱 돌면서 지레 눈이 질끈 감겼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등은 복도 벽과 맞닿은 상태였고 권수혁의 얼굴이 코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여태까지와는 기류가 달라 숨이 멎었다. 훨씬 밀접한 거리였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뭔가가 권수혁의 새카만 눈동자 가득 일렁인 탓이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추측해 볼 여력도 없었다. 이내 권수혁이 좁은 거리마저 확 좁히며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다소 건조하던 입술을 짓누르며 권수혁의 입술이 아릴 정도로 세게 내려앉았다. 약간의 알코올 냄새와 과일 향이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동시에 혀끝에선 미약하게 씁쓰름한 맛이 묻어났다. 술이란 걸 마시면 꼭 그런 맛이 날 것 같았다.
권수혁은 주완의 윗입술을 서너 번에 걸쳐 빠듯하게 물었다가 놓으며, 제 무릎을 그의 다리 사이로 꾹 밀어 넣었다. 주완이 어깨를 움찔하며 작게 신음했다. 그로 인해 꾹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애매하게나마 벌어졌다. 권수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비틀어 주완의 입술 새로 제 혀를 뭉텅 밀어 넣었다.
촉촉하고 뜨거운 살덩이의 침범에 주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갈 곳을 잃고 헤매던 두 손은 제 볼을 감싼 권수혁의 팔을 붙잡았다. 느닷없는 키스로 손끝에 발끈발끈 힘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권수혁을 거칠게 떼어 낸 건 아니었다.
권수혁은 주완의 턱을 아플 만큼 힘주어 붙잡고 미지근한 입 속 점막을 격렬하게 점령해 나갔다. 기세 좋게 파고든 혀가 주춤주춤 물러나던 주완의 혀를 완전히 구석까지 밀어붙였다. 그 탓에 숨이 달리면서 주완에게서 얕게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쁜 숨결도 연이어 터지며 서로의 얼굴을 간질였다.
혀가 마구 역동하며 미끈한 점막을 죄 짓이겨 놓는 통에 입 안이 다 얼얼했다. 입도 크게 벌어져서 턱이 아파 왔다.
“…읏.”
권수혁은 물러서지 않고 점점 더 깊숙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 참에 두 눈이 질끈 감기면서 제 입 속을 마음껏 헤집고 다니는 혀의 움직임을 적나라하게 느껴야 했다. 밀착한 권수혁의 향기가 코를 마비시킬 듯 짙게 풍겨, 누구와 그러고 있는지 자꾸 의식하게 됐다.
권수혁의 돌발 행동에 너무 놀라서 심장이 뜯겨 나올 것처럼 격하게 쿵쾅거렸다. 그 박동에 은근한 욕지기마저 일 정도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음만은 차분해졌다. 반가운 향기 때문일 수도, 온전히 맞닿은 체온 때문일 수도, 그 두 가지 모두에 반응하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한참 만에야 촉 소리를 내며 권수혁의 입술이 떨어졌다. 입 안에 고이다 못해 달짝지근하게 졸여진 타액이 가늘게 늘어졌다.
“…하, 흐읏.”
“하아, 하아….”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며 천천히 두 눈을 들어 권수혁을 응시했다. 버거웠던지, 맑은 눈동자에 여릿한 물기가 어렸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을 빤히 들여다보며 엄지로 그의 뺨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너무도 조심스럽고 간지러운 손길에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주완 자신의 모습도 거기에 유달리 더 선명하게 각인된 듯했다. 너무 신기해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내 권수혁이 주완의 허리를 떠받쳐 제게 당겼다. 그러곤 한층 가까워진 주완의 턱을 슬쩍 들었다. 긴 손가락으로 도톰한 아랫입술을 간지럽게 매만지다가 슬며시 끌어 내린다. 이어 주완만 담고 있던 그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전과 달리 권수혁은 주완에게 서서히 다가가 그의 인중에 가만히 제 입술을 눌렀다. 조심스러운 날숨이 입술 새에 간지럽게 맺혔다. 덩달아 주완의 두 눈도 슬그머니 내리떠졌다. 권수혁이 감미롭게 제 윗입술을 물었다가 놓고, 아랫입술을 재차 머금었다가 놓았을 즈음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옴짝거렸다.
그게 어떤 신호라도 된 것처럼, 권수혁이 엄지로 주완의 볼을 눌러 입을 벌렸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주완의 혀를 지긋이 빨아 당겼다. 붉은 혀끝이 입술 밖으로 빠끔 밀려 나왔다가 달아나려 했다. 권수혁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굶주린 개처럼 입을 크게 벌려 주완의 입술을 삼켰다. 부드러운 점막을 흡착하자, 말캉한 혀가 잇따라 밀려 들어왔다.
촉, 촉 소리를 내며 주완의 혀와 입술을 덧대어 핥고 빨았다. 거짓말처럼 입 속이 달금해지고 귓가와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권수혁을 붙든 손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타액 일부가 턱을 타고 흘렀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자꾸 무릎이 꺾이려고 했다. 기실 주완은 다리 사이로 들어온 권수혁의 허벅지에 얹혀 있는 거나 진배없었다.
“…하아.”
권수혁이 아쉽게나마 입술을 떼어 냈다. 고요한 시선은 여전히 주완에게 붙박인 채였다. 주완은 어깨를 들썩이며 참았던 날숨을 뱉었다. 얼마나 호흡이 엉망이었는지, 폐부가 다 아릿아릿했다.
권수혁은 쌕쌕거리는 주완의 턱을 쓰다듬으며 그를 관찰하듯 요목조목 뜯어봤다. 주완이 다시 눈을 떠 올려 시선을 맞췄을 땐 여유 없이 그의 턱과 뺨 주변에 거푸 입술을 붙여 댔다. 타액에 번들번들해진 입술을 한 번 진득하게 핥기도 했다.
그대로 재차 맞물려 오려는 권수혁의 입술을 손을 들어 막았다. 한차례 폭풍 같은 상황이 지나고 나니 당혹감이 몰려왔다. 불쾌하거나 역겨웠던 건 아니지만, 왜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돌연 자신을 가로막는 주완의 손 때문에 주춤한 권수혁은 손가락 사이로 주완의 두 눈을 직시했다. 그러면서 주완의 하얀 손바닥에 슬그머니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이 폭신하게 짓눌린 직후, 혀를 내어 손금을 덧그리듯 짙게 핥고 올라가 손가락 하나를 잘근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통증은 거의 없었다. 그저 자칫 먹힐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에 조마조마했을 뿐이다.
권수혁은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주완을 노려봤다. 그 눈빛이 마치 수풀에 몸뚱이만 감춘 채 귀는 다 내놓은 토끼를 발견한 포식자 같았다.
쉽사리 진정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완을 붙든 완력은 여전했고, 싸늘하던 눈동자도 모처럼 달궈진 상태 그대로였다. 불안정한 호흡은 권수혁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 때문인지 자못 괴로워 보였다. 그 와중에도 권수혁은 주완에게 고정된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그러다 질끈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쉰다. 당황해 굳은 주완의 옷매무새도 손수 정리해 주었다. 주완의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던 무릎을 물리자, 그가 맥없이 주저앉으려 했다. 권수혁이 그런 주완의 팔을 부축하듯 잡아챘다.
“따라와.”
곧장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완을 밀어 넣고 권수혁 자신도 뒤따라 탔다. 이미 그 안에는 서양인 부부가 탑승 중이었다. 부부는 옅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권수혁은 모니터만 쏘아 보느라, 또 주완은 그런 권수혁을 뚫어지게 응시하느라 그에 화답하지 못했다. 미묘한 기류에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을 따름이었다.
머지않아 엘리베이터가 27층에 다다랐다. 권수혁은 주완의 손목을 잡고 그를 객실로 데려갔다. 복도를 지나는 그의 보폭이 워낙 큼직큼직해서, 맞춰 걸으려면 반쯤 뛰어야 했다.
“대표님.”
객실 앞을 서성이던 권수혁의 수하들이 얼른 달려와 꾸벅했다. 그중에는 주완이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사내도 섞여 있었다.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한 사내가 얼른 객실 문을 열어 주었다. 권수혁은 말없이 주완을 그 안으로 떠밀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 그에게, 서둘러 백도운의 지갑을 꺼내 보였다.
“이걸 백 선생님께 갖다 드려야….”
권수혁은 그 지갑을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그대로 던져 버렸다. 주완이 눈길이 떨어진 지갑을 향하자, 그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지켜보고 있을 수하들은 고려치 않는 것 같았다. 물론 주완도 새삼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진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권수혁은 못 본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외관 자체는 달라진 게 없는데, 주완 자신을 보는 눈빛부터가 생경할 지경이었다.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당부하는 목소리나 어조까지 다정해진 듯한 건 제 착각일까.
잘은 모르지만, 어떤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건 주완 자신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저가 도울 일은 없을 거였다. 그런데도 전미남이 급히 갔던 게 떠올라 지레 걱정됐다.
주완은 애타게 제 대답만 기다리는 권수혁에게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 불안했지만, 그라면 믿을 수 있을 듯했다. 그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대책도 없이 그런 마음이 들었다.
장진우는 일단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27층을 눌렀지만, 객실 키를 인식시키지 않은 탓인지 층수 버튼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혹시 숙박객 이외의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스카이 바가 없는지 확인해 봤다. 여차하면 27층 근처에라도 방을 구해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특유의 기계음을 내며 닫혔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완전히 포개지려던 문 사이로 누군가의 구두코가 불쑥 파고들었다. 장애물을 인식한 문이 도로 벌어졌다. 호텔 내 편의 시설 살피기에 여념 없던 장진우의 시선도 의심 없이 문가를 향했다.
“……!”
이내 장진우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터져 나오려던 숨도 도로 말려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평온을 가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놀란 표정이 감춰지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문 앞에 버티고 선 이가 다름 아닌 전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전미남은 잡고 있던 문을 놓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장진우가 허튼짓을 할 수 없도록 삽시에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곧 장진우는 제 옆구리에 가느다란 뭔가가 꾹 와 닿는 걸 느껴졌다. 나이프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식당에서 마주친 후 줄곧 장진우 자신을 역으로 감시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전미남이 이렇게나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날 순 없을 듯했다. 무사히 잘 넘겼다고 안도했건만, 이렇게 다시 맞닥뜨리게 될 줄이야.
일단 어떻게든 둘러대야 했다. 아직 전미남은 장진우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을 터였다. 주완과 어떤 사이였는지는 더더욱 모를 테고. 하지만 입을 틀어막은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잠깐 풀어 달라며 팔을 두드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전미남의 덩치는 장진우 하나쯤은 너끈히 가릴 수 있을 만큼 컸다.
“두 번이나 반복되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지 않습니까, 장진우 씨.”
한참 만에야 전미남이 입을 뗐다. 예상과 달리 그는 장진우 자신의 이름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목덜미와 팔에 잔 소름이 돋아났다.
아직 엘리베이터 밖에서는 간간이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문제는 누구도 엘리베이터 안 사정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특유의 웅성거림 때문에 장진우가 몸부림치는 기척도 완전히 묻혔다.
위험했다. 이대로 잡혀가면 결코 멀쩡히 돌아올 수 없을 거였다. 그건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본능이 감지한 확신에 가까웠다.
장진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곧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절박하게 바라봤다. 이대로 전기가 끊겨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저 숱한 관광객 중 누군가가 자신도 같이 올라가자며 대뜸 안으로 들어온다면.
살아나갈 방법을 고민하며 미약한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실낱같던 기대마저 박살 내며 빈틈없이 닫히고 말았다.
***
얼마나 지난 걸까. 잠시 의식이 끊겼던 터라 시간의 흐름을 전혀 인지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팔과 발목이 의자에 단단히 결박돼 있었고, 얼굴에는 복면이 뒤집어 씌워진 상태였다. 재갈이 물린 입은 완전히 다물 수도, 더 벌릴 수도 없었다. 얼마나 힘껏 조여 놨는지, 턱이 굳어 욱신거렸다.
당최 이곳은 어디고, 장진우 자신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호텔 내 객실인가 했지만, 포근함이나 안락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바람이 불진 않아도 외부와 아주 가까운 것처럼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와 닿았다. 은근한 흙 내음과 곰팡내도 풍겼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막막함에 이성적으로 사고하기가 어려웠다.
“…흐읍.”
크게 심호흡해 봤다. 하지만 얼굴에 덮인 복면이 코에 들러붙는 바람에 도리어 숨만 더 막히는 기분이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묶인 손발엔 아예 감각이 없었다. 당장 전신을 결박한 줄을 풀어도 한 걸음이나 제대로 내디딜 수 있을지.
한동안 장진우의 거친 숨소리만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이쪽저쪽으로 부산히 고개를 돌려 봤지만, 복면 너머로 비치는 것은커녕 불빛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갇힌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다른 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금세 이대로 영영 발견되지 못하는 건가 싶어 두려워졌다.
대체 전미남과 주완은 무슨 관계기에 장진우 자신을 이곳으로 잡아 온 걸까. 전미남의 외양만 보면 경호원, 내지는 조폭일 듯했다.
설마, 우형석 쪽 사람인가? 그새 우형석이 기어이 주완을 찾아 데려간 거라면? 꽤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그 추측대로면 주완을 뜬금없이 마카오에서 마주친 것도, 그가 전미남 등에게 감시가 아닌 보호받는 느낌이었던 것도, 특급 호텔에 머무르게 된 것도 모두 설명됐다.
그리고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든 그곳에서 달아나야 했다. 얌전히 기다려 봤자 좋은 꼴을 못 볼 게 자명했다. 필사적으로 사지를 비틀었다. 소용없게도 결박된 몸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쳐서 기력만 더 빠졌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건, 그리고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는 건 막막하다 못해 무한한 공포를 선사했다. 애써 떨쳐 내려 해도 최악의 상상들이 뇌리를 꽉 채웠다. 그러면서도 장진우 자신이 이런 데서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진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들었다.
그때, 불쑥 문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육중한 철문이 벌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잇따라 여러 구두 굽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은 장진우의 바로 앞에서 끊겼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신의 시야는 차단됐는데, 상대는 속수무책인 자신을 뜯어보고 있다는 게 두렵고 거북했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건 장진우 자신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철저한 입장 차에 오줌을 지릴 듯했다. 저 아닌 다른 이의 숨소리 하나, 기척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무력한 처지가 그렇게나 무섭다는 걸 여태 몰랐다.
“벗겨.”
한참 만에야 누군가의 명령이 떨어졌다. 전미남이나 우형석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서늘하고, 무정한 느낌이었다.
복면이 뜯기듯 풀려나갔다. 장진우는 재빨리 눈을 굴려 제 상황부터 파악했다. 그곳은 한눈에 봐도 호텔과 무관한 장소인 것 같았다. 창고? 아니면 버려진 공장? 어느 쪽이든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내 한 사내가 장진우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고개가 젖혀지면서 눈앞에 선 의문의 남자, 권수혁을 마주하게 됐다. 전미남은 그의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권수혁의 그림자에 잠식돼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에게서는 위험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감정이라곤 엿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도무지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았다. 그 눈빛만으로도 그가 장진우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해 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괜스레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권수혁이 불쑥 손을 뻗어 왔을 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권수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진우의 재갈을 빼 내렸다.
“그가 원했나?”
“무슨…?”
입을 떼자마자 권수혁의 주먹이 면상을 강타했다. 순간 코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울컥하며 피가 솟구쳤다. 장진우는 신음하며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여전히 머리채를 잡힌 상태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코에서 터진 피가 입술을 적시고 턱을 따라 뚝뚝 흘렀다. 금세 셔츠와 바지가 흠뻑 젖어 들었다.
코뼈가 내려앉은 건지 호흡이 더 버거워졌다. 대량의 피가 목으로 넘어가면서 숨을 쉴 때마다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권수혁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얼음장 같던 얼굴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고, 장진우를 채근하는 어조도 비현실적일 만큼 차분하기만 했다.
“다시 묻지. 그도 좋아했어?”
“대… 대체 무슨 말을… 우욱!”
이번에는 주먹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격렬한 충격에 폐부가 뻐근해지며 숨이 왈칵 막혔다. 장진우는 무지막지한 고통에 신음하다가도 더 많은 공기를 들이마시려 헐떡거렸다. 금세 그의 얼굴이 피와 침으로 범벅됐다.
권수혁은 장진우를 붙들고 있던 사내에게 간단히 고갯짓했다. 그러자 그가 칼을 꺼내 장진우를 옭아맸던 줄을 끊었다. 기댈 곳 없는 장진우의 몸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장진우는 몸을 둥글게 말고 무너진 코와 가슴을 붙잡은 채 바르르 떨었다. 제 처지가 너무 처량하고 기막혀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권수혁은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다가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러곤 필사적으로 제 팔을 붙드는 그를 한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권수혁을 따라오는 사내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만류하지도, 방해하지도 않으려는 듯했다.
“크윽….”
장진우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마자 구둣발에 목을 밟혔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권수혁의 다리를 덜컥 붙들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그를 떨쳐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죽을 것 같았다. 얼굴과 가슴 부위의 통증을 까맣게 잊을 만큼, 온 신경이 생존에 쏠렸다. 죽기 살기로 몸부림치느라 두 눈은 부릅떠지고, 혀가 뻣뻣해졌다. 콧물과 침도 줄줄 흘렀다. 워낙 힘을 준 탓에 오줌까지 지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권수혁은 인정사정없이 장진우의 목을 지르밟았다. 해충 한 마리를 밟아 터트리는 것처럼 가차 없었다.
권수혁의 수하 중 누구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무심한 외면과 방관. 까마득한 단절감이 단숨에 장진우를 나락으로 밀어 버렸다. 그 심정은 끔찍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됐다.
기어이 구두에 갈린 살갗이 까지고, 피가 배어 나왔다. 개의치 않고 목을 더 압박하던 권수혁이 불시에 울대뼈 부근을 걷어찼다. 장진우는 목을 감싼 채 컥컥거리면서 마른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목에서 역한 피 맛이 났다.
권수혁은 구두코로 벌벌거리는 장진우의 어깨를 밀쳤다. 그러곤 재차 그의 멱살을 잡아 반쯤 일으켜 세웠다.
“묻잖아. 박주완도 네가 오는 걸 반겼느냐고.”
“박주완…? 크윽! 으읍!”
장진우가 주완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권수혁의 구둣발이 그의 입술을 짓밟았다. 장진우는 벽과 권수혁 구두 사이에 짓눌려 지렁이처럼 온몸을 꿈틀거렸다.
권수혁은 한 번도 감정이랄 걸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무장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분개하고 있다는 게 생생히 전해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주완 때문인 듯했다.
권수혁이 던진 질문들로 짐작건대, 어째서인지 그는 이미 장진우 자신과 주완 사이의 일을 아는 눈치였다. 이마와 턱에 핏대까지 세우며 분노하는 것도 그 일과 관련돼 보였다. 주완에게 직접 들은 걸까? 대관절 주완과 무슨 사이기에?
추론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권수혁이 발에 더 힘을 줘서 장진우의 입술을 짓이긴 탓이었다. 치열이 흔들리며 잇몸 전체가 욱신거렸다.
권수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금 장진우를 일으켜 주먹을 갈겼다.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얼굴만 후려치는 게, 장진우의 두개골을 완전히 박살 낼 작정인 듯했다. 일거에 뇌까지 작렬하는 충격에 의식이 가뭇해졌다가 또렷해지길 반복했다. 코에서 입으로, 입에서 목으로 연결된 기도에 피가 울걱 들어차면서 거푸 기침이 터졌다. 온몸이 가루가 될 것 같았다.
전미남을 비롯한 수하들은 완전히 고삐가 풀린 권수혁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권수혁이 그들 앞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날뛰었던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의 오랜 충심을 배신하고, 그의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배신자를 처단했을 때.
그 이후로 권수혁은 누군가를 처단할 때 제 손을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행여 직접 나서야 할 때도 조용히, 그리고 단시간에 처리할 방법을 택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굳이 힘들여 가며 장진우를 곤죽으로 만들고 있었다. 전미남이 그에게 넘겼던 메모리카드가 어떤 도화선이 된 듯했다.
이제 장진우는 권수혁의 주먹이 내리꽂혀도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는 게 전부였다. 신음할 기력도 없는 기색이었다. 권수혁은 장진우를 바닥에 내던지곤 그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그가 크게 들썩거리더니 질척한 핏덩이를 토해 냈다.
장진우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그의 코에 피거품이 맺혔다가 터졌다. 입 속에서는 연방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런 꼴로도 숨이 붙어 있다는 게, 통증마저 선명히 느껴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쿨럭. 쿨럭.”
장진우는 힘겹게 기침했다. 여지없이 붉은 피가 솟구쳐 얼굴에 튀었다. 권수혁은 발끝으로 그의 어깨를 들쳤다. 그러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턱을 내리밟으면서 그를 고요히 주시했다. 변명할 게 있는지 추궁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더듬더듬 권수혁을 보는 장진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얼굴 전체가 피로 얼룩져, 본래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입술을 길게 찢어 히죽거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인식됐다. 두 눈도 가늘게 휘어졌다. 복부까지 너울거릴 만큼 명백한 웃음이었다.
권수혁은 기이하게 낄낄거리는 장진우를 대수롭지 않게 지켜봤다. 그 웃음이 최후를 예감한 이가 부리는 허세, 또는 체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장진우는 한참 만에야 웃음을 삭이며 피가 섞인 타액을 퉤 뱉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선혈에 붉게 변한 이가 보였다.
“…박주완, 박주완이라. 아무렴, 좋다고 허리를 흔들었지. 내 눈길 한 번 더 받으려고 얼마나 필사적이었는데. 어쩌다 응해 주면 더 안아 달라고 얼마나 보채고 매달리던지.”
“닥쳐.”
“왜? 알고 싶어 했잖아? 쿨럭… 하아… 네놈도 동했나 보지? 그래, 내 탓이 아니라니까? 애초에 박주완 그게 요물이었던 거지. 그러니까 제 의붓아버지도 홀렸던 거 아니겠어? 혹시 벌써 맛봤나? 어때? 안을 때마다 처음인 것처럼 굴지? 항상 그렇게 죽는소리를 하는데, 막상 박으면 꽉 물고 안 놔준다고.”
“닥치라고.”
“박주완도 날 좋아했어. 얌전히 내게 길들어서 도망가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고! 늘 나한테만 반응하고, 기대하고, 웃어 줬지. 내가 처음이야. 내가 버려진 박주완을 주운 거라고. 그러니까 내 거잖아? 당연히 내 거지. 너 같은 벌레들이 탐내 봤자 내 거, 내 거라고!”
권수혁은 미친 것처럼 발악하는 장진우의 멱살을 다시 잡아챘다. 그러곤 그를 질질 의자로 끌고 와 도로 앉혔다. 쓰레기 자루도 그처럼 마구잡이로 다루진 않을 듯했다. 권수혁의 수하들은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장진우를 뒤쪽에서 붙들었다. 장진우는 그 상황에도 연방 샐쭉거렸다.
그때, 권수혁이 제 곁에 서 있던 수하의 재킷을 젖혔다. 그러곤 안쪽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홱 빼 들었다.
“…대표님!”
수하의 만류에도 서슴없이 장진우의 사타구니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그 상태로 나이프를 옆으로 홱 휘둘러 죽음을 직면한 공포에 불룩해졌던 살덩이를 완전히 훼손했다. 순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에 장진우의 몸이 펄떡 튀어 올랐다.
“크아아아아아악!”
장진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목과 이마는 물론 전신의 핏줄이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경악스레 벌어진 눈꺼풀에서 기어이 눈알이 떨어져 나올 것 같았다. 나이프가 꽂힌 사타구니가 단숨에 흠뻑 젖어 들더니, 곧 피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져 웅덩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참담한 광경에 시종 무표정하던 권수혁의 수하들조차 낯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권수혁만 일말의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제 얼굴에 튄 피조차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수하가 건네는 손수건을 장진우의 입 속으로 밀어 넣을 따름이었다. 장진우가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경련하던 장진우의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넘어갔다. 권수혁의 수하들이 손을 놓자, 그의 몸이 맥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쇼크로 혼절했을 뿐, 숨이 끊긴 건 아니었다.
권수혁은 전미남이 다시 건넨 손수건으로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그러곤 그 손수건을 장진우에게 내버렸다. 팔랑거리며 떨어진 손수건이 장진우의 면상을 덮었다.
“이자가 쉽게 죽는 건 용납 못 해. 도망가는 것도, 자살하는 것도. 다리와 혀를 자르되, 반드시 살려야 할 거야. 상처가 다 낫거든 즉시 암시장으로 보내고. 고자한테 환장하는 변태 성욕자들도 많다니까, 누구든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헐값에 넘겨.”
권수혁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창고를 빠져나갔다. 전미남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창고 앞에서 대기하던 수하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얼른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권수혁은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제야 전미남도 조수석에 올라탔다. 뒤늦게 운전석에 탑승한 수하는 룸미러를 통해 권수혁을 응시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권수혁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창밖을 내다보면서 건조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대꾸 없이 길어지는 침묵에 전미남도 “대표님?” 하며 뒷자리를 돌아봤다. 이내 더 놀랐던 건 권수혁이 뭔가에 푹 빠진 듯한 눈빛을 했기 때문이었다.
“박주완에게 간다.”
곧 이어진 지시는 달콤하게마저 느껴졌다.
전미남은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사이드미러로나마 권수혁의 낯빛을 살폈다. 그는 좌석에 등을 흠씬 기댄 채 고개마저 살짝 젖히고 있었다. 쉬려는 건가 싶었지만, 두 눈은 멀거니 떠서 천장 어딘가에 막연히 고정된 상태였다.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제까지 권수혁에 관해 모르는 게 없었다. 그의 과거나 성격, 취향, 작은 손짓이나 눈빛이 의미하는 바까지.
하지만 정말 그런가? 오늘 권수혁의 행동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파괴적이라, 전미남의 확신을 흐리게 했다. 어쩌면 이제까지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본성이 뒤늦게 튀어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권수혁은 깊은 날숨을 뱉으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닦는다고 닦았는데도 아직 제게서 비릿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그대로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멀쩡했던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건만, 가슴에 번진 불길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왜, 어째서. 권수혁 자신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
엄밀히 따지면 장진우는 권수혁 자신과 무관한 존재였다.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권수혁 자신만큼은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었다. 저조차 그 잣대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 일은 악마가 또 다른 악마를 처단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우스꽝스럽고 소모적인 일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권수혁으로서도 그런 저 자신이 낯설었다. 대체 왜 그런 건지.
권수혁 자신이 원했던 조건과 주완의 조건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판매자가 주완의 담당의였던 김제국이 아니었다면, 전미남에게 주완의 뒤를 캐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지 않았으면, 그래서 그가 주완의 병실에 숨겨져 있던 카메라를 찾지 못했더라면 장진우는 지금처럼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터였다.
결론적으로 권수혁 자신이 분개했던 건 주완 때문인 건가?
근래 유독 주완이 눈에 띄긴 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특별히 거슬리는 짓을 하지 않아도 의식하면 으레 눈으로 그를 쫓고 있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건 그게 단지 제 영역에 타인을 들여놓은 적이 없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주완이 예상치 못했던 말이나 행동을 할 때마다 당황스럽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거기에 어떤 감정이 개입됐으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동정심은 아닐까. 주완을 처음 데려왔던 날, 끝내 피를 뽑지 않았던 건 단순히 그가 너무도 앙상했기 때문이다. 기껏 큰돈을 들여 사 왔는데, 당시의 그는 도무지 그 값어치를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건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훨씬 손실이 적을 듯했다. 정말 그뿐이었다.
주완에게 죽은 동생이 겹쳐 보였는지도 모른다. 주완의 시간 역시 그 애가 죽었던 나이에 멈춰 있어서. 주완이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먼저 다가오고, 제 곁에서 편히 잠들고, 알게 모르게 제게 의지할 때마다 거부감은커녕 속이 속절없이 간질거렸다. 누군가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제 배가 부른 듯한 느낌이 든 건 동생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그 역시 헛된 합리화일 뿐이었다. 동생 같은 사람에게 다짜고짜 키스하고픈 충동을 느낄 리가 없잖은가.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니 그런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권수혁 자신은 그딴 이상 성욕자가 아니었다.
장진우와 주완 모두가 마카오에 있고, 장진우가 이미 주완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텅 빈 뇌리에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선 안 된다는 일념만 가득했다. 장진우에게 주완을 돌려줄 수 없었다.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다급히 주완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그가 막 카지노에 간다는 백도운을 쫓아갔다는 소식에 전미남은 로비로, 권수혁 자신은 객실 전용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탑승 버튼을 얼마나 절박하게 눌렀던지.
가까스로 붙잡은 엘리베이터에서 주완을 만났을 때, 자신을 반기며 웃는 그를 보곤 도저히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주완에게 와락 달려들고 말았다. 한번 닿고 나니 더 샅샅이 그의 체온과 체취를 만끽하고 싶었다.
만약 주완이 저지하지 않았다면 키스만으로 끝내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솟구쳐 일어난 사고라기엔 주완과의 키스에 흠뻑 빠져 있었다. 생각보다 감미롭고 달콤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 얼마나 긴박하게 주완을 찾았는지 까맣게 잊었을 정도였다. 가능하다면 그대로 주완을 삼켜 버리고 싶었을 만큼.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주완과 함께 있던 그 순간만큼은 완전한 진공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온몸을 지배하던 분노도, 속을 할퀴던 악감정도, 주변의 소음마저도 완전히 가신, 오로지 두 사람만 존재하는 진공. 그걸 단순히 찰나의 육욕, 혹은 욕정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권수혁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혼란스럽긴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 애매한 감정은 주완을 만나면 뚜렷하게 갈피가 잡힐 테고, 비로소 이름도 붙일 수 있을 거였다.
권수혁의 차는 한적한 도로를 빠르게 질주해 나갔다. 그림자마저 삼켰던 새카만 어둠이 점점 멀어졌다. 먼 곳에서 휘황찬란한 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잠자던 코타이 스트립이 밤을 맞아 화려하게 깨어난 듯했다. 띄엄띄엄 불을 밝힌 가로등까지 그곳으로 인도해 주는 촛대 같았다.
저 빛 속에 주완이 있었다. 왜인지 조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
뒤따르던 수하들에게 당부했다. 수하들은 영문도 모른 채 꾸벅하며 네, 할 따름이었다. 권수혁은 으레 객실 안까지 동행하려던 전미남조차 눈빛으로 제지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객실 문에 카드 키를 인식하고 바로 문손잡이를 잡아 내리려던 찰나였다. 안쪽에서부터 먼저 문이 열리더니, 백도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제 앞에 선 권수혁을 올려다보며 픽 웃었다.
“뭐야, 그 귀신도 도망갈 것 같은 표정은. 설마 그러고 주완 씨 만나려고?”
권수혁의 눈살이 꿈틀거렸다. 그는 대뜸 백도운의 멱살을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백도운도 그의 팔을 꽉 움켜쥐고, 다른 팔로 그의 턱을 떠밀며 대항했다. 그새 얼굴은 드물게 굳어 있었다.
“대표님…!”
뒤에서 지켜보던 전미남이 황급히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그조차 빈번하게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이번 일은 백도운을 탓할 게 아니었다. 권수혁이라고 그걸 모르지 않을 터였다. 백도운은 장진우가 주완의 뒤를 밟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고, 일부러 주완을 혼자 남겨 둔 것도 아니었으며, 그에게 지갑을 가져다주겠다고 나선 건 순전히 주완의 의지였다. 그러니 권수혁이 백도운에게 화낼 이유는 아무래도 없었다.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와 혼란한 감정이 애꿎게도 그에게 표출된 것뿐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가장 가까운 존재는 그라서, 더 고삐가 풀렸다.
이내 권수혁은 백도운을 밀치듯 놓아주었다. 전미남이 얼른 넘어질 뻔했던 백도운을 부축해 주었다. 백도운은 권수혁에게 잡혀 구겨진 셔츠를 탁탁 털면서 물었다.
“권수혁. 너는 안 그럴 거지?”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당부에 가까웠다. 얼굴에도 묘하게 씁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주완은 이래저래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끊임없이 가해지는 고통에 무뎌지고, 무뎌져서 웬만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게 됐다. 메마르다 못해 버석거리는 사람을 꽉 움켜쥐면 부서지기밖에 더 할까. 그러니 이제야 조금씩 웃기 시작한 주완에게 장진우가 그랬던 것처럼 절망보다 잔인한 헛된 희망을 심어 주지 말라는 것 같았다.
“…….”
권수혁은 백도운을 마뜩잖게 응시하다가 아무런 대꾸 없이 객실로 들어갔다. 백도운이 권수혁 자신을 몰라서 그따위 참견을 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안다. 오히려 한번 시동이 걸리면 끝을 볼 때까지 폭주해 버리는 제 기질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한 말이란 것도.
그저 조금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변화를 백도운은 진작 눈치챘다는 게. 타인의 눈에도 띄었을 정도면 제법 티가 많이 났던 건가. 이쯤 되니 착각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을 듯했다. 모든 건 주완을 만나면 확실해질 거였다.
이제 곧.
권수혁은 텅 빈 응접실을 훑어보며 외투를 벗어 소파에 던졌다. 그러곤 보이지 않는 주완을 찾아 침실로 들어갔다. 이내 주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망한 웃음이 터졌다.
주완은 넓은 침대의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잠들어 있었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였다. 옷차림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권수혁과 마주쳤을 때와 같았다. 권수혁 자신이 시킨 대로 침대에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진 게 분명했다.
“…하.”
이렇게까지 무방비해서야. 권수혁 자신이 이 방으로 돌아오리란 건 주완도 똑똑히 인지했을 터였다. 저가 난데없이 키스를 퍼부었던 이유도 궁금했을 테고. 그런데도 이렇게 무장 해제돼서 잠들어 버리다니, 당최 위기의식이란 게 없다. 하긴, 주완의 무심함이야 재규어의 주둥이에 덜컥 손을 밀어 넣었던 일이나 권수혁 자신의 침대에서 함부로 안심된다고 떠들었을 때 등 유구하긴 했다.
주완에게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주춤했다. 왜인지 그 손 그대로 주완을 만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 그런 제 생각에 피식했다. 무결한 아기를 만지는 것도 아니고, 사내를 건드리는 데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울 일인가.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전신에 밴 피로와 더러운 감정을 깨끗이 씻어 내렸다. 그러고도 머릿속이 개운해지지 않아 찬물로 마무리했다. 머리카락이 쭈뼛해지면서 그나마 의식이 좀 명료해졌다.
가운 하나를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멀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점점이 낙하한 수적은 권수혁의 동선을 따라 미니바까지 이어졌다. 그곳에 비치된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뒤이어 얼음도 없이 목을 축였다.
선 채로 한 잔을 스트레이트로 비우고, 다시 잔을 채워 침실로 돌아갔다. 그러곤 주완이 잠든 방향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주완은 여전히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슬쩍 상체가 앞쪽으로 기울어졌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달콤하게 귀에 감겼다.
그나저나 그 넓은 자리를 다 놔두고 왜 번번이 그렇게 웅크리고 자는 건지. 왜인지 어떤 침대에 던져 놔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몸을 작게 들썩이며 고른 숨을 뱉는 주완을 보고 있자니 절로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돌이켜 보면 종일 저기압 상태였던 것도 간밤에 잠을 설친 까닭이었다.
권수혁은 남은 위스키를 일거에 털어 넣고 가운을 벗었다. 이어 스스럼없이 주완이 누워 있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권수혁의 그림자가 제 위에서 어른거리는데도 주완에게선 미동조차 없었다. 몸이 스칠 즈음에야 으음, 하며 작게 뒤척일 뿐이었다.
두 팔로 상체를 지탱한 채 주완을 내려다봤다. 주완의 도톰한 입술을 날숨을 뱉느라 살짝 벌어져 있었다. 일견 건조해 보이는 입술이지만, 막상 닿았을 땐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말캉말캉하게 폭신해서 따뜻한 솜사탕에 푹 파묻힌 양 기분이 좋았다. 아예 입을 대지 않았다면 모를까, 감질나는 달콤함을 한번 맛보니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침구에 폭 파묻혔던 주완이 어렴풋이 잠에서 깬 건 저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낀 이후였다. 가물가물하던 두 눈이 선명함 각각에 확 떠졌다. 그러자 권수혁의 얼굴이 시야를 꽉 채웠다.
느닷없는 풍경에 느릿하게 뛰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몸은 완전히 굳어서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을 말없이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그의 턱선을 지그시 덧그려 올라갔다. 그러다 귓불에 이르자 비교적 도톰한 살점을 가만가만 간질이듯 건드렸다. 주완이 살짝 목을 움츠리며 두 눈을 찌푸렸다.
“…으.”
권수혁은 잠시 손을 멈추고 주완을 관찰했다. 주완은 일견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낯을 풀었다. 그러곤 동그란 눈동자로 권수혁을 빤히 올려다봤다. 예상했던 대로 낮의 키스를 포함해서 권수혁이 갑자기 왜 자신에게 그러는 건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차분한 시선으로 주완을 직시하며 그의 귀를 마사지하듯 어루만졌다. 주완이 재차 움찔하면서 낮은 신음을 흘렀다. 만지작거리는 귓가는 물론 목덜미까지 삽시에 달아올랐다. 아. 속에서 깊은 탄식이 터졌다.
권수혁은 주완의 목에 닿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하얗게 드러난 살갗에 제 입술을 내려앉혔다. 뜨끈하고 촉촉한 입술이 짓눌리자 주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온몸이 바짝 긴장해선 어째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는 게 느껴졌다. 권수혁의 목울대가 한차례 너울거렸다.
참지 못하고 주완의 뜨끈뜨끈한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힘껏 깨문 건 아니었지만, 주완에게서 윽, 하는 신음이 터졌다. 권수혁은 연신 바르작거리는 주완의 상의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곤 맨허리를 쓰다듬으면서 그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의 몸을 제게 바싹 당겼다. 무릎도 주완의 다리 사이로 꾹 밀어 넣었다.
“흐읏….”
물었던 부위를 혀로 진득이 핥았다가 다시 함빡 머금고 빨았다. 움찔움찔하는 떨림이 손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좀 더 샅샅이 체온을 만끽하고 싶었다. 콧속 가득 밀려드는 살냄새에 삽시에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하윽.”
날렵한 코끝으로 따끈따끈한 살갗을 지분거리다 고개를 비틀어 주완의 목울대를 머금었다. 가지런한 앞니로 도드라진 부위를 갉작거리며 바르르 떨리는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주완은 고개를 젖힌 채 베개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참기 버거운지, 입까지 꾹 다물고 부들부들 경련했다. 눈도 그새 질끈 감겼다. 메모리 카드 속 영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치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막막히 기다리는 듯했다.
‘권수혁. 너는 안 그럴 거지?’
순간 백도운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거짓말처럼 모든 행동에 제동이 걸렸다.
그제야 주완이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떠서 멍하니 자신을 보는 권수혁과 눈을 맞췄다. 권수혁은 넓은 어깨를 큼직하게 들썩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눈에 초점이 나가선 경황이라곤 없어 보였다.
“잠….”
달싹거리는 주완의 입술을 보다가 사냥하는 매처럼 달려들었다. 단숨에 입술을 벌리고 들어가 혀를 뭉텅 집어넣었다. 주완의 고개가 젖혀지며 두 눈이 살포시 감겼다. 주완은 이번에도 큰 반항 없이, 다만 숨통을 압박하며 밀려드는 권수혁의 혀를 제 혀로 은근히 밀어 냈을 따름이었다. 그 탓에 두 혀가 농밀하게 엉기면서 촉, 촉 하는 마찰음이 샜다. 권수혁은 주완의 혀를 한계까지 짓눌렀다가 쪽 빨아 당겼다.
“…으응.”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인지, 혀뿌리가 아려서인지 거듭 끙끙거린다. 그럴 때마다 권수혁은 잠시 주완의 혀를 놔주곤 혀끝과 입술을 덧대어 핥다가 다시금 혀를 흡착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턱 끝에 급격히 타액이 고이더니, 두 혀가 농탕하게 뒤섞일 때마다 자글자글 끓었다. 그중 일부는 맞물린 입술 새로 흘러나오기도 했다
권수혁은 한참 만에야 주완에게서 떨어졌다. 꽉 감겼던 주완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맑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여전히 그에게 읽히는 감정은 당혹스러움일 뿐, 욕정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군침이 돌았다. 몇 번을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권수혁 자신은 지금 수컷을 상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빠드득 이를 갈며 주완의 바지를 덜컥 붙들었다. 그러자 주완이 눈가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게 권수혁의 손을 붙잡기도 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돌겠네.”
권수혁은 짜증 어린 혼잣말을 지껄이더니 털썩 주완 위로 겹쳐 쓰러졌다. 두툼한 몸에 짓눌린 주완은 그의 어깨 위로 고개만 겨우 내밀어 긴 날숨을 뱉어 냈다. 왜인지 그가 안도하는 듯해서 속이 착잡해졌다.
진정되지 않는 호흡을 고르느라 두 가슴이 서로 완전히 밀착됐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심장 박동도 선명한 진동으로 와 닿았다. 서로의 귓가에선 거푸 뜨겁고 간지러운 숨결이 터졌다.
권수혁은 쓰게 미간을 구기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수혈할 목적으로 사 온 대상에게 진심으로 발정하다니. 더구나 같은 사내에게. 정상이 아니었다. 차가운 머리는 애써 육욕이라는데, 뜨거운 가슴이 엄연한 애정이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당최 그런 감정에 이렇게나 쉽게, 이렇게나 느닷없이 휘말릴 수 있는 건지.
흥분한 몸을 달래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끝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완이 놀란 눈으로 그런 권수혁을 봤다. 그에게 일언반구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찬물을 흠씬 뒤집어쓰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피부에서 여릿한 김이 피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발기한 성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신경질적으로 끄덕대는 살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고작 그 정도 자극에도 복부와 허벅지 전체가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절로 상체가 앞으로 확 기울어졌다.
“으윽….”
짙게 미간을 찌푸린 채 불그죽죽한 성기를 거칠게 훑었다. 통감인지 쾌락인지 모를 감각에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사타구니에 점점 응축된 지독한 열이 척추를 타고 목덜미로, 그리고 뇌까지 솟구쳤다. 금세 눈앞이 빙글 돌았다. 가슴과 허벅지 근육이 터질 듯이 팽창하고, 복근의 골도 한결 짙어졌다. 이마와 턱, 가슴, 넓적다리에 굵직한 핏대가 일어섰다.
어금니를 꽉 물고 신음을 참다가 끝내 포효했다.
“크으읏…!”
농도 짙은 정액이 벽면에 하얗게 튀었다가 되직하게 미끄러졌다.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터트리며 몸을 들썩였다. 폐부가 다 아릿했다. 여릿한 현기증에 눈을 감고 있다가 서서히 떠올렸다.
“하아, 하아….”
얼마나 더 버텨야 할지, 까마득함에 긴 날숨이 새어 나왔다. 더없이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깨어났을 즈음, 멀리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떨치려 한참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소용없게도 몸이 자꾸만 까라졌다. 고개도 자꾸 이불 속에 파묻혔다. 그렇게나 수면욕이 강했나 싶었다.
겨우 눈을 떴다. 푹 잤는데도 더 자고만 싶었다. 모처럼 게으름을 피우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던 중 퍼뜩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벌떡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그러곤 제 목과 입술, 허리 따위를 두서없이 더듬어 봤다. 꿈이었을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현실감이라곤 없는데, 권수혁의 무게감과 키스의 감각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집요하게 물리고 빨렸던 목을 만지작거리며 옆을 봤다. 권수혁은 이미 일어난 건지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다만 그가 벴을 베개가 유달리 주완 자신의 베개 쪽에 바짝 붙은 듯했다. 그 넓은 침대에서, 베개 두 개가 한쪽으로 몰린 광경이 예사로워 보이진 않았다. 밤새 마음 편히 잤던 것 같은데.
단상에 젖은 틈에 권수혁이 침실로 들어왔다. 피할 새 없이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
“…….”
간밤의 일로 민망할 텐데도 둘 중 누구 하나 머쓱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빤히 보면서 기색을 파악할 뿐이었다.
권수혁은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늘한 인상이 더 강조됐지만, 새삼 긴장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어울려서 잠시 넋 놓고 바라봤다. 그런 주완을 주시하던 권수혁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주완의 부스스한 몰골이 원인인 듯했다. 다소 짓궂은 미소였지만, 워낙 의외로워서 주완의 두 눈이 더 커져 올랐다.
“무슨 신생아처럼 자네. 일어나, 그만.”
그제야 주완은 테이블 위 시계를 봤다. 오후 2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권수혁이 기막혀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그렇게 자고도 몸이 쑤시거나 결리지 않는다는 게 용할 노릇이었다.
“씻을게요.”
무릎걸음으로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권수혁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 여느 때보다 서둘러 샤워도 하고, 이도 닦았다.
응접실로 나갔을 때, 테이블에는 이미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조금 전 들렸던 그릇 소리의 정체가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권수혁이 미리 룸서비스를 시켜 둔 모양이었다.
주완은 잠자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권수혁은 신문을 읽으며 조용히 차를 마실 따름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눈을 맞춰 주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갑작스럽게 시작된 키스라든가, 지난밤 침대에서의 일을 먼저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동안 얌전히 앉아 있던 주완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운을 뗐다.
“…좀 느리고 둔해서 그렇지, 어린애는 아니거든요.”
권수혁은 그때서야 눈을 들고 주완을 마주해 왔다.
“무슨 말이지?”
“어제… 혹시 착각하신 건가요?”
의문이 어렸던 권수혁의 낯이 차분해졌다.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주완을 지긋이 응시하기만 했다. 그를 똑똑히 마주하던 주완은 이내 눈을 깔고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면 역시 그런 의민가요?”
체념 어린 질문이었다. 얼굴에도 못내 씁쓸한 표정이 걸렸다. 장진우처럼 자신을 성욕 해소의 대상으로 보는 거냐는 뜻인 듯했다.
권수혁은 하, 하고 어이없어했다. 고작 그런 이유였다면 내내 고민할 필요도, 가치도 없었을 거였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딱 자른다.
“그럴 의도였으면 굳이 너일 필요도 없었겠지. 난 그렇게 궁하지 않아.”
왜인지 권수혁의 낯빛이 불쾌해 보였다. 공연히 오해를 사서? 그렇다면 그건 주완 자신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권수혁이 구태여 주완 자신에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착각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대체 그 돌발 행위를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종국에는 권수혁과 처음 나눴던 키스까지 떠올렸다. 혀를 녹일 것처럼 뜨거운 입맞춤이었다. 당시에는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마냥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오래전, 첫 키스를 경험했을 때와 비슷하게 가슴이 떨리고 기분도 은근히 들떴는데.
어느덧 주완의 눈길은 권수혁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그 빤한 시선을, 권수혁이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겁 없는 주완을 고요히 주시하는 권수혁의 눈빛이 먹이를 사냥하기 직전의 짐승처럼 예리해졌다. 찰나나마 진공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돌연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주완의 고집스러운 주시가 끝나지 않았다면 기어이 그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췄을 터였다. 권수혁에게서 얕은 한숨이 터졌다.
문밖에서 주완 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도운의 목소리였다.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백도운이 영 개운치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어깨에는 이불까지 두른 상태였다.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주완 씨는? 멀쩡해요?”
백도운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완을 요목조목 뜯어봤다. 다분히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주완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난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낮에는 그렇게 덥더니, 밤 되니까 너무 춥더라고. 새벽에 몇 번이나 깨서 난방 장치 고장 난 거 아니냐고 항의했는데, 그건 또 아니라잖아요. 주말이라 만실이라고, 라디에이터 조그만 거 가져다주는데 밤새 너무 추워서 혼났지 뭐예요.”
“아… 저는 괜찮았는데.”
주완이 동의를 구하듯 권수혁 쪽을 돌아봤다. 권수혁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모르는 척 다시 신문이나 본다.
백도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 방에 침대라곤 하나뿐이니, 두 사람이 함께 잠들었을 공산이 컸다. 객실 안 분위기만 봐도 간밤에 우려했던 폭력은 없었으리란 걸, 그리고 어쩌면 꽤 좋은 분위기였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밤새 서로 체온을 나누며 꼭 붙어 잤을 텐데, 추위를 느꼈을 새가.
백도운은 이불을 좀 더 끌어당기며 한탄했다.
“수영장에서 실컷 놀다가 야경이나 구경하러 가려고 했는데, 컨디션이 이 모양이라 다 망했어요. 주완 씨, 아무래도 오늘은 수혁이랑 둘이 다녀야겠는데?”
“네? 아뇨. 전 딱히 밖에 안 나가도 괜찮아요.”
“에이, 그럴 순 없지.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호텔 방에만 박혀 있어요. 그건 안 될 말이야. 난 민폐 끼치기 싫다고요.”
“제가 간호해 드릴게요.”
“그냥 한숨 푹 자면 될 것 같은데, 뭘. 주완 씨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나 때문에 다들 호텔에 묶여 있으면 송구스러워서 내가 어떻게 쉬어. 대신 수발들어 줄 사람은 필요하니까 미남 씨는 내가 빌린다, 권수혁.”
백도운이 권수혁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주완에게는 “잘 놀다 와요. 사진도 많이 찍어 오고.” 했다. 객실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주완을 물리치고 손을 흔든다. 손수 문까지 꾹 닫아 버렸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주완이 한참 만에야 뒤돌아섰다. 곧장 권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권수혁은 내내 보던 신문을 대충 접어 테이블에 던졌다.
“…그렇다는데, 어디 가고 싶은 데 없나? 뭐 하고 싶은 거라든가.”
무뚝뚝하고 무심한 어조였다. 일단은 주완의 뜻에 응해 주겠다는 의미 같았다. 그런데 그 말이 꼭 데이트 신청처럼 느껴져서 가슴이 또 제멋대로 쿵쿵거렸다.
주완과 권수혁이 홍콩으로 건너왔을 즈음,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바쁜 하루를 보냈을 사람들은 친구나 가족, 애인과 더불어 석양을 구경했다. 항구 앞 카페, 펍, 레스토랑에서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두 사람도 빅토리아 항이 훤히 보이는 특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부터 했다. 샴페인이 곁들여진 고급 코스 요리였다. 웨이터가 와서 권수혁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잔을 기울여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머금는 일련의 행위가 우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빤히 보고 말았다.
웨이터는 바로 주완의 곁으로 와서 그의 잔도 채워 주려고 했다. 그에 주완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잔 너머로 주완을 지켜보던 권수혁이 왜, 했다.
“한잔해 봐.”
술을 권하며, 웨이터에게도 마저 따라 주라는 듯 가볍게 고갯짓했다. 금세 주완의 잔에도 샴페인이 채워졌다. 기실 어른이니, 술을 마시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마셔 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주저하던 주완은 조심스레 제 잔을 들고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어 봤다. 향긋했다. 맛은 꽤 씁쓸했지만, 달콤하면서 처량하게 마무리됐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다 보니 금세 한 잔을 뚝딱 비웠다. 왜인지 뺨과 귓가가 타는 듯한 느낌이 났다.
권수혁이 픽 웃으며 다시 잔을 채워 주려 샴페인 병을 들었다.
“천천히 마셔. 취하면 골치 아프니까.”
“…그럼 그만 마실게요.”
권수혁은 그러라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완은 낯설 만큼 화끈거리는 제 귀를 연신 주물럭거렸다. 권수혁은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면서 그런 모습조차 빠짐없이 눈에 새겨 뒀다.
곧이어 요리들이 속속 서빙됐다. 겉모습만 봐서는 어떤 재료가 사용됐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조금씩 맛보면서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권수혁은 모처럼 웨이터의 설명을 귀담아듣곤 그 내용을 주완에게 전해 주었다. 주완은 눈을 빛내며 열심히 경청하고, 음식들을 모두 비웠다.
장장 1시간이 넘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거리에는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빅토리아 항 주변의 마천루들이 여지없이 저마다의 빛을 밝히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황홀해서 멍하니 바라봤다.
“어떻게, 한잔 더 하겠어?”
권수혁이 야경에 푹 빠진 듯한 주완에게 권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권수혁을 돌아봤다.
“근처에 꽤 괜찮은 뷰를 자랑하는 바가 있다던데.”
“그러지 말고 좀 걷지 않을래요?”
뜻밖의 제안에 권수혁은 의외로운 표정을 짓다가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인 데다 항구 바로 옆이라 센 바람이 불었지만, 춥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대화 없이 밤거리를 걸었다. 권수혁이 늘 주완보다 서너 걸음은 앞서 있었다. 천천히 걷는다고 걷는데도 주완이 워낙 느려 자꾸 거리가 벌어졌다.
권수혁이 서툰 탓이기도 했다. 여태 타인과 보폭을 맞추며 산책해 본 적이 없어서. 애초에 그에겐 남을 배려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움직이면 수하들은 알아서 잘 쫓아왔으니까.
점점 더 멀어지던 권수혁이 우뚝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봤다. 주완은 다른 사람들이나 풍경을 구경하느라 안 그래도 느린 걸음이 더 느려진 상태였다.
“빨리 와.”
권수혁의 재촉에 얼른 달려가 그 뒤에 바짝 붙었다. 그런데도 얼마 못 가 또 거리가 벌어지자, 권수혁은 아예 주완을 앞세우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정감이 생겼다.
뒤에서 지켜보니 주완은 사람 구경을 좋아했다. 특히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발견하면 오래도록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한 번도 온전히 가져 보지 못했던 것.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괜히 속에 뭔가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저녁 8시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눈에 띄게 몰려들었다. 8시 정각부터 15분간 진행된다는 ‘심포니 오브 라이츠’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홍콩 야경의 정수라고 하던가. 업무차 몇 번이나 홍콩을 방문했지만, 제대로 즐겨 본 적이 없다. 아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도 떠밀리듯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사이를 두고 운집했지만, 점점 머릿수가 늘어나면서 서로 부대꼈다.
“…어어.”
권수혁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주완을 붙들어 제 앞에 세웠다. 그러곤 두 팔로 앞쪽의 난간을 붙들어 주완을 완전히 제 품에 가뒀다. 덕택에 주완의 등과 권수혁의 가슴이 밀착됐다. 그보다 든든한 보호막은 없을 것 같았다.
곧 바다 건너편의 건물들이 흐르는 음악에 맞춰 하늘에 레이저를 쏘고, 전면에 형형색색의 불빛을 뿜어냈다. 총천연색의 빛무리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각자의 색과 움직임으로 하나의 거대한 하모니를 이루니, 다시없을 장관이 연출됐다.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환호성이 터졌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근심 없이 그 순간을 만끽하던 주완이 불현듯 고개를 돌려 권수혁을 봤다. 권수혁도 금세 시선을 맞춰 왔다.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 묻힐 수도 있겠지만, 주완은 지금 꼭 전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왜인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견디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감옥이나 다름없던 병원 생활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과거에서. 누군가는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하느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주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었다. 권수혁과 전미남, 백도운, 그리고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재규어까지 모두 소중한 인연이 돼 주었다. 그들을 만나서야 비로소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하루하루가 그저 감사했다. 이따금 꿈인가 싶어 무서울 정도로.
그 마음이 권수혁에게도 전달됐을까. 주완의 두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권수혁이 대뜸 그를 돌려세웠다. 그러곤 그의 허리를 바싹 감싸 당기더니 고개 숙여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바짝 굳어선 입을 꾹 다물고 버티던 주완이 슬그머니 권수혁의 아랫입술을 머금어 본다. 억눌린 숨결에서도 미약한 떨림이 전해졌다.
빛들의 향연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사람들의 감탄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황홀경에 취한 사람들은 연인의 탄생을 눈치채지 못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아쉽게 떨어졌을 즈음, 15분간 펼쳐졌던 쇼도 막을 내렸다. 관광객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하나둘 자리를 떴다.
권수혁은 그 후로도 저만 뚫을 듯이 보는 주완에게서 눈을 돌리며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그러면서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잡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만 가자.”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