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55화 (56/72)

55화

남굴(南窟) (4)

“그 커뮤 글의 주인공이 우리 차휘 씨라는 걸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몰라요. 만약 미팅 일정을 잡기 전 그 기사가 먼저 나갔더라면 우린 차휘 씨를 만나지도 못했을 뻔했습니다. 하하하하!”

이준은 크게 웃으며 얼마 전 있었던 화제의 커뮤니티 글을 언급하는 남자에게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내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상대의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TVX 예능국 박민종 프로듀서…….’

예능 쪽과는 담을 쌓다시피 하던 이준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이름이다.

[예능국의 박민종 PD님과 긴급 상의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대체 어디에서 들었나 싶어 기억을 더듬던 이준은 곧 눈을 동그랗게 뜨며 승효를 바라봤다.

승효가 빙긋 미소 짓자, 박 PD 역시 껄껄 웃었다.

“차휘 씨와의 미팅이 성사된 건 승효 씨의 공헌이 컸죠. 다시 한번 고마워, 승효 씨.”

“아닙니다. 그때 진 신세를 갚는 거니, 이 정도는 마땅히 해야죠.”

구승효와 박민종 PD가 친분 넘치는 대화를 주고받자 이제야 지금 이 상황이 납득이 갔다.

[왜, 얼마 전 배우님이 함께 사진을 찍으신 할아버님의 손녀분이 글을 올려서 화제가 됐잖아요? 이후 구 배우님과의 인연 기사도 함께 우후죽순 쏟아졌고요.]

[그, 그랬지.]

[그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두 분을 같이 캐스팅하고 싶어 하는 제작사들이 늘어났더라고요. 마침 오늘 미팅이 하나 잡혀 있길래, 대표님이 겸사겸사 두 분을 함께 오시라 한 거죠!]

[함께?]

[아마 동반 캐스팅을 노리시는 게 아닐까요?]

승효까지 불러낸 이유를 설명해 주던 태경을 떠올리며 이준은 승효와 박민종 PD를 번갈아 힐끔댔다.

이미 이준은 승효와 드라마 <역린>에 출연하기로 확정을 지은 상태였고, 5개월 후인 8월에 크랭크인을 예정에 둔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팅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했지.’

현재 이준과 승효의 앞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이준의 아첨을 늘어놓고 있는 TVX 예능국의 박민종 PD는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 이준이 TVX 방송국에서 손각시 사건을 처리할 때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PD임이 분명했다.

이준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 박 PD와 승효의 반응을 잠시 주시하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PD님 말씀은…… 제가 승효 씨와 여행 예능에 출연해 줬으면 좋겠다는 겁니까?”

탐나는 먹잇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떼고 있던 박 PD가 직설적인 이준의 물음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하, 우리 차휘 씨는 꽤나 직설적이군요.”

박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승효 씨에게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한 건, 차휘 씨를 새로 런칭하는 여행 예능에 캐스팅하기 위해서가 맞습니다.”

이준은 승효를 흘긋거렸다.

[글쎄요. 왜 저까지 부르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요.]

사옥으로 향하는 내내 의아해하는 이준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던 승효는 이젠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 모르는 척하더니.’

이준은 피식 웃더니 다시 박 PD를 바라봤다.

“듣자 하니 두 분이 출연을 확정 지은 차기작은 올여름쯤 진행할 예정이라더군요. 저희는 그 전에 모든 촬영을 마칠 계획입니다.”

“그 전이라면…….”

“뭐, 차휘 씨만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죠. 배우들은 휴식기에 꽤 한가하다던데, 지금 휴식기 맞죠?”

은근슬쩍 핵심을 꿰뚫는 박 PD는 무척이나 열성적이었다.

그가 준비 중인 이번 예능은 시골 마을로 들어간 두 톱스타의 시골 적응기를 담고 있다고 했는데, 짧은 단편의 예능이 될 예정이라 길지는 않을 거라고도 전했다.

“딱 일주일! 아니, 그것도 길다면 닷새면 됩니다. 저희는 드라마가 나오기 전에 일종의 ‘맛보기’식으로 두 분의 케미를 시청자분들께 보여 드릴 예정이라서요.”

“<역린>이 TVX로 편성이 났습니까?”

“하하. 그건…… 아직 비밀입니다.”

이준이 놀라 묻자 박 PD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대놓고 말해 줬구만, 뭘.’

속으로 실소를 삼킨 그는 “어때요? 드라마 시작 전 환기용으로 꽤 괜찮지 않을까요?” 하고 눈을 반짝이는 박 PD와 “해. 이건 해야 해!”라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정후를 차례로 응시했다.

‘닷새 촬영에 드라마 홍보 용이면 그리 나쁘진 않아.’

이준은 마지막으로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쳐다보고 있는 승효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하지만 구승효와 닷새간 연속 촬영이라니.’

이준이 아이돌 가수에서 배우로 전향한 지 십 년이 넘었다.

당시 다른 아이돌보다 방송 출연 빈도가 높고, 많은 예능에 출연하기는 했으나 배우가 된 이후로는 예능이라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

아주 근근이 출연하는 예능도 연예 뉴스 소식의 짧은 코너뿐이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역린>의 황 감독님도 이번 프로그램 기획안을 미리 보셨습니다. 정극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 분이 미리 합을 맞춰 볼 수 있는 기회일 거라고 매우 좋아하시더군요!”

“정말입니까? 우리 황 감독님이 그런 소리를 하셨다고요?”

“실은 황 감독님이 제 직속 대학 선배시거든요. 얼마 전 뵈었을 때 한번 여쭤봤죠. 제가 먼저 두 분 케미를 확인해 봐도 될지 말입니다.”

“이야, 그런 인연까지 있었다니. 확인하고 말 게 뭐 있습니까? 시청자들한테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고, 또 여기 있는 우리 배우들한테는 좋은 기횐데요. 안 그래?”

어느새 박 PD의 화술에 넘어간 이정후 대표가 이준의 답을 종용했다.

이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선배님.”

그때였다.

선뜻 출연을 결정하기 망설이는 이준을, 승효가 불렀다.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하자 승효는 물었다.

“선배님께선 저와 같은 예능에 나오는 게 싫으십니까?”

“웁!”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물을 마시려던 이준이 그 질문에 목을 컥컥거렸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

눈물이 찔끔 나려는 것을 꾹 참고선 이준이 손을 휘이- 젓자, 승효는 쓴웃음을 흘렸다.

‘깜짝 놀랐네.’

둘만 남았을 때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런 질문을 하다니.

승효를 살짝 노려보던 이준은 곧 씩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왜 승효 씨랑 동반 출연을 싫어하겠어. 그럴 리 없지. 하하.”

“정말이세요?”

“그럼. 단지 예능 출연이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또…….”

구승효 너랑 단둘이 나온다니 왠지 긴장돼서.

이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다음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그럼 됐네요.”

“응?”

“저도 줄곧 인터뷰만 해 와서 고정 예능 출연은 처음이나 다름없는데, 선배님이랑 함께라면 잘할 것 같습니다. 박 PD님 말씀대로 <역린> 크랭크인 전, 합을 맞추는 것도 꽤 도움이 될 듯하고요.”

이어 승효는 웃으며 말했다.

“기대되네요. 선배님과의 협업.”

* * *

[단독] 차휘&구승효, 클레몽 ENT의 얼굴들, 여행 예능으로 뭉쳐!

이준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가 무섭게 그날 밤 포털 사이트의 연예란에 메인 기사가 하나 등장했다.

[종합] 선한 영향력 차휘, 폭풍의 구승효의 조합은 과연?

TVX 새 예능 <함께 가자!>의 두 주역, 차휘와 구승효 컨펌!

미리 만나는 <역린>의 주역들…… 구승효와 차휘의 여행 예능 <함께 가자!>는?

차휘, 11년 만의 예능 출연 확정…… TVX 예능 <함께 가자!>

“하하.”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이준은 제 앞에 놓인 커다란 배낭과 며칠 분의 옷이 담겨 있는 캐리어를 멍하니 응시했다.

‘어쩌자고 예능 출연을 허락한 거냐…….’

그는 태생적으로 아웃도어파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도어를 즐기는 유형이었다.

정확하게는 집 안에 박힌 생활을 선호하는 유형이다.

아니. 이쯤 되면 단순한 인도어파라고 해야 하는 건가.

‘집 밖이 얼마나 위험한데.’

평범한 사람도 집 밖을 나가는 것을 싫어하는데, ‘보이는’ 차이준은 오죽할까.

도심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넘쳐나는 것이 바로 비생이라는 것들이다.

특히 깊은 산과 들에는 그들의 출현 빈도가 더욱 잦아진다.

‘이게 다 정후 형 때문이야.’

이준은 제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이번 예능 출연을 몰아붙인 클레몽 엔터테인먼트의 이정후 대표의 말을 떠올렸다.

[준아. 잘 생각해 봐.]

당시 이정후 대표는 말했었다.

[요즘 네가 얼마나 곤란했냐? 내가 네 행적을 되돌아봤는데, 아무래도 너와 시청자들 사이엔 허물 수 없는 벽이 하나 존재하는 것 같아.]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왜, 부득이한 네 사정 때문에 우리가 한동안 신비주의를 고수했잖냐. 그런데 이게, 어쩌면 억측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는 거지.]

[…….]

[요새 벌어졌던 사건들만 봐도 그래. 네가 드라마나 영화 출연은 잦지만, 그래도 ‘미스틱’ 시절 이후로는 시청자들한테 네 본 모습을 보여 준 적은 없잖아.]

[……듣고 있어.]

[그래서 대중들은 네가 어떤 인물인 줄 모르고, 보이는 것으로 비판하고 비난한 거지. 만약 네가 어떤 인물인지 좀 알려졌어 봐, 이렇게까지 일이 커졌겠어?]

[…….]

[이번 예능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일정이 조금 급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승효 씨도 동반 출연하니 왠지 느낌도 좋고. 좋게 좋은 거라고, 이왕 확정 지은 거 휴식이라 생각하고 다녀오면 되지! 안 그래?]

‘말은 번지르르하지, 매번.’

이 대표의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얼떨결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도 혹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뇌하던 이준 역시, 결국은 받아들인 거고.

그런데.

“이렇게 당장 출발한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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