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남굴(南窟) (3)
“내, 내가 라면을 좀 좋아해!”
의심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승효에게 이준은 변명이라도 하듯 외쳤다.
그러자 어느덧 의구심을 지워 낸 듯 웃음 지으며 승효가 대답했다.
“선배님께서 라면을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은 즐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하, 하하. 헬스 잡지 봤구나? 승효 씨도 알다시피 그거 다 보여 주기식 인터뷰야.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바로 인스턴트인걸! 빠르고 간편하고, 좋잖아?”
사실은 반대다.
이준이 가장 싫어하는 건 바로 인스턴트 식품이다.
[입에 안 맞아. 몸에 안 좋기도 하고, 피부도 안 좋아진다고.]
실제 인터뷰에서는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은근하게 불쾌감을 드러냈었기에 이준은 데뷔 이후로 인스턴트 식품 CF는 맡지 않았었다.
승효는 하하하, 웃고만 있는 이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그럼 지금 하나 드실래요?”
“……응?”
“마침 저도 출출하기도 해서요. 선배님 것도 같이 끓여 드릴까 해요.”
“어, 어어! 좋지! 좋아! 무, 물은 많이 부탁해!”
“적게……가 아니라요?”
젠장할.
“어, 물 양은 승효 씨한테 맡기지, 뭐. 하하, 여기서 기다리면 되지?”
홱 몸을 돌려 순식간에 부엌 의자에 앉은 이준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승효가 피식 웃으며 라면 박스에서 라면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준은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제게 말을 한 뒤 팔을 걷어붙이는 승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쏴아아―.
평소 이준과 승효의 식사는 매일 방문하는 가사 도우미 여사님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준은 애초에 야식을 먹지 않는 편이었고, 승효도 굳이 야식을 챙겨 먹는 성격은 아닌 듯했기에 정해진 식사 시간 외, 두 사람이 늦은 밤 야식을 먹는 건 처음이다.
‘…….’
이준은 냄비에 물을 받고 있는 승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팔근육이 상당하네.’
요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라면을 끓이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승효의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언뜻 드러나는 게 아주 마음에 들……. 잠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심코 그 근육의 미세한 변화들을 지켜보던 이준은 흠칫 놀랐다.
‘그 정도 근육은 나도 있잖아!’
승효가 체격은 저보다 컸지만, 이준 역시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고작 구승효의 팔근육 따위에 감탄하면 곤란하지.
이준은 입을 삐죽이며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그러나 이번엔 그런 승효의 손길에 이끌려 그의 품에 안겼던 제 모습이 생각났다.
다정하게 묻는 그의 얼굴을 황망히 바라봤던 제 모습 역시.
두근두근두근두근―!
순간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목이 말라와 연거푸 물을 들이켜도 이 갈증은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는다.
미쳤군.
‘네가 진짜 미쳤구나, 차이준.’
아무리 함께 지내면서 매일 입술 맞부딪히고 산다고 해도 그렇지, 너보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한테 이렇게 동요하는 거야?
이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이상하게 승효의 페이스에 말려 가는 기분이 든다.
[오라버니, 혹시……]
다시금 강주의 음성이 떠올랐다.
이준은 질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선배님, 계십니까?”
야밤에 먹은 라면은 얼굴을 퉁퉁 붓게 만드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른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팩을 하고 있던 이준의 귀로 승효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응. 들어와.”
승낙의 답변을 하기가 무섭게 달칵 열리는 문 사이로 승효가 들어왔다.
두근.
막 샤워를 끝낸 건지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제게 다가오고 있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이준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눈은 왜 이리도 반짝이는 거야?
‘무슨 별을 박아 놓은 것도 아니고……!’
멍하니 승효가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준이 흠칫 놀랐다.
“선배님?”
침대에 앉아 있던 이준이 갑자기 휘휘 고개를 젓자 승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아니야. 버, 벌레가 날아다녀서. 그것보다 왜 왔어?”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이준이 애써 태연한 척하자 승효는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약속 시간이지 않습니까.”
“약속? 무슨 약…… 아.”
되묻던 이준의 목이 막혔다.
정말이지 황당하기 그지없는 ‘영기 주입 의식’은 보통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일어난다.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오전 7시나 8시 사이.
어째서 승효가 아침부터 제 방문을 두드린 건지 이해한 이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주변의 의자를 가리켰다.
“그, 그랬지. 지금이지. 그래, 거기…… 거기 앉아.”
승효가 평소와는 달리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이준을 알아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준은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정신 바짝 붙들어 매, 차이준. 너 아직 인정한 거 아니야.’
이 녀석한테 흔들리는 건, 이런 의식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건 그저 동료애지, 그 이상의 감정은 아니라고.’
그래.
백 보 양보하여 근래 이준이 구승효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한 것은 인정한다.
굳이 따지자면 ‘괜찮은 녀석’ 정도로 인식이 변했고, 나름 ‘좋아하는 사람들’ 안에 들 정도로 호감을 가지게 된 것 역시도.
하지만 이준은 그 이상의 감정을 승효에게 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승효와는 가족의 명운을 건 ‘계약’으로 얽매인 사이이니 더욱더.
이준은 “그럼 시작할까요?”하고 제게 묻는 승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1초.
2초…….
이준은 눈을 감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승효는 조금 전 이준이 가리킨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해? 안 와?”
실눈을 뜬 이준이 의아해하며 묻자 승효가 쿡쿡 웃더니 이준의 얼굴을 가리켰다.
“팩한 상태로 하시려고요?”
그 말에 전신 거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이준은 자신이 마스크팩을 붙인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얼굴 전반을 뒤덮은 팩을 벗겨 낸 이준은 입을 삐죽이며 승효에게 다가갔다.
“나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제가 들어올 때부터요.”
“진작 좀 말하지.”
승효가 투덜거리는 이준을 올려다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으응…….” 하고 무심결에 대꾸하게 된 이준은 커다란 손으로 제 뺨을 부드럽게 감싸는 승효를 올려다봤다.
두근.
겨우 가라앉힌 가슴이 다시금 뛰었다. 이준은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킨 후 눈꺼풀을 내리지 않았다.
‘입술이 참……’
도톰하네.
‘홍채 색이 옅어.’
갈색보다 더 밝은 편이고.
‘왼쪽 눈 밑에는 점이 있군.’
시선 처리가 자연스러워서, 감독들이 노리는 이유를 알겠어.
‘코도 오뚝하고.’
나만큼이나 예쁜 코네.
‘숨결도…….’
달콤한데.
“……선배님.”
코앞으로 다가온 승효의 얼굴을 보고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으응.”
승효의 물음에 멍하니 답하는 이준을 보고 승효가 눈꼬리를 휘었다.
“오늘 왜 이리 긴장하셨어요?”
“어?”
“아니, 아까부터 숨을 제대로 안 쉬시던, 윽!”
이준은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 팔을 뻗었다.
이준의 얼굴을 잡고 속삭이던 승효가 갑작스러운 이준의 손길에 뒤로 밀려 나갔다.
“선배님?”
이준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오, 오늘은 저녁에 하자. 방금 일어났더니 집중이 안 돼.”
“네?”
― Rrrr. Rrrr.
심장이 크게 뛰어 일부러 몸을 돌린 이준의 핸드폰에서 때마침 열심히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경이었다.
이준은 승효를 뒤로한 채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배우님, 기사 보셨어요?
“무슨 기사?”
다급한 태경의 외침에 이준은 인상을 썼다.
― 그럴 줄 알았어요. 이러고 계시지 말고 얼른 기사 보세요! 포털 사이트 열면 연예란에서 바로 보이는 기사예요.
“뭐?”
― 기사 읽으신 이후엔 곧장 구 배우님이랑 같이 회사로 오시고요! 오늘 미팅 있는 거 아시죠? 두 분, 꼭 같이 오셔야 해요!
* * *
[제보] 어제 자 빛나는 차 스타 근황.jpg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웬 글이 올라왔다.
흔히들 [잡담]이나 [유머] 말머리가 아닌 [제보]라는 말머리를 단 글은 순식간에 화제가 되어 많은 사이트로 옮겨졌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안녕하세요.
가입하자마자 올리는 글이 존댓말이라 죄송하지만, 저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콩닥거려 참을 수가 없어서요.
저에게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십니다.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도 없이 저를 길러 주신 너무나도 감사한 분이지요.
얼마 전, 저는 할아버지께서 자꾸만 기억을 잃으시는 것을 대비하여 핸드폰을 하나 장만해 드렸고, 심심할 때마다 제게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런 오늘, 할아버지께서 제게 웬 사진이 담긴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문자 속에는 현재 제가 좋아하는 구승효 배우의 입간판 앞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한 남자 배우의 사진이 여러 장 들어 있었어요.
안녕하세요. 손녀분의 할아버님과 사진을 찍게 된 사람입니다. 할아버님께서 저를 다른 분으로 착각한 것 같지만, 굳이 할아버님께 알리진 않으셨으면 해요. 손녀분께서 저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할아버님께 감사를 표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럼 무척이나 영광일 것 같습니다.
참. 이 문자는 바로 할아버님 핸드폰에서 삭제하겠습니다. 비밀 엄수, 아시죠?
라는 문자와 함께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니, 오늘 사진 속 배우님을 우연히 길에서 보게 된 저희 할아버지가 입간판 속의 배우님과 사진 속 배우님을 착각하고 함께 촬영을 부탁한 거였어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오해한 할아버지의 말씀이 불쾌할 만도 한데,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오랫동안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어 주신 이후로도 사람들이 몰려와 배우님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더군요.
차휘 배우님, 감사합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저희 할아버지께도, 저에게도 무척이나 좋은 추억이 되었어요.
직접 뵙지는 못하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서라도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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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혹시 몰라 보내 주신 문자와 사진도 인증해 봅니다.
(사진)
-그날 이후 차휘 배우님의 열성팬이 되어 버린 한 20대 여성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