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백호(白狐) (11)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따지고 보면 승효 씨랑 나랑은 이런 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도 아니지 않나?”
승효가 대꾸하지 않았다.
“만일 서로의 가문이 얽히지 않았더라면, 난 승효 씨랑 이렇게 시선을 주고받고 있지도 않았을 거야.”
“…….”
“우리는 결국 단순한 협력 사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데, 왜 승효 씨한테 내 행동에 대해 지적당해야 하지? 이거 생각 이상으로 불쾌하군그래.”
말을 뱉어 내고 난 후 흥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은 정말 화가 났을 땐, 놀라울 만큼 침착해진다.
이준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심지어 잠에서 깨어나자 들은 지적 때문에 더욱 화가 났다.
‘내가 왜 그 자리에 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백수호의 번지르르한 낯짝이 불현듯 떠올라 더욱 인상을 쓰던 이준은 제 말을 듣고 가만히 서 있는 승효를 노려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승효는 굳은 얼굴을 한 채 이준을 바라보고 있다 쓴웃음을 흘렸다.
“선배님은……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이준은 마치 상처받은 것처럼 중얼거리는 승효의 모습에 짐짓 화가 났다.
“이봐. 승효 씨.”
“알겠습니다.”
이준이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승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체 뭘 알겠다는 거야?
이준은 그 말을 하고 난 후 몸을 돌려 제 방을 나가는 승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득 이를 갈았다.
쾅―.
“저 녀석 뭐야, 진짜!”
이미 닫혀 버린 문으로 베개를 던진 이준이 소리쳤다.
《…….》
눈을 뜨자마자 승효의 얼굴을 봤고, 예정에도 없이 그와 다투기까지 했던 이준이 차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삭이고 있을 때였다.
“뭐야. 할 말 있으면 해.”
끓던 열기를 겨우 가라앉히던 이준이 제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숨을 내쉬는 양랑의 인기척에 입을 열었다.
《본군은 본디 인간들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이준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는 양랑의 음성에 코웃음을 쳤다.
‘그 원칙은 깨진 지 이미 오래지 않나?’
양랑은 이준의 생각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으려니, 구가의 녀석이 불쌍하게 느껴지는군.》
“무슨 소리야.”
싸늘하게 가라앉은 이준이 짜증을 가득 담은 음성을 뱉어 내자 양랑은 말했다.
《이건 본군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주인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좋겠어.》
“뭐?”
양랑의 말이 끊어짐과 동시에 이준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하아, 흐으…….]
기억 속의 누군가는, 아니, 기억 속의 ‘차이준’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두 볼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성은 어딘가 힘이 없었다.
[요기가 상당하군.]
[중급은 아닌 것 같군요.]
[적어도 상급이다. 아니면 그 이상이거나.]
[특급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한데 본군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감히 주인에게 요기를 주입하다니. 간이 커도 상당히 큰 놈이군.]
[아까 그 레스토랑이 문제일까요?]
[글쎄다. 하지만 그 전의 주인은 딱히 문제가 없었지. 잠깐. 주인의 영기가 불안하구나. 요기와 섞여 버리는 바람에 진정을 못 하고 있다.]
[…….]
[뭐, 뭐 하는 것이냐? 구가 녀석아!]
그런 이준을 침대에 뉜 채 서로 말을 주고받던 승효와 양랑 중 행동한 이는 다름 아닌 승효였다.
[네 녀석의 영기가 아무리 넘친다고 한들, 요기가 섞인 영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준의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에서 보랏빛이 아닌 적색빛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승효가 지금 당장이라도 영기를 주입하려는 듯, 이준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자 양랑은 소리쳤다.
[그래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요.]
[하지만!]
[도와주시지 않을 거라면, 방해는 하지 마십시오, 산군.]
철저하게 선을 그어 버리는 승효의 말을 듣고 양랑이 “망할 자식!” 하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곧 양랑이 결계를 만들어 두 사람을 보호하자, 흐리게 웃던 승효가 헐떡거리는 이준의 붉은 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다.
[……씨, 승효 씨.]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준에게 영기 주입을 마친 승효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이준이 히죽 웃으며 승효에게 다가왔다.
[선배님, 괜찮으……!]
의식을 차린 이준을 보고 안심한 승효가 그에게 물으려 했으나, 이준이 팔을 뻗어 승효를 바닥에 눕히는 게 빨랐다.
[선, 웁!]
순식간에 승효의 몸 위로 올라탄 이준은 배시시 웃으며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옴짝달싹하지도 못한 채 이준의 키스 세례를 받게 된 승효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올려다봤다.
이준의 혀는 벌어진 승효의 입 안으로 밀려들어 와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이준의 혀가 제 것과 엉키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다리 사이의 무언가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멈칫하던 승효는 갑자기 제 입 안을 휘젓는 행동을 멈추는 이준을 보며 당황했다.
[선배님, 전……]
[쉿.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준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승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옥 같은 손이 승효의 다리 사이를 지분거렸다.
[읏!]
놀란 승효가 어떻게든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비적거렸으나, 이준의 힘은 강력했다.
이준은 눈을 반으로 접어 생긋 웃더니 한 손으로는 승효의 허벅지 근처를, 다른 한 손으로는 승효의 티셔츠 안을 만지작댔다.
그러면서―.
[승효 씨, 이렇게 해 주니 좋아?]
“그만!”
이준이 버럭 소리쳤다.
‘이 무슨 무뢰한이야!’
양랑이 건넨 기억 속의 자신은 세상에 없을 무뢰배 그 자체였다.
번들거리는 입술로 승효의 입술을 탐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몸 위에 올라타서 행한 교양 없는 행동들이라니!
이준의 커다란 외침에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던 장면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준은 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양랑. 너…… 거짓말하는 거지?”
양랑은 그 말에 코웃음 쳤다.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주인. 본군이 언제 주인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있었나?》
이준은 말문이 막혔다.
‘없어.’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없다.
[본군의 주인이 죽었다. 하니, 이제 꼬마, 네가 본군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다.]
이준의 아버지인 현종의 죽음을 알리던 그날 역시 마찬가지.
이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양랑이 결정타를 가했다.
《주인은 구가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어제 구가 녀석이 아니었더라면 주인은 요기에 침식당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거야.》
* * *
“오늘은 미팅이 있어서 조금 늦을 거야.”
의식을 마친 이준이 흐트러진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말하자 정면에 있던 승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이준은 되돌아온 답변에 분을 삼켰다.
‘너 진짜 뭐 하는 거냐, 차이준!’
은근슬쩍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 보아도 단답식의 말투가 흘러나오자 말문이 막혔다.
‘아직은 안 되겠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킨 그는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어? 왜 배우님 혼자 오세요? 구 배우님은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저를 기다리고 있던 태경이 있었다.
이준은 의아해하며 그의 뒤를 살피는 태경에게 말했다.
“……한태경.”
“네!”
“넌 대체 누구 담당이야?”
“……예?”
이준이 싸늘한 표정과 함께 말하자 태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준은 흥 코웃음 치더니 밴에 올랐고, 태경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좀생이.》
이준이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자 양랑의 말이 들려왔다.
이준은 싸늘한 얼굴을 한 채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을 응시했다.
확실히 평소 자신과는 다른, 어딘가 좀스러운 얼굴의 한 남자가 창문 유리에 비쳤다.
벌써 이틀째.
백수호 기자와의 미팅에서 돌아온 이준은 승효와 필요한 말 이상은 주고받지 않은 상태다.
[제가 뭐냐고요?]
당시 이준을 보고 크게 실망한 듯 말하던 구승효의 말이 왜 이리 귀에 아른거리는 건지.
‘망할.’
냉전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만큼, 두 남자의 집에선 찬바람이 풍겨 댔다.
집 안에선 한동안 아무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영기 주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기 주입 의식 이후 매일 한 시간은 함께 있어야 하는 그 끔찍한 제약 동안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저는 물론이거니와 승효 역시 나란히 앉아 입도 뻥끗하지 않자 고역이 따로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주인이 먼저 숙이면 되는 일 아니더냐? 무엇을 그리 고심하는 거지?》
며칠째 은근한 자존심 대결을 이어 가는 두 사람을 보며 양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알아. 아는데…….’
그깟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이준은 심통 난 얼굴로 중얼댔다.
‘천하의 차이준 자존심이 있지, 사과받으면 몰라도 어떻게 먼저 사과해? 그리고. 사과를 하려고 해도 그 녀석 태도 좀 봐!’
그렇게 날만 세우는 녀석한테 어떻게 사과를 해?
양랑이 혀를 찼다.
《그런 마음으로는 글렀다. 화해란, 원래 보다 넓은 마음을 지닌 자가 행하는 거야. 주인은 구가 녀석보다 연장자니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게 낫지 않느냐.》
‘시, 시끄러워.’
이준은 쯧쯧거리는 양랑에게 속으로 대꾸한 뒤 다시 창문 쪽을 응시했다.
내려가 있던 커튼을 살짝 올리자 빠르게 지나가는 철교의 자재들이 보인다.
‘누군 안 하고 싶겠냐고.’
그놈의 사과를 하고 싶어도, 통 틈을 주지 않으니 먼저 손을 내밀기도 애매하잖아.
아마 승효가 그날, 백 기자와 이준이 만났던 일에 대해 염려했기에 그런 말들을 쏟아 냈다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백 기자와의 만남 직전 승효에게 문자를 보냈던 사람도 바로 자신이 아니었던가.
[승효 씨, 시간 나면 9시에 다음 장소로 와 줘.]
그런 문자를 보낸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백수호 기자로부터이준을 데려갔던 승효이니, 인사불성이 된 그를 보고 화가 날 만도 하지.
이준은 극심해진 두통에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때 이준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고 출발부터 차가 멈추어 설 때까지 일언반구도 하지 않던 태경이 외쳤다.
“배우님, 도착했어요!”