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남굴(南窟) (10)
‘낭군?’
옥구슬이 꽃잎을 타고 흘러 내려가는 듯 청명한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저잣거리를 울렸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명주의 궁전으로 향하려던 이준은 부채로 입을 가린 여인이 호호 웃으며 승효의 앞을 막아선 것을 발견했다.
‘이 여자는…….’
놀랍게도 예의 여인은, 인간이라면 지니고 있어야 할 두 개의 눈 외에도 더 많은 눈이 달려 있었다.
좌우로 하나씩 더, 그리고 위로 네 개 더.
감고 있는 여섯 개의 눈과 뜨고 있는 두 개의 눈, 그래서 총 여덟 개의 눈을 지닌 여인은 황색 저고리에 흑색 치마를 입은 채 호호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당거미와 흡사했다.
‘거미 비생이군.’
이준은 본능적으로 승효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비생을 경계했다.
“낭자께선 그 손을 놓아주십시오.”
아무래도 ‘산군’의 차사 복장을 한 만큼 말투가 예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길이 가로막힌 승효와는 달리, 흑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준이 입을 열자 부채 위로 눈을 움직이던 거미 비생 여인이 이준을 힐끔대다 다시 승효에게 시선을 꽂았다.
“소녀가 이곳에서 거점을 두고 지낸 지 수백 년이 흘렀거늘, 공자와는 기운을 흘리는 사내는 본 적이 없군요. 어떠십니까, 공자. 오늘 밤 소녀와 함께 밤을 보내시겠습니까?”
‘뭐야.’
내 말은 무시하는 거야?
거미 비생 여인은 이준은 개의치 않고 승효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이준이 황당해하자, 그 모습을 발견한 승효가 어느새 제 옷자락까지 붙들고 있는 여인을 향해 말했다.
“낭자, 그런 말은 많은 눈이 오가는 대로에서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군요.”
거미 비생 여인이 여덟 개의 눈을 동시에 접었다.
“호호, 수줍어하시는군요. 귀엽기도 하셔라.”
“…….”
“알겠습니다. 소녀가 무례했던 것은 인정하겠어요. 하면 보는 눈이 없다면 더 깊은 대화를 나누어도…… 윽!”
승효를 향해 유혹적인 눈웃음을 흘리던 여인의 얼굴이 순간 구겨졌다.
본래 뜨고 있던 두 개의 눈 외에도 남은 여섯 개의 눈이 번쩍이자 순간 당황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마음을 다잡고선, 자꾸만 승효를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여인의 손을 대신 내리쳤다.
“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거미 비생 여인이 갑자기 승효와 자신 사이를 막아선 이준을 보며 서늘한 음성을 흘렸다.
이준은 여덟 개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짐짓 당황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달싹였다.
“무례한 건 낭자가 아닙니까.”
여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준은 흥 코웃음 쳤다.
“조강지처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건만, 남의 낭군을 채어 가려 하니 말입니다. 아무리 부도덕한 자도 그리 행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준의 말에 여인이 황당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이준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어느 산군을 모시는 차사님인 것 같은데, 소녀에게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이준을 향해 여덟 개의 눈을 번뜩이며 섬뜩한 기운을 날린 여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 명계의 여인은 임자 없는 이에게 제 마음을 표현할 권리가 있고, 차사님의 동행분에게는 임자라고는 보이지 않건만. 어찌하여 소녀에게 부도덕하다고 말씀하시는 건지요?”
이준은 오히려 되묻는 거미 비생 여인에게 생긋 웃었다.
“어찌 낭자는 나의 동행에게 임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낭자는 이미 내 동행의 임자를 바라보고 있소이다.”
그 말에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던 거미 여인의 여덟 개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거미 여인이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소리쳤다.
‘하는 수 없지.’
그런 여인을 응시하던 이준은 제 뒤편에 서 있던 승효에게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쓰고 있던 흑립을 살짝 들더니 곧 손을 뻗어 승효의 머리 뒤를 감싸더니 제게로 끌어당겼다.
“……!”
저보다 높은 눈높이를 지닌 상대에게 먼저 입을 맞춘 적이 드물어, 살짝 발을 올리기는 했으나 그의 입술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이준은 놀란 승효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더니 거미 비생 여인이 잘 볼 수 있는 각도에서 숨결을 흘렸다.
“세상에!”
“마, 망측해라!”
대로변에서 큰 키의 두 흑립 사내가 입을 맞추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거미 비생 여인 역시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보드라운 촉감과 따뜻한 기운에 잠시 승효의 위에서 떨어지지 않던 이준은 한참 후에야 슬며시 떨어져 나왔다.
그가 다시 몸을 돌려 거미 비생 여인을 바라보자 허공에서 부딪힌 여인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는 게 보였다.
이준은 말했다.
“이제 믿소이까?”
거미 비생 여인이 얼굴을 구기더니 소리쳤다.
“차…… 차사님은 참으로 고약하신 분이군요! 어찌 아녀자의 앞에서 이런 망측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소녀가 싫으시면, 공자께서 직접 말씀하시면 되지 어찌……!”
바들바들 떨며 이준에게 외치던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이유인즉, 이준의 입맞춤을 받고 뒤편에 서 있던 승효가 이준의 접근으로 흐트러진 흑립을 매만지다 곧 이준의 어깨를 부여잡았기 때문이다.
‘응?’
거미 비생 여인의 말을 들어 주기 위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이준의 몸이 돌아갔다.
“흡!”
갑자기 돌아간 몸을 의아하게 여기던 이준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따뜻한 무언가가 이준의 얼굴을 감쌌다.
곧이어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무언가가 밀려 들어왔다.
‘우웁.’
가쁜 숨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이준은 멈추지 않고 안으로 파고드는 혀의 움직임에 미간을 좁혔다.
‘이…… 자식.’
밀어내려면 아마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흑립 아래로 비치는 옅은 갈색 눈동자가 한층 짙어진 상태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달콤한 타액이 얽혀 들어 갈증이 일었다. 만약 누군가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을지도 몰랐을 일.
‘하아‥….’
매일같이 구승효와 함께 ‘영기 주입 의식’이라는 것을 치르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제 입 안을 휘젓다 못해 헤집어 버리는 이 감각은 난생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승효의 눈을 직시하자 그의 눈꼬리가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쿵쾅댔다.
그의 눈웃음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든 이준이 승효를 밀어낼까 고민했으나, 그것을 파악한 승효가 오히려 더 단단하게 이준의 혀를 옭아맸다.
‘하…….’
눈앞이 어지럽다.
이준은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쿵쿵쿵, 뛰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메아리쳐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달콤한 타액이 입 안을 넘실거리자 이준이 끼고 있던 검은 빛의 귀걸이가 서서히 반응하려 들었다.
조금만…… 더.
시작은 자신이 했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신이 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나 멈추지 못했다.
‘아주 조금만 더…….’
이렇게, 있으면 안 될까.
얽혀 버린 두 사람의 혀가 극을 달했다.
“그만!”
주도권을 빼앗겨 버린 이준이 속절없이 승효에게 휘둘리고 있을 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인이 소리쳤다.
“그만 되었습니다!”
여인이 얼굴을 구기며 침을 튀겼다.
“되었다고요! 그러니 떨어지십시오!”
거미 비생 여인이 두 사내의 행각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제야 승효는 이준을 놓아주었고, 아쉬운 듯 입을 쩝쩝대는 이준과는 달리 그녀에게 시선을 꽂은 승효가 입을 열었다.
“낭자가 보신 대로, 나에게는 놓아주지 않는 반려가 있으니, 그대에게는 갈 수가 없겠군요.”
승효는 흐트러진 흑립을 다시 매만지며 대꾸했다.
그러자 낮게 신음을 터트린 거미 비생 여인이 홱 몸을 돌려 자신이 나왔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한 번의 도발에 몇 배의 역습을 당해버린 이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너…….”
입술이 떨어진 지 오래거늘, 도통 사라지지 않는 뜨거운 감각에 번쩍 얼굴을 든 이준이 승효에게 뭐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스스슥.
이준은 어느새 주변을 둘러싼 적색 가면의 사내들을 발견하고선 멈칫했다.
차라락!
이준과 승효가 자신들을 주시하는 적색 가면 사내들을 응시하고 있자, 모여 있던 그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어 가면을 낀 사내들 중에서도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두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따라와라. 명주께서 찾으신다.”
* * *
두둥.
이준은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내심 탄복했다.
‘여기가 명주의 궁전이라고?’
멀리서 봤을 때는 이 정도일 줄 몰랐는데, 실제로 안으로 들어와 보니 규모가 상당했다.
이준 역시 국내라든가, 국외의 유명 궁전들은 한 번씩 초청되어 간 적이 있었지만 명주의 궁전은 예의 궁전들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았다. 아니, 덜하다 못해 더하기까지 하다.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궁전에 이준은 혀를 내둘렀다.
또각또각―.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길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아래 펼쳐진 궁전의 바닥은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뿐인가.
궁전의 틀을 잡고 있는 기둥에는 실제인지, 아니면 모형인지 알 수 없는 은색의 해골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어딘가로 향하는 기다란 복도 양옆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벽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꼭 그 안으로 들어가 버릴 만큼 생생했다.
화려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느낌을 주는 궁전 안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던 이준은 아무 말 없이 검은 가면 사내를 따르고 있는 승효를 힐끔댔다.
[나에게는 놓아주지 않는 반려가 있으니, 그대에게는 갈 수가 없겠군요.]
이준이야 거미 비생 여인을 떼어 내려는 의도가 있었다지만, 승효는 굳이 안 해도 될 행동을 취했다.
‘대체 왜?’
이준은 화끈거리는 입술의 촉감을 인지하며 승효에게 말했다.
“승효 씨.”
뚜벅뚜벅 걷던 승효의 눈이 이준을 향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 내기 위해 이준이 입을 열었다.
“아까 그건…… 대체 뭐였어?”
그 말에 승효가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받은 대로 돌려드린 것뿐인데, 뭔가 잘못됐습니까?”
“뭐?”
“그럼 도리어 제가 묻고 싶네요. 선배님은 왜 그렇게 행동하신 겁니까?”
승효는 물었다.
“굳이 그런 행동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 여인을 떼어 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준은 중얼거리는 승효의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승효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선배님께선…….”
쿵쿵쿵쿵.
“저를…….”
쿵쿵쿵쿵!
긴장이 극에 달한 시점에 도망치지도, 그렇다고 섣불리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이준이 슬며시 올라가는 승효의 입꼬리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 순간.
“소란 피우지 마라. 곧 명주님 앞이다.”
앞서 가던 검은 가면이 그들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흠흠.’
멀고 멀기만 했던 명주의 대전이 곧 코앞에 다다랐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해.”
이준은 생긋 웃는 승효를 보고 작게 속삭였다. 승효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꾹 닫혀 있던 대전의 돌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명주님, 말씀하신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이준은 자신들을 데려온 검은 가면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의식적으로 내렸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어 그의 시야로 들어온 보좌 위의 존재에 이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