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백호(白狐) (14)
<백 기자님, 차휘입니다.>
슬슬 연락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던 시점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수호는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드디어.’
며칠 전, 평탄하던 차휘의 연예계 생활에 파문을 일으켰던 수호는 그를 구제해 주는 대신 차휘와 협력을 맺었다.
<오늘 승효에 대한 특종을 드릴 테니, 상황을 보고 알아서 기자님이 처리해 주세요. 주소는 아래 따로 첨부합니다.>
수호가 제공한 다른 사진들로 자신의 루머가 오해로 비롯되었다는 걸 증명한 차휘가 그들의 거래를 깨고 설마 잠적할까 내심 걱정하던 차였는데.
‘약속은 지키는 인간이군.’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존심까지는 버리지 않으려 애쓰던 차휘의 고고한 얼굴을 떠올리며, 수호는 실소를 터트렸다.
‘뭐, 그래 봤자 같은 배를 탄 건 마찬가지지만.’
코웃음을 친 수호는 문자 속의 주소를 응시했다.
‘여긴 경비가 꽤 삼엄한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한강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주소를 머릿속에 되뇌던 수호는 다음 문구를 읽어 내려갔다.
차휘의 말을 빌리자면, 수호의 출입은 그가 미리 말해 둘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구였다.
<계시는 장소를 미리 말씀해 주시면, 그쪽으로 유도하겠습니다.>
백지가 검게 물드는 건 순식간이다.
인간이 고작 몇 번의 고통을 겪더니 이리 달라질 수 있나 새삼 감탄하던 수호는 차휘가 말해 준 주소로 갔다. 그리고 자신이 은신하고 있던 장소를 알려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깐만. 기다려, 승효 씨.”
어느새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 카메라만을 든 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오호!’
수호는 제 귀를 울리는 근사한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큰 키의 두 남자가 지하 주차장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전 선배님과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있다고. 잠깐 따라와.”
구승효와 말다툼을 하는 건지, 실랑이를 벌이던 차휘는 수호가 있는 쪽으로 그를 데려왔다.
수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승효에 대한 특종을 드릴 테니, 상황을 보고 알아서 기자님이 처리해 주세요.]
미리 자신이 숨어 있는 장소를 알려 주었기에 차휘가 수호의 프레임 안으로 구승효를 데려왔다.
‘각은 괜찮겠는걸?’
연신 씰룩이는 입가를 주체하지 못하던 수호는 대체 그의 협력자가 어떤 방법으로 특종을 안겨 줄 것인지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셔터를 누를 준비를 하며 두 사람을 카메라 프레임 안에 담았다.
“선배님, 여기서 이러지 마……!”
헉.
이 업계에서 먹고살 만해진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타고난 능력 덕분에 나름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수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게 뭐야…….’
백수호는 제 앞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입맞춤에 크게 당황했다.
처음엔 거부하듯 인상을 찌푸리던 구승효가 어느 순간부터 팔을 뻗어 차휘의 뒷머리를 감싸자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찌, 찍자. 찍어야 해.’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인해 벌렁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백수호는 곧 냉정하게 카메라를 들어 올려 프레임 속에 들어온 두 남자를 찍어 댔다.
찰칵-.
찰칵, 찰칵.
프레임 속에선 차휘의 뒷모습과 구승효의 앞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주변의 분위기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헤테로가 아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봄처럼 청명한 이미지의 차휘와 얼음장같이 차가운 이미지의 구승효는 이렇다 할 구설수가 없었다.
특히 차휘의 경우에는 10년 넘게 연예계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애설 한 번이 안 나는 걸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흐음.’
연사 촬영을 한 이후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던 수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거 하나만 엮기는 아쉬운데.’
본래라면 구승효의 의심스러운 과거를 팔 생각이었으나, 차휘까지 엮게 된 이상 두 사람 모두를 이용하는 것이 가치 있었다.
특히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목돈을 마련해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더욱더.
‘이건 뭐지?’
수호는 차휘의 귀에서 반짝이는 보랏빛 귀걸이를 발견하고선 고개를 갸웃거리다 생각했다.
‘어쨌든 차휘 씨, 이거 미안하게 됐네요. 그러게,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왜 하필 기자를 믿냐고.’
거만한 차휘에게 병 주고 약을 줬으니 이제 다시 병을 줄 차례이긴 하다.
결심한 수호가 장비를 정리하고 슬슬 돌아가려던 시점이다.
“<박(縛)>!”
어디선가 불어온 붉은 연기가 돌연 수호의 몸을 감쌌다.
‘으윽!’
순간적으로 방심하고 있던 수호의 발은 갑자기 나타난 굵은 쇠사슬로 인해 꽁꽁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이게…….’
이게 대체!
툭.
수호가 쥐고 있던 카메라가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이 불길한 쇠사슬이 무엇인지는 단번에 알아차렸으나, 대체 어디에 견자가 있었지?
틀림없이 견자들의 시선을 피하며 그들과는 거리를 두었는데. 대체 어떻게!
‘언제부터 날 보고 있었던 거야?’
설마…….
‘설마 그 녀석인가?’
수호는 바르르 떨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스윽 제 앞에 나타난 두 명의 남자들을 발견하고선 눈을 크게 떴다.
“다, 당신들……!”
발목은 물론, 온몸이 꽁꽁 묶인 수호가 외쳤다. 그러자 그의 시야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머리와 갈색 머리의 남자 중 검은 머리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가 역시였네요, 백 기자님.”
차휘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제 옆에 서 있는 갈색 눈의 구승효를 향해 수호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승효 씨, 소개할게. 여긴 ‘굿모닝스타’의 간판이자 연예인 파파라치를 담당하는 우리 백수호 기자님. 그리고…….”
차휘의 입에서 다시 한번 강렬한 외침이 쏟아졌다.
“천지신명의 약속 아래 맺은 영혼의 계약을 이행하니, 원신을 드러내라! <천(闡)>!”
붉고 커다란 연기가 꽁꽁 묶인 수호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캬아앙!
얼마 뒤 분명 백수호가 서 있던 곳에, 탐스러운 아홉 개의 꼬리를 펄럭이고 있는 커다란 여우가 붉은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휘는 그르릉대는 백호, 흰여우를 응시하며 구승효에게 말을 이었다.
“요즘 보기 드문 특급 비생인 백호(白狐) 비생이야.”
* * *
“이건 저번의 그 종이 인형 부적이 아닙니까.”
이준은 지난 며칠 동안 제 품에 지니고 있었던 종이 인형 부적을 결국 승효에게 내밀었다.
그 부적을 본 승효가 놀라 묻자 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같은 것이긴 한데, 나온 곳은 달라. 이건 내 몸에 붙어 있던 게 아니거든.”
승효는 이준의 말에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준이 백수호 기자와 만났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종이 부적 인형의 출처에 대해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승효 씨, 내가 박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시비가 붙은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긴, 모를 리 만무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백수호와의 악연이 시작됐고, 이준은 졸지에 ‘후배 폭행범’으로 몰리게 되었으니까.
지금이야 백수호가 다른 각도의 사진들을 건네줘서 이준은 그 논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나, 당시 겪은 고통은 상당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이 부적, 그때 발견했어.”
“예?”
승효가 놀라 되물었다.
이준은 이해했다.
“명우 씨한테 시비를 걸던 남자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었지. 보통의 경우라면 안정시키려는 사람한테 그리 날 선 반응을 보일 리 없거든.”
하지만 그날따라 이준과 명우에게 불쾌감을 드러내던 남자의 태도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흥분하며 이준과 명우는 물론, 자신의 일행인 여자 친구에게까지 팔을 뻗으려 했다.
“그 남자의 어깻죽지 뒷부분에서 이 조각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 도통 감이 안 오네.”
이준은 몸을 파르르 떨며 말했었다.
“선배님 말씀은, 이 부적을 사용한 이가 당시 그곳에 있었다는 거군요.”
“정확해. 아니면 적어도 그 남자를 만났던 거겠지.”
“…….”
“당시 그곳에 있던 사람은 당사자인 나와 명우 씨, 그리고 그 두 연인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어.”
이준의 유도에 승효가 입을 열었다.
“백수호 기자.”
“맞아.”
승효로부터 예상한 답변이 들려오자 이준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강주한테 부탁해서 백 기자에 대해 조금 알아봤는데…… 생각 이상의 단서를 얻었지 뭐야.”
이준의 눈이 휘어졌다.
《네놈들! 네놈들……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당장…… 당장 이걸 풀지 못해?》
캬아악!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던 커다란 흰여우가 소리쳤다.
이준은 자신의 언령을 비롯하여 승효의 결박술에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원신을 드러낸 백호 비생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기자님, 아직도 우리가 뭐 하는 놈들인지 모르면 너무 눈치가 없는 거 아닙니까?”
《뭐, 뭐라고?》
백색 털의 아홉 꼬리가 구름처럼 넘실거렸다.
만약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였다’면 사진을 찍히는 건 이준과 승효 쪽이 아니라 흰여우 비생 쪽이 되겠지.
《빌어먹을 견자 놈들…… 쳐 죽일 견자 놈드을! 용서 못 한다. 용서…… 못 해!》
그때였다.
이준과 승효의 술법에 묶여 있던 흰여우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툭―.
그리고.
흰여우를 묶고 있던 굵은 쇠사슬이 끊어졌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