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52화 (53/72)

52화

남굴(南窟) (1)

“백호도 실패했군.”

붉은 액체로 가득 찬 와인잔을 원을 그리듯 돌리며 누군가가 말했다.

잔 안에서 일렁이는 액체의 표면을 말없이 응시하던 남자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뭐…… 예상했던 바지.”

고작 그 정도로 무너질 거라면 그 또한 금세 흥미가 떨어졌을 테니까.

짐승의 핏빛만큼이나 붉은 액체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동공이 시리도록 차갑게 일렁였다.

곧 그는 무심한 시선으로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근처에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지끈!

무언가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아악.

살려 줘!

아파, 아파!

그의 발이 바닥과 닿을 때마다 귀를 찌르는 듯한 비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비명은 남자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됐다.

그 밤이 걷히기까지, 계속.

* * *

“곧 차 팀장님이 도착하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준은 제게 공손히 인사한 뒤 저를 두고 밖으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은 후 주위를 둘러보던 이준의 시야로 ‘서울 본부 차강주 팀장’이라는 명패가 들어왔다.

서울시 종로구 도화동의 한 대형 빌딩.

서쪽으론 종묘가 보이고 북쪽으론 창경궁과 창덕궁이 보이는 이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대형 로펌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실상 이곳이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곳이 아니라 대한민국 내 존재하는 견자들을 보호하고 대변하는 ‘전국 견자 협회’, 즉 전견협의 본부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 노인네가 돈을 꽤 쓰기는 했지.’

전견협을 이끄는 이준의 조부, 차태모 회장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견자를 걱정했고, 그들이 제대로 된 일상생활이라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하여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로펌을 가장하며 세운 곳이 바로 이 건물, 위한 빌딩이다.

오전 회의로 인해 잠시 자리를 비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각.

종묘를 내려다보기 위해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 있던 이준은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아침 햇살을 맞고 있다 크게 하품을 했다.

[가출한 특급 비생을 인도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오늘 시간이 된다면 제가 있는 곳으로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눈을 뜨자마자 강주의 전화를 받고 곧장 집에서 전견협 본부로 오기는 했지만, 자꾸만 내려앉는 노곤함을 떨칠 수가 없다.

‘빌어먹을.’

어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후유증이 곧바로 나타난다.

이준은 끊이질 않는 하품을 계속해서 흘려 대며 인상을 썼다.

그러다 문득, 저를 향한 뜨거운 눈빛이 떠올랐다.

[선배님을 지킬 수 없다면, 제가 선배님 곁에 있는 것이 의미 있을까요?]

[선배님이 다칠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이준을 향해 주저 없는 시선을 쏘아 대며 말하던 남자에게선 일종의 의지까지 느껴졌다.

어찌나 뜨거운 눈빛인지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이준의 얼굴이 녹아내릴 정도였다.

‘윽…….’

아직도 그 잔상이 남아 있네.

이준은 저를 향해 낯간지러운 말을 뱉어 내던 승효를 떠올리다 입술을 삐죽였다.

간밤에 이준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던 이유는, 눈만 감으면 구승효가 흘린 말과 거두지 않던 눈빛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휙휙.

이준은 생생하다 못해 선명하기까지 한 승효의 말을 애써 지우려 노력하며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니. 오라버니!”

도통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구승효에 대한 원망마저 일려 할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헉!”

놀란 이준이 비명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강주가 보였다.

검은 슈트 차림의 강주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이준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어, 어어. 가, 강주구나. 언제…… 언제 왔니?”

비생에 홀린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강주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자, “괜찮으세요?” 하는 물음이 들려왔다.

“괜찮지. 괜찮고말고. 이, 일단 앉을까?”

마치 이곳이 자신의 사무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창가에 서 있던 이준이 강주를 소파 쪽으로 안내하자, 강주 역시 따랐다.

상석에 앉은 강주의 근처에 자리를 잡은 그는 이틀 전, 이준과 승효의 ‘동거 집’ 근처에서 일어난 백호 비생 습격 사건에 대해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잠잠히 이준의 말을 듣고 있던 강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된 거군요. 그럼, 사건 이후 현 선생과는 따로 연락하신 적이 있습니까?”

“현 선생?”

어리둥절한 이준의 물음에 강주는 답했다.

“오라버니께서 만나신 삼족구 일족의 수장의 성입니다. 이름은 알려진 바 없지만, ‘현 선생’이라고 불리고 있죠.”

설마 검을 현(玄)자를 쓰는 건 아니겠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던 삼족구 비생의 모습을 떠올리던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때 이후로는 못 만났어. 연락처를 받기는 했지만 연락해 본 적은 없고.”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백수호 그 자식, 이제 인간들을 괴롭히지 못하는 거 맞지?”

의심을 담은 이준의 물음에 강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현 선생이 그를 데려갔으니 잠잠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미묘한 미소였지만 이준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긴. 무시무시한 존재였으니까.’

주변에 이준과 승효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족구 비생은 백호 비생을 향해 뜨거운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당혹스러운지 이준은 차마 정면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당사자인 백수호는 어땠는가.

과연 이준에게 날을 세우던 특급 비생이 맞기는 한 건지,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며 엉엉 울어 버리는 그는 꼭 아이 같았다.

이준은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여하튼, 백수호가 협회에 정식 등록된 비생이라면 굳이 퇴치할 필요는 없지. 네 말대로 ‘보호자’의 인도를 받는 상황이라면 말이야.”

견자는 타락한 비생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고, 길 잃은 비생을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

백수호가 비록 사악한 짓을 저지르려 하였으나, 그는 쉽게 퇴치하기 힘든 특급 비생이니 정식으로 맞붙었다면 이준은 물론 승효까지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이준이 백수호의 가출을 전해 듣고 그를 ‘보호자’에게 인도하기로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것보다 전 오라버니가 걱정입니다.”

말 안 듣는 백호 비생을 삼족구 비생에게 맡겨도 되는 건가― 하는 근본적 의심이 들려 할 때였다.

이준은 강주의 말에 그녀를 응시했다.

강주는 평소보다 굳은 얼굴로 이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오라버니의 근처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요.”

고심하다 뱉어 낸 강주의 말에 이준은 몸을 움찔거렸다.

“오라버니도 아시다시피 한반도 내 특급 비생의 출현은 잦지 않습니다. 근래 가장 가까운 출현이…… 16년 전이었으니까요.”

16년 전이라는 표현이 그의 심기를 자극했다.

이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확인한 강주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백호 비생도 그렇고, 요즘 들어 특급 비생에 버금가는 비생들의 출현이 유독 많아지고 있어요. 게다가 그들의 출현 이후로 오라버니의 평판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제가 오라버니의 주변을 지키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강주 역시 세현과의 일을 염두에 둔 것이 틀림없다.

이준은 쓴웃음을 흘리며 강주를 바라봤다.

“강주 네가 이 오빠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내 일에 대해선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오라버니.”

이준은 손을 들었다.

“그런 유의 루머는 곧 가라앉게 되어 있어. 평판이 흔들리는 건 일시적인 거고. 나 일 끊긴 거 아니니 걱정 마.”

그는 단호히 말을 이었다.

“강주야. 나 말이야, 십 년을 넘게 이 길을 걸었어. 견자인 너만큼이나 나도 여기선 프로라고. 내가 여기서 쌓은 경력이 얼만데, 그리 쉽게 무너질 것 같아?”

이준이 씩 웃으며 그녀의 걱정을 덜어 주려 했으나, 강주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하면 안심하려나.

고민하던 이준이 덧붙였다.

“게다가…… 나한테는 구승효도 있잖아.”

강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 생각했던 것보다 같이 있으면 도움이 돼. 이미……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고. 비생 문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니까 배우는 것도 있고, 또…….”

응?

길지는 않지만, 승효와 혼인 의식을 치른 후 함께 지내는 몇 주 동안 겪은 일에 대해 말하려던 이준은 멈칫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염려하던 강주의 눈빛이 어느새 다정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준은 확연한 그 변화에 멈칫했다.

“왜 그렇게 봐?”

그러자 강주가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오라버니의 이런 모습은 생소해서요.”

“생소하다고?”

강주는 웃었다.

“네. 오라버니께서 누군가를, 특히나 구가의 가주님을 칭찬하시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오라버니께선 구가의 가주님을 싫어하는 게 아니셨습니까?”

“어?”

날카로운 강주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오라버니, 혹시…….”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

이준은 벌떡 일어났다.

“누, 누가 누굴 좋아해! 안 좋아해!”

“네?”

강주가 당황하는 이준을 보며 어리둥절한 눈빛을 띠었다. 이준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어쨌든 난 보고 마쳤으니 이만 간다. 수고해.”

“오라버니?”

이준은 당황해하는 강주에게서 얼른 몸을 돌리더니 순식간에 문을 열고 팀장실을 나섰다.

똑똑―.

“들어오세요.”

“팀장님, 차 배우님은 그냥 저렇게 가신 거예요?”

강주의 명에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의 비서가 손에 가득한 사인지를 든 채 아쉬운 듯 말했다.

강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사인받아 달라고 부탁받았는데…….” 하고 한숨을 내쉬던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저리 급히 나가신 거예요? 얼굴도 엄청 붉으시던데,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

“너무 건강해서 그래요.”

강주가 말을 이었다.

“카메라 앞에선 아니지만, 우리 앞에선 감정을 잘 못 숨기는 편이거든.”

“…….”

“참, 사인 부탁받았다고 했죠? 저한테 주세요. 다음에 말해 둘게요.”

“아, 넵! 감사합니다, 팀장님!”

강주는 비서로부터 건네받은 사인지를 책상 위에 올려 둔 후 이준이 나가 버린 문 쪽을 힐끔거렸다.

‘이런 일엔 언제나, 솔직하지 못하지.’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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