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47화 (48/72)

47화

백호(白狐) (12)

― 차휘 씨,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고 있었어요?

며칠 전의 일이다.

강남의 복합 건물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한창 고역을 겪던 이준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백수호로부터 원본 사진이 담긴 USB를 건네받기 전이었기에, 그 전화의 발신인을 본 순간 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구설수에 휘말린 이준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내년 방영 예정인 드라마 <역린>의 황규호 감독이었다.

‘설마.’

그간 연락 한번 없던 황 감독이 이준의 이름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걸어오자 돌연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춘 이준의 반응에 황 감독으로부터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왜 그리 긴장하고 그래요? 차휘 씨답지 않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감독님은…… 모르시는 겁니까?”

― 응? 뭘 몰라?

되묻는 그에게 “요즘 저 때문에 시끄럽지 않습니까.”라고 답하자 그제야 이준의 태도 변화에 웃음을 터트린 황 감독이 다시 말했다.

― 차휘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여리네요. 아니면 한 번도 구설수에 휘말린 적이 없어서 그런가?

“…….”

― 걱정 마요. 고작 그런 루머에 캐스팅 취소할 것 같았으면 미리 컨택도 안 했어요.

“아…….”

― 게다가 차휘 씨는, 본인이 그런 루머에도 입지가 굳건한 줄 잘 모르나 봐? 여하튼 오늘 내가 연락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무슨 일로…….”

― 왜, 내가 저번에 말한 거 있죠? 상대역 캐스팅이 확정되면 미팅 한번 잡을 거라고. 혹시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어때요? 주연 배우랑 작감끼리 합쳐서 미니 상견례를 할까 하는데 말이죠. 괜찮아요?

당시엔 백수호로부터 USB를 받지 않은 상태였다.

하여 이준이 찍힌 사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상황이었다는 걸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차기작을 준비하는 감독 쪽에서 소란스러운 배우를 하차시킬 거라 여긴 이준은 안심했다.

“그럼요, 당연히 나가야죠. 어디로 가면 될까요?”

“차휘 씨, 이쪽입니다.”

약속의 금요일이 되었다.

다행히 어제, 클레몽 엔터테인먼트에서 백 기자에게 빼앗은 USB를 토대로 공식 입장 발표를 했고 그 덕분에 들끓던 여론은 조금의 안정을 찾은 상태였다.

그 덕분에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결 누그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이준은 자신을 안내하는 종업원의 뒤를 따르다 닫혀 있는 문 앞에 섰다.

‘액땜 한번 거하게 하는군.’

차기작을 들어가기 전 이렇게 시끄러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 들어 부업에 너무 집중했었군. 정신 차려야겠어.’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아마 이런 사건에 엮이려는 행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준은 후우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닫힌 문을 열려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늦……!”

마음을 가다듬은 후 약속 장소로 들어가던 이준의 눈이 방 안의 인물을 발견한 순간 큼지막해졌다.

‘구승효가 왜 여기 있어?’

* * *

[하하하! 아까도 말했지만, 두 사람 케미가 정말 좋네. 얼마 전 기사에서도 느꼈는데 같이 앉혀 두니 더 그래요. 한 프레임 안에 더 있으면 조명 안 써도 후광이 비치겠는걸?]

황규호 감독은 타고난 아첨꾼이었다.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예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필수적인지라, 어쩌면 당연한 이유였겠지만 그 말이 왜 이리 따가운 건지.

[하루라도 빨리 촬영 들어가고 싶네. 조만간 크랭크인 할 것 같으니까 다들 준비 좀 해 줘요. 이왕이면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모습을 언론에 살짝 흘려도 괜찮겠어. 안 그래, 최 작가?]

[그러네요. 일단 먼저 미끼를 던지는 거죠. 호호호!]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드라마 <역린>의 제작 팀원들은 연신 웃음을 흘려 댔다.

이준은 그런 그들을 향해 웃으면서도, 제가 제대로 웃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두 분이 이미 친분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에요. 일단 대본 리딩부터 해 봐야 알겠지만, 합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기대되고요. 앞으로 같이 찍는 신이 많을 텐데, 어색하면 곤란하잖아요. 안 그래요?]

[하긴. 차휘 씨랑 승효 씨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며? 그래서인지 두 사람에게 풍기는 케미가 남다른 건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팀은 두 사람한테 거는 기대가 아주 커!]

<역린> 팀의 작가와 감독, 그리고 제작팀원들은 나란히 앉아 생글대고 있는 이준과 승효 두 남자를 바라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쏟아 냈다.

그러한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반박 한 번 할 수 없는 제 자신이 눈물겹다고, 이준은 생각했다.

게다가 더 화가 나는 건, 제 옆에 앉아 옅은 미소만 지은 채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승효의 모습이다.

‘무슨 인형도 아니고.’

구승효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태연했다.

불과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이준에게 화가 났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은 승효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뭐?

[제가 출연을 결심하게 된 건 전부 차휘 선배님 때문입니다. 선배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죠.]

[캐스팅을 제안해 주신 감독님과 작가님께 감사드려요. 선배님, 우리 잘해 봐요.]

‘미쳐 버리겠군.’

숨이 컥 차오른다.

대체 미니 상견례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상견례는 끝나 있었고, 그는 <역린> 제작팀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였다.

“흐음.”

흐린 제 마음과는 다르게 오늘따라 청명하기 그지없는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이준은 미간을 좁혔다.

‘같은 지붕 아래 지내는 것도 충분히 고통인데, 이제는 촬영장에서까지 붙어 있어야 한다고?’

그것도 하필 상대역이라니.

‘차라리…… 이제라도 하차한다고 할까?’

이준은 아주 잠깐, 정말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드라마 <역린>의 남자 주인공이자 선한 역할이라기보다는 악역에 가까운 미친 왕, 이태는 이준의 필모그래피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배역이었다.

주로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로맨스 드라마에서 활약했던 이준이었기에 이번 배역은 무척이나 탐이 났던 것도 사실.

하지만 자신이 맡을 배역과 합을 맞춰야 할 상대가 승효라면,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재고는 무슨!’

이준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무조건 해야 해.’

어쩌면 이준에게 다시 오지 않을 배역일지도 모른다.

그가 연기자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난관일 수도 있었다.

시나리오는 완벽했고, 황 감독의 연출 또한 믿고 따라갈 수 있지 않은가.

이준은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선배님.”

미니 상견례가 열렸던 건물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준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승효가 서 있었다.

“집으로 가실 겁니까?”

무려 이틀 만에 제대로 된 대화가 승효에게서 들려왔다.

이준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승효를 응시했다.

“선배님?”

[원래 연장자가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의아해하는 승효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양랑의 말이 떠오른다.

‘젠장.’

그래.

결국엔, 양랑의 말이 맞다.

이준은 그간의 벽은 온데간데없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승효를 응시하더니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승효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말했다.

“승효 씨, 따라와. 나랑 어디 좀 가자.”

* * *

“어서 오…… 어머.”

달랑, 종소리가 들리자 문 쪽으로 인사하려던 차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교적 어둑한 가게 안이었지만, 고작 등장만으로 그곳을 훤히 밝히는 두 명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중 한 사람은 차영의 죽마고우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사적으로 알지는 못하나 TV나 뉴스, 잡지 등을 통해 많이 보아 온 사람이었다.

“자리 있어?”

이준은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 가게 안을 둘러보면서도 차영에게 말했다.

‘습관은 못 고치지.’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머물기를 결정하는 이준의 말에 피식 웃던 차영은 바 앞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잠깐 얘기할 곳이 필요해.”

“응. 알았어.”

칵테일 스테이션 밖으로 나온 차영은 두 사람이 자신이 손짓했던 테이블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다 문으로 향했다.

철컥.

‘OPEN’ 표시가 되어 있던 입구의 문구가 ‘CLOSE’로 바뀌었다.

“밥은 먹었어?”

차영의 물음에 이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금 출출하네.”

“샌드위치라도 만들어 줄게. 얘기 나누고 있어.”

“응, 고맙다.”

“별말씀을.” 하고 손을 살짝 들어 보이던 차영이 부엌 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홀 안에는 이준과 승효, 단 두 사람이 남게 되었다.

승효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이준과 차영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차영이 들어간 후 숨을 크게 내쉬는 이준을 쳐다봤다.

승효와 나란히 앉아 있던 이준이 마음을 정리했는지 홱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실언했어.”

이준은 무슨 소리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승효에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날 말이야, 승효 씨가 뭔데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냐고 했던 거. 그리고 우리가 단순한 협력 사이일 뿐이라고 했던 거……. 전부, 실언이야.”

승효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이준은 말했다.

“사실 승효 씨는…… 나한테 있어 단순한 협력자만은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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